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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인들

<부산의시인들> 32. 이충기1

작성일 : 2026.05.11 12:34

부산의 시인들

 

 

32. 이충기 1

 

이충기(1953-2016)는 부산 부곡동 오시개 출신으로 경남공고를 나와 부산대 공대를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부산교대를 필자와 같이 다녔다. 아마 동기들 중 제일 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사실은 학교 다닐 때보다 졸업 후 초등학교에 발령받고 나서 더 친하게 지냈다. 자주 만나 술자리, 여행, 운동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벌이고 다녔다. 그리고 자기 반 학생들 관찰하다 재미있는 일 있으면 그 상황을 엽서에 몇 자 적어 우체통에 넣는다. 그렇게 서로의 책상 위에는 늘 엽서가 여러 장 놓여 있기도 했다. 글을 재미있고 재치 있게 잘 쓰는 친구였다. 그때 우리 반 친구들은, 당시 교대는 과가 아니라 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매달 한 번씩 서면 황성옛터란 주점에서 모임을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지쳐 있다 그날은 마음껏 회포를 푸는 날이다. 1981, 마침 그날도 모임이 있었는데 필자는 일이 있어 저녁만 먹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남은 친구들은 몇 차례 술을 더 마시고, 최종 몇 명은 롯데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 부산상고 앞 포장마차에서 만취할 정도로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통금시간이 다 되어서 각자 헤어졌는데, 이충기는 집이 부곡동이라 빨리 가기 위해 육교를 건너지 않고 한창 지하철 공사를 하고 있는 공사장 위를 가로질러 가다가 그만 지하로 추락하고 말았다.

오랜 기간, 그 뒤의 상황은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다.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자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은 동생 집에 얹혀사는 경추장애 전신마비의 이충기는 정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필자가 반보호자로 나서게 되고 한 주에 한 번 방문해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담배값도 주고 왔다. 필자의 결혼 때는 아내 될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승낙을 받기까지 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10년이 훨씬 지났는데 이충기는 여러모로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데 문단의 어느 지인이 글을 써보게 하라는 것이다. 가끔 펜을 손가락에 끼워 입의 도움을 받아 업드려서 편지를 쓰곤 하는데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 될 것 같았다. 산문은 아무래도 힘드니까 시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충기에게 시집을 몽땅 갔다 맡겼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충기도 시집을 한 권 두 권 읽고 서서히 시에 빠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밤새 시집을 읽고 울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원래 글을 잘 쓰고 감성적인 사람이었으니 좋은 시도 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 번은 새벽에 충기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밤새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해서 시 한 편을 썼는데 한 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잠결에 충기가 읽어주는 시를 들어보았다. 언뜻 듣기에도 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열심히 써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론 자기가 느끼기에 시가 괜찮다 싶으면 전화를 하곤 했다. 한 번씩은 필자가 최영철 정성욱 등 시인들을 대동하고 같이 가서 시에 대한 조언도 해주었다. 그런데 한 번은 갔더니 많이 우울해 있었다. 앞으로 시를 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시 쓰는 게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단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쓰는데 지금의 자기 삶이 너무 비참해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 이거라도 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반협박도 해 그 위기를 겨우 넘기기도 했다.

시를 쓰고 몇 달 후 모은 시들이 100여 편이 되었다. 그중 몇 편은 추려내고 시집 한 권 분량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비록 아마추어이긴 해도 그동안 부산에서 발간된 시집의 시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빛남출판사의 이상개 시인과 의논을 했다. 아마 크게 성공할지 모른다, 그래서 찍자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는 부수를 늘리자 줄이자, 출판사 사정이 어렵다, 등으로 옥신각신하다 필자는 만 부 정도를 원했지만 결국 3천 부를 찍기로 했다. 그 이전 어느 장애인 시집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몇십만 부가 팔리기도 했다. 그래도 부산에서는 정성욱 시인이 아들 이름으로 빛남에서 낸 시집이 3만 부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도 수만 부는 팔릴 거라는 어떤 기대가 있기도 했다. 시집의 제호는 이것저것 정하다 결국 이충기의 뜻대로 기다리는 나무로 하기로 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자는 뜻이었다.

시집이 나오기 며칠 전쯤 평소에 친분이 있던 부산일보 문학 담당 김종명 기자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전화를 했다. 김기자를 만나서는 다짜고짜 할 일이 있다며 지하철에 태워 이충기 집으로 갔다. 가면서 대충 사정을 말하고 좀 도와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이충기를 만난 김기자는 그 상황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역시 기자답게 이것저것 캐묻고는 한 두 시간 지나 집을 나왔다. 저녁을 하면서 김기자 말이 제가 40 평생 살면서 이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러면서 필자에게도 수고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며칠 뒤 부산일보 사회면에는 이충기의 삶과 시집에 대한 기사가 아주 크게 실렸다. 독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원래 김기자는 신문 1면에 실을 것을 편집부에 강력히 요구했는데 신문사 사정상 어쩔 수 없이 2면에 싣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빛남에는 시집 판매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박홍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