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가요산책 29> 이미자의 그리움은 가슴마다

작성일 : 2020.12.12 07:14

이미자, 그리움은 가슴마다

/이승주 시인

나는 트로트다. 여전히 지금도 내 심장의 피톨과 내 정서의 여린 세포들은 트로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내게 있어 트로트의 애절한 가락과 비애와 상심의 노랫말은 그대로 내 피톨과 세포 안의 비애와 상심을 녹여내는 용해제였다. 나는 늘 트로트를 흥얼거렸다. 길을 걸을 때도 버스 안에서도 계단을 오를 때도 아, 가여운 내 청춘의 끝내 새벽에 닿을 수 없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이미자, 동백아가씨중에서)”들의 미로를 방황할 때도 트로트는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그냥 흘러나왔다. 그럴 적에 트로트는 사바세계의 고해에 빠진 나를 건져 올려 이승 아닌 어떤 내 태생의 아늑한 슬픔의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일상의 부하에 짓눌려 파김치가 되어 눈뜨기조차, 한 마디 말 내뱉기조차 힘들다가도 어디서 이미자의 노래라도 들려오기라도 하면 마치 목마른 대지가 해갈의 단비에 젖듯 나는 금방 트로트에 젖게 되고, 그러면 눈 녹듯 피로가 가시고 거짓말처럼 원기가 되살아났다. 내게 박카스는 지금도 트로트다. 각설하고,

노래는 전성기 때 목소리로 들어야 제맛이다. 몸도 노래도 전성기를 지나면 쇠해 진다. 모름지기 노래는 가락을 압도해야 제맛이 나는 법인데, 전성기를 지난 노래는 듣는 사람도 힘이 든다.

불가항력으로 세월 따라 몸이 늙어가고 노래도 쇠해 지는 것이지만, 내가 아는 가수 중에 이미자(선생님)만큼 노래가 늙지 않는 가수가 없다. 프로 정신이라고 하지만 이미자(선생님)만큼 프로가 없다. 이미자가 언제 이미자이던가. 내게는 구구단을 외기보다 더 먼저 별리와 사모의 애틋함을 노래로 가르쳐준 전설(?)의 이미자가 아니던가. ‘가요무대같은 데서 다른 원로가수들이 나오면 애가 쓰이고 듣기에 안쓰러움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닌데, 살아 있는 전설의 이미자 노래는 어쩌다 요즘 다시 들어도 그 목소리는 조금도 녹슬지 않아 왕년의 전성기의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니랴.

 

애타도록 보고파도 찾을 길 없네

오늘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

그리움만 쌓이는데

밤하늘에 잔별 같은 수많은 사연

꽃은 피고지고 세월이 가도

그리움은 가슴마다 사무쳐 오네

 

꿈에서도 헤맸지만 만날 길 없네

바람 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

서러움만 쌓이는데

밤이슬에 젖어드는 서글픈 가슴

꽃이 다시 피는 새봄이 와도

그리움은 가슴마다 메아리치네

가사도 가사려니와 이미자의 가락을 압도하는 애절한 목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당신과 함께 보았던 밤하늘의 잔별들만큼 쌓이고 쌓인 수많은 사연들이 가슴마다 그리움으로 사무쳐 드는데, 지성이면 꿈속에서는 뵈어야 할 것인데 꿈에서조차 만날 길 없어 바람 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처럼 서러움만 쌓이는데, 세월이 가도 꽃이 다시 피는 새봄이 와도 그리움이 서러움으로 가슴 아픈 건 오래 지워지지 않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있는 까닭이리니 어느 사랑이 또한 그렇지 아니 하랴. 만고불변의 사랑이여, 그리움이여.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도종환, 봉숭아

사랑도 그리움도 다른 이름은 손끝마다 핏물이 배이는 아리고 아린 상처”, 내 옛사랑의 추억의 다른 이름도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