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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11.28 10:32
유등
/강희근
내 몸에 글을 써다오
나는 흐르고 흐른 뒤 기슭이나 언덕
어디 햇빛
어디 구름들 아래 이그러지다가
생을 마치리라
글을 써다오
생이라면 글줄이 있어서, 먹물 같은
캄캄함이 있어서
택배로 사는 노동을 다하다가
마감 날 떳떳이 지리라
여인이 있다면 여인의 눈썹으로 뜨는 글
수자리로 가는 남자 있다면 남자의
태극기로 펄럭이는 글
적어다오
내 몸은 불길 번지는 화선지
아직은 여백이다
-등단 50주년기념시집 <프란치스코의 아침>(한국문연,2015)
*강희근(경남 진주); 경남 산청 출신, 진주고,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아대 대학원 문학박사,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당선으로 데뷔(1965) 시집<연기 및 일기>,<그러니까>등 17권, 연구논저<우리시문학연구>,<우리 시짓기>등 13권, 국립 경상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역임,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경상남도 문화상, 펜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등 수상
동국대 재학중 서울신문 신춘문예(1965)에 절창 <산에 가서>로 데뷔한 강희근 시인이 어느덧 시단 데뷔 55주년이 되었다. 그래서 5년 전 등단 50주년기념시집이자 제17 시집인 <프란치스코의 아침>이라는 신작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는 데뷔 초기부터 한국적 전통 서정을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큰 명제에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대학의 은사이자 시의 스승인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적 경향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하기 위한 50년의 긴 시적 여정을 달려온 셈일지도 모른다.
그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진주에서 자랐고 서부경남 명문 진주고를 졸업하고는 한국문학의 총본산이라는 동국대 국문과를 진학하여 대학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는 다시 진주로 돌아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경상대 국문과 교수를 하는 동안 줄곧 진주를 떠나지 않았다. 필자와는 진주고 1년 선배로 입학하였지만 필자가 재학중 신병으로 1년 휴학한 탓에 2년 선배가 되었다. 경향각지의 문인들이 진주하면 강희근 시인을 연상할 만큼 지역 대표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역성을 극복한 시인이기도 하다.
작품<유등>은 예전에는 개천예술제의 번외 행사로 개최하였으나 지금은 진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명예대표축제가 된 유등축제의 유등을 시적제재로 한 시이다. 말하자면 진주의 향토성을 대변하는 것이 시적제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화자이기도 한 ‘유등’은 단순한 풍물이 아니다. 강 시인은 유등을 화자로 하여 시인의 처절하기까지 한 시적 태도와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일종의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인 것이다. 이렇게 그는 향토성을 극복하면서 세계성을 획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이미지가 정적이 아니고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양왕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