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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가요산책 26>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작성일 : 2020.11.23 12:34 수정일 : 2020.11.23 05:34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낭만이 사라진다. 나이 들면서 낭만이라는 말을 참 못 들은 지 오래다. 지금 낭만이라는 말은 우리 가슴 속에 화석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일까. 낭만이 꼭 로맨스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낭만이라고 하면 먼저 로맨스가 연상된다. 로맨스는 모든 것이 풍족하게 갖추어질 때보다 정서적으로 가난할 때 아름다움을 더한다. 또한 그것은 과시나 점잖은 체함보다는 애틋함이나 설렘과 더 어울리고, 화려한 사교계의 밝은 샹들리에 조명이나 세련된 연미복보다는 옛날식 다방 마담의 새빨간 립스틱, 밤늦은 항구의 선창가 연락선 뱃고동 소리와 어울린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낭만. 낭만이라는 말은 아련하다. 낭만이라는 말은 울컥하고도 새삼 마음을 덥히는 현재형이지만 가버린 세월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기꺼이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낭만. 낭만이라는 말은 촉촉하다. 촉촉하게 눈가를 적시고, 텅 비어 버린 가슴 한편을 촉촉하게 적신다. 낭만. 낭만이라는 말은 지금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황홀한 불꽃의 향연이 끝나고 난 뒤의 사그라지는 숯불의 미열이다. 이글거리는 사랑의 잉걸불에 가슴이 데일 때보다 낭만의 미열에 가슴을 데일 때 그 허전하고도 서글픈 아릿함은 더 오래 지속된다. 낭만이라는 정서를 통해 우리는 가버린 세월그 시절의 뜨거운 불꽃이 온 청춘을 불사르던 그 순간들과 그 흔적들을 아련히 되돌아보게 한다.

낭만. 낭만의 뿌리는 첫사랑 그 소녀이고, 낭만의 연료는 실연의 달콤함보다 오히려 희미한 옛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듣는 사람,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듣는 사람은 낭만을 아직도 가슴에서 파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첫사랑이 떠나고 남은, 왠지 가슴 한 곳이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채워지는 첫사랑 그 소녀와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에 대한 회한과 서글픔, 그것이 낭만의 얼굴이다.

 

화대(花代)로는 청춘이나마 주었으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이여,

눈 속에 다 담고 가라.

이승주, 다시 봄날에

 

낭만이라는 말은 실연의 달콤함과 청춘의 미련마저 함께 거두어 흘러가는 무정하고도 야속한 세월 속에서 아릿한 심장으로 읊조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끝나지 않는 전춘(餞春)의 애틋한 헌사(獻辭)이다. 나는 위의 졸시를 오는 세월도 맞기 전, 이 노래가 나오기도 전 창창한 스물 대여섯 그때쯤 벌써 그것을 예지예감이라도 한 듯 먼저 쓰고 첫 시집의 첫 페이지에 실었다. <이승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