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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기억

작성일 : 2020.10.26 04:29 수정일 : 2020.11.20 03:21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시간이란 조용히 흐르는 물이 아니라 거세게 회오리치는 깊은 심연과 같아서 기억의 소용돌이를 되돌리는 것은 너무 어렵다. 우리는 과거는 기억해도 미래는 기억할 수 없다. 내 시간의 엔트로피 화살은 심리적 화살로 기억될 뿐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간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유연하다는 이론은 많으며 참으로 유동적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 시간은 빠르기도 하며, 느리기도 한다. 아주 짧은 시간, 지극히 급박한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길게 느껴진다. 신경과학의 측면에서 인간의 뇌는 위험상황에서 더 많은 정보를 신속하게 받아 들여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그 순간은 시간이 마치 긴 것 같이 느껴진다. 그 찰나에, 지나온 아주 눈물겹게 중요하고 소중하게 겪은 일이나, 진정 사랑으로 느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녹화된 영상을 천천히 다시 보듯이 느껴진다. 요즈음의 나는 이상하리만치 잊고 있었던 기억마저 되살아난다.

화실옥상에서 친구 임택근과

 

-기억의 더께 여덟 – 오만과 갈등, 부산대학교 미술교육과 초기 시절

 학교를 대신동에서 장전동으로 옮기다보니 자연히 동아대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입시부정사건 후, 두 번 치른 입학시험으로 합격한 학교는 긴장된 분위기와 삼수생의 대학입학으로 살짝 선후배관계로 복잡했다. 동래고 한해 후배인 (고)이갑재(서양화가, 시인, 소설가), 박성원(전 동아고미술교사)가 한해 선배일 뿐만 아니라 화실의 후배들도 한해 선배로 많이 있었다. 스스로 별일도 아닌 일에 개똥같은 자존심이 많이 상해 약 1년 정도는 동문들과 어울리는데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전체 학과회의 중, 한해 선배랍시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개폼 군기 잡는 한 학년 위 후배에게 뒷머리를 가격당하는 폭행을 당해 기절한 적도 있다. 저런 애가 나중에 교사가 되면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하고 미리 걱정도 했다. 동급생 남학생 7명은 좀 촌티가 나면서 대체로 어리숙한 편이었고, 나머지 23명이 여학생이었는데 모두 졸업 때까지 질릴 정도로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다. 어찌나 열심히 수업에 임하는지 정말 교양과목이나 미술이론, 실기 성적들이 좋았다. 신설 미술교육과의 시작은 (고)이의주(서양화)교수와 함께 시작하여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인성(조각), (고)김수석(디자인), (고)손수광(서양화), 김해성(미술이론, 서양화), (고)김정희(한국화)교수님들이 차례로 부임해 왔다. 강사로는 허 황(서양화), 이동순(서양화), 우담 이영수(한국화), (고)배재식(서예), (고)김복만(사진), 조운복(해부학)선생님 등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 (고)이의주선생님께서 나에게 장학금을 주기위해 교양학부 강의실 밖에서 우산을 쓰고 나를 기다리시던 모습이 그립다. 철저한 사실주의를 고집하면서 졸업 때까지 인물과 정물, 그리고 풍경만을 지도하셨는데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현대미술에 경도 되어있던 나는 졸업할 때쯤엔 선생님과 소원해 졌다. (고)손수광선생님도 학생답지 않은 이상한 작품을 많이 한다고 싫어 하셨다. 1977년 부산미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을 때 어깨를 주무르며 쓸데없는 힘이 많이 들어 있다고 놀려댔다. 그래도 실기수업 중에는 선생님의 수업방식에는 철저히 따라했다.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진중한 작업 모습을 존경했으며, 특히 손수광선생님의 사실적이면서도 가끔 모델이 옆으로 멀리 하늘을 쳐다보는  인물화와 사과나 석류가 살짝 허공에 떠있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를 풍기는 정물화작품을 아주 좋아했다. 이의주선생님과 손수광선생님 두 분은 대형 임진왜란전투 역사기록화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최예태(서양화가)선생님께서도 학교 실기실에서 두 분의 작업을 도우며 함께하셨다. 손선생님의 서울에 있던 집에 놀러 갔을 때는 집이 너무 좋아 충격을 받았다. 나는 선생님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아다니면서 넓은 집 구경을 했는데, 대문을 통해 들어간 집은 정원을 통하여 한참 떨어져 있었으며 본가 외 화실, 작품창고 등 모두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다. 어린 나는 ‘화가도 엄청난 부자로 교수도 하면서 잘 살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리석선생님의 사위라는 것도 후에 들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은 중앙대 예술대로 학교를 옮기신 후에 2002년 어금니를 뽑고 나서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을 때 재능이 좋은 사람은 하늘이 좀 일찍 데려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한인성선생님은 대학본관 북측 대형 조소실에서 현재 초량에 설치되어 있는 <정 발장군>동상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노재승(조각가, 전 성신여대교수)선생도 서울에서 내려와 도왔다. 흙 만지는 작업이 재미가 있어서 함께 소조로 갑옷의 단추를 만들어 붙이는 일을 잠시 도왔다. 대학원 졸업 후에 노재승선생과는 정관모(조각가, 전성신여교수)선생님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미술청년작가회 같은 회원이 되어 더 반가웠다.

 저녁엔 친구 임택근과 양정 <토우 화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돈을 벌고 생활을 했어야 했다. 주로 입시생의 실기교사로 학생의 집에 개인지도를 많이 하러 다녔다. 당연히 화실강사보다는 수업료가 많았으며 지도한 학생은 좋은 대학으로 거의 진학시켰다. 화실 없이 떠돌이 생활은 작업에 대한 굶주림을 주었고, 그 결핍을 통해 세상과 나 자신을 어느 정도 성찰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근거 없이 떠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부산대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적 화풍 분위기에서 수업을 받던 중 나는 식상하여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 있었다. 내가 수업 중에 받은 가장 작품 같지 않은 강열한 선생님의 하얀 작품 때문에 양정로타리 부근의 허 황(서양화, 전 신라대교수, 시립미술관관장, 부산비엔나레 운영위원장)선생님화실로 무작정 찾아가서 “선생님께 배우고 싶습니다.”고 했다. 흔쾌히 “같이 그림 그리면서 지내자”고 받아 주셨다. <가변의식>이라는 주제의 하얀 요위에 하얀 베개를 올려놓은 것 같은 형상에다가 린시드가 많이 섞인 하얀색 유화물감으로 계속 중첩해서 덧칠을 하여 흰색의 미묘한 변주와 깊이 감 있는 회화작품을 주로 하고 있었다. 앙데팡당전에 신인상을 받았는데 수상소감으로 “한국의 이중섭보다 세계적인 미치광이가 되겠다!“고 좀 우스운 말을 했다한다. 자주 한국 단색화의 백색은 최초로 자신이 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1975년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 황과의 동경화랑 <한국 5인의 작가 흰색전>을 통해서도 보여준 전시였다’고 틈만 나면 설명하며 자랑을 하셨다.
 허 황선생님은 서울에서 홍익대, 대학원을 마치고 막 부산에 내려와 대학 강사로 생활하면서 주로 대학생을 화실에서 지도하고 계셨는데 평소 사교성이 좋아서 늘 친구들이 자주 화실로 방문하였다. 허선생님은 그럴 때면 오시는 분에게 늘 나를 좋게 소개해 주셨는데, 내성적이었던 나는 선배 선생님들을 많이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해 연산동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전신)옆으로 이사를 하여 오리진화실이라는 이름으로 화실을 운영하시면서 생활하시었는데, 혼술하기 싫어하시는 선생님과의 생활은 젊은 나에겐 예술가의 삶, 그 자체였다. 사실, 이우환선생의 작품도 걸려 있었던 오리진화실에서의 동거생활은 내 인생의 전환기였다. 허 황선생님은 활발한 작품 활동과 전시와 함께 수많은 국내외 작가들과의 교우관계가 좋았다. 그리고 외향적 성격은 일본인도 놀라는 비상한 언어적 순발력으로 일본어 실력을 구사하고, 볼링도 잘 치며, 흰색만을 주로 다루는 작업을 해서인지 다양한 노래 솜씨와 감각적인 춤과 더불어 아주 감성적으로 예민하셨다. 의외로 다소 내성적이던 나와 아주 잘 어울렸다.

 3학년 때 과대표가 되어 학내문제에 관심을 가지던 중 하루는 (고)김수석(디자이너, 전 부산대예술대학장, 전 부산미술협회장)선생님께서 본관 앞 잔디밭에서 조용히 나에게 말씀하시길 “자신은 문제교수이고 너는 타 학생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문제 학생으로 지목되어 사찰을 받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셨다. 숙명여대에서 학장으로 계시든 중, 부산이 좋아 지역의 디자인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오셨다 했다. 터놓고 사생활까지 전해주시는 모습에 반해 연구실을 들락거렸다. “화가로 출발하여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디자이너가 되었다“면서 특히 강열한 원색조의 여성인체의 곡선적인 추상적 변형작업도 실크스크린 판화로 많이 하셨다. 정말 잘생긴 미남의 얼굴로 얼마나 말씀을 재미있게 해주시는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소 술도 한잔씩 하면서 뵐 때면 나는 언제나 희망적으로 행복을 가득 받고 존경하며 친하게 지냈다. 졸업 여행 때에 서울의 약수동 댁으로 우리를 초대해서 놀러 갔을 때에 제자인 우리에게 사모님과 고등학생인 딸과 어린 아들이 깍듯이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그 모습에 나는 더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때 그 아들이 지금의 김영준(부산현대미술관 학예사)이다. 김해성(서양화가, 미술평론)선생님께서 그나마 이론적으로 미술사와 현대미술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정말 열정적인 강의로 지도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경주박물관, 시내 전시장 등의 현장 수업도 많이 하셨는데 아마도 학생들이 너무도 잘 받아들이고 기말고사 성적들이 좋아서 아주 재미가 있으셨던 것 같다. 한번은 현대미술사 중간고사 시험문제가 너무 문제 같지 않아 보여서 객기로 백지를 내어버려 선생님께 불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그땐 왜 그랬는지 지금도 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

 박성원(서양화), (고)이갑재(시인,소설가), (고)김원명(서양화)선생님의 아들인 김태홍. 그리고 윤희훈(디자이너), 김화곤(서양화), 박기선(서양화), (고)박수용(서양화), 박희규(조각) 등은 수업시간에 땡땡이 까고 당구장에서 많이 보낸 친구들이다. 당구와 트럼프카드는 우리의 교양과목이었다. 밀양 출신 김화곤 하숙방에서 같이 카드 놀이하던 재일교포 친구가 간첩이라고 발표되고 하면서 혹시나 불려갈까 겁도 나고 했다. 후에 모두 조작된 사건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시절 재학 중 민주화를 부르짖고 운동장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이 수시로 모여서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곤 했다. 학교 앞은 늘 최루탄 연기로 매퀘했다. 어쩌면 당시, 좀 애매한 유흥이나 미친 연애, 화실에서 그림에 빠져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운동권에 들어가 독재타도를 외치고 다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얼추 죽도록 맞고 반쯤 실성했든지, 아님 진보 정치적 성향의 미술을 하면서 다녔을지 모를 일이다.

 실기실에서는 틈만 나면 김민기의 ‘친구’나 양희은, 세시봉의 노래를 금지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통기타 반주 하나로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다. 동기여학생들도 내 주변에 둘러앉아 같이 노래를 많이도 불렀다.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번안 곡 인줄도 모르고 애창했다. 엘비스 플레슬리가 1962년에 발표한 ‘anything that’s part of you‘이다. 차중락이 27살로 일찍 낙엽 따라 요절하여 가버려서 그 후로 노랫말처럼 되기 싫기도 하거니와 난 아직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기위해 더 살아야 한다는 나름의 논리로 이 노래를 잘 부르지 않았다. 지금도 이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노래가사가 너무 슬퍼서 허망하다든지, 죽음을 연상하는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타령인 엘비스 플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는 지금도 나의 애창곡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