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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10.09 05:41
김미성의 먼 훗날
/이승주 (시인)
이런 날에는 이런 노래가 제격이다. 흐린 가을날, 가게 출입문 앞의 현수막이 찬바람에 펄럭이고 거리에 인적 끊어진 이런 날. 두문불출 마음을 닫아건 채 무료한 하루가 지는 이런 때, 느닷없이 내 입에서 노래 한 소절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를 언제 적에 불렀던가.
행여나 날 찾아왔다가 못 보고 가더라도
옛정에 메이지 말고 말없이 돌아가 주오
사랑이란 그런 것 생각이야 나겠지만
먼 훗날 그때는 이 사람도 떠난 후일 테니까
행여나 날 찾아왔다가 못 보고 가더라도
추억에 머물지 말고 말없이 돌아가 주오
사랑이란 그런 것 생각이야 나겠지만
먼 훗날 그때는 이 사람도 떠난 후일 테니까
먼 훗날을 가정한 노래다. “먼 훗날 그때”, 지금은 아니지만, ‘당신’이 너무 늦게 찾아 올 먼 훗날 그때는 내 사랑도 ‘당신’을 떠난 후일 것이라는 말. “먼 훗날 그때는 이 사람도 떠난 후일 테니까”에서 “도”는 동일(同一)의 보조사다. 그러므로 먼 훗날 행여나 날 찾아올지도 모를 ‘당신’은 이미 내 곁을 (혹은 이 세상을) 떠났음을 전제한다. 행여나 날 찾아왔다가 못 보고 가더라도……. ‘당신’도 잊고 사랑의 상처도 다 아물었을 먼 훗날, 행여나 날 찾아왔다가 못 보고 가더라도 부디 말없이 돌아가 주오. 인연이 그러한 것처럼 사랑이란 것도 또한 그런 것이니까. “사랑이란 그런 것”. 사랑이 끝나고 눈물도 다 마르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깨닫는, 사랑의 열정을 다 태우고 남은 재 위에 미련조차 말갛게 비워내고 난 후 적는, “사랑이란 그런 것”. 영원한 인연이란 없고, 사랑조차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것도 바로 “그런 것”. 그러니 너무 늦은 먼 훗날, 어쩌다 문득 생각이 나서 옛 사랑을 찾아왔다 하더라도 “옛정에 메이지 말고” “추억에 머물지 말고 말없이 돌아가”야 하는 것.
오늘 같은 이런 날 가슴을 헤집는 이런 노래는 사랑의 열정을 다 소진한 사람이 불러야 제격이다. 아직도 사랑의 불꽃을 다 연소하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 “사랑이란 그런 것”을.
오랜만에 문득 불러보는 김미성의 「먼 훗날」이 서가에 꽂힌 시집에서 시 한 편을 불러낸다.
혼자 저녁을 먹고서 기타를 뜯다
내게로 오다 뒤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창 너머로 우연히 보고 말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왔으며 왜 들어오다 말고 발길을 돌렸을까
순간 나는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나는 기타를 내려놓고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오래 따라갔다
그것은 뒤돌아서 가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김승강, 「쓸쓸한 예의」
저릿함이 오래도록 파문처럼 밀려온다. 이상하다. 김승강 시인의 시편들의 저류(底流)를 이루는 상실과 부재(不在)의 정서 때문일까? 읽을수록 실재와 가상이, 현세와 내세가 묘하게 중첩된다.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나”의 혼령이 와서 지금의 나의 이 순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 기묘한 느낌. 생전(生前)을 보는 사후(死後)를 미리 돌려보는 느낌. 시인은 잠시 안타까운 백일몽이라도 꾼 것일까. 이 시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 “나”―시인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믿지 않는다. “나”는 정황상 “그”가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연히” “내게로 오다 뒤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말하지 않아도 “우연히”란 말은 간절한 그리움이 불러 온 인과(因果)이리라. 그는 “무엇 때문에” 왔을까. 무엇 때문에 그는 내게로 오다 말고 반가운 해후도 없이 “뒤돌아서 가는” 걸까. ‘옛정’이라도 생각이 나서 날 찾아왔을까. 애틋한 이승의 연(緣)은 영결 후에도 옛정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서늘하게 비애를 적신다. 이승의 연과 사랑에 대한 마지막 끈을 놓고 영결하기 앞서 감사의 인사로 그가 내게로 왔으리라. “나”―시인은 이러한 정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수긍한다. 그러므로 눈으로라도 “그의 뒷모습을 오래 따라가”는 게 그와의 인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리라.
김미성의 「먼 훗날」이나 김승강의 「쓸쓸한 예의」나 가슴을 저리게 한 통증이 맑게 가신 노래이며 시다. 한쪽 가슴이 저릿하게 아픔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며, 그 통증이 사라지는 날은 내가 함께 사라지는 그날이라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