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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10.08 10:39
불륜의 미학
작가 신경숙 이름을 들어본지가 좀 오래되었습니다. 표절 시비가 있고나서부터입니다. 작가에게 표절이란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신작가가 독자들에게 받았던 사랑에 비례해서 표절의 배신감도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 덕에 표절 시비의 도화선이 되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을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미시마의 작품으로는 수작(秀作)이라고는 할 수 없고 태작(怠作)을 겨우 면한 수준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국주의, 천황숭배, 파시즘의 이념을 선전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설로 쓰면서 주인공의 삶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관념의 화신으로 일반화하면서 빚어진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자신의 생생한 직간접 체험이 녹아들어가지 못한 역사의 소설화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허무맹랑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 하나의 대표적 사례라 할 것입니다. 신작가가 베껴 쓴 부분은 그런 관념의 파티 중에서도 비교적 비관념적인 애정 묘사 장면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상투적인 묘사 장면입니다. 신혼의 젊은 남녀가 육체의 열락을 알아가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과정’을 그린 대목입니다(인터넷 검색 참조).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미시마의 틀에 박힌 듯한 묘사에도 불만이 많지만(특히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라는 표현) 그것에 유려한 관념 유희를 덧붙인(‘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신경숙의 묘사에도 불만이 많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관념화된 정념’, 상투적인 묘사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쓰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원하는, 욕정에 넘치는 젊은 남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제대로 묘사하겠습니다(여자의 신체 어느 부분을 특히 탐닉하는지 그리겠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육체적 반응도 세밀하게 그려내겠습니다. 우선 그들이 교합하는 장소에 대한 묘사부터 제대로 하겠습니다(미시마도, 신경숙도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 넣겠습니다.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에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와 같은 모순어법은 쓰지 않겠습니다. 밤낮 안 가리고, 장소 불문하고, 육체의 향연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밤’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요?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소설의 정수(精髓)를 훔쳤다고 한다면 이런 서운함이 좀 덜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거의 최악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대목을 공연히 참조해서 화를 자초한 느낌입니다. 사랑 묘사에 서툰 신작가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신작가의 출세작 「베트민턴 치는 여자」나 「풍금이 있던 자리」는 남들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여자의 내면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작품 속의 여자 주인공들은 늘 ‘불륜’의 강박에 시달립니다. 그 강박이 현실의 생생한 에로티즘을 외면하고 관념화된 정념으로 일관하는 신경숙 소설의 문체를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볼 만은 하나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무엇을 쓰든 표절의 의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작품세계 전체가 ‘불륜의 미학’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신경숙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는 ‘불륜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불륜 관계에 놓인 한 여성이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처에 대한 고백’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마지막은 윤리적 결단으로 마무리한다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유부남과의 밀애를 즐기는 미혼여성의 무의식 속에는 ‘부성(父性) 콤플렉스’가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상식’에 근거한다면,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연하남’들은 모두 ‘모성 콤플렉스’ 소지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상식’은 흔히 인정받는 ‘설명의 근거’이긴 하지만, 설명의 대상을 항상 자기 눈 아래 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프로이트 심리학에 매료되면서도 그의 제자가 되기가 늘 주저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한 우주입니다. 상처가 있으면 있는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인간은 모두 하나의 완전한 실체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불완전한 대상’으로 평가할 권리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아니면, 스스로 자책하는 인간, ‘원죄 있는 인간’들뿐입니다.
연일 끔찍한 소식들이 아침 뉴스에 실려서 날아듭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을 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윤리의 실종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 세상 인간에 대한 모든 ‘설명’은 반드시 ‘윤리적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윤리가 없으면 그 모든 설명은 공연한 말장난입니다. 문득 아침 뉴스를 들으며 엉뚱한 생각 하나가 들어옵니다. 토니볼프의 ‘여성성의 네 가지 유형’이라는 이야기 중의 ‘헤타이라’ 이야기입니다.
...헤타이라(반려자) : 헤타이라, 혹은 반려자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개인적인 관심, 성향, 혹은 온갖 문제들을 주목하며 그런 측면을 자극하고 촉진한다. 슈레의 ‘영감(靈感) 있는 여인’은 주로 이 형태에 속하지만 창조적 인간은 예외라고 했다. 창조적 인간, 즉 예술가는 그 자체의 범주를 가지고 있어 기능이나 구조유형 밖에 있다. 헤타이라의 기능은 남성 속에 있는 개성적인 정신생활을 일깨워 그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을 넘어 전체인격을 실현하도록 돕는 데 있다.
그래서 헤타이라는 남성의 그림자 측면과 아니마의 주체적 측면을 건드린다. 이것은 다소 위험한 문제이므로 여성은 관계의 법칙을 잘 의식해야 한다. 헤타이라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자기자신이나 남성과의 관계의 개성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남성의 외부세계와의 관계나 외부세계에서의 역할, 사회적 지위, 경제적 보장 등 페르조나를 무시하는 결과를 빚기 쉽다. 그래서 남성으로 하여금 창조적인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직업을 버리겠다고 나서게 만든다든가, 아내보다 헤타이라가 자기를 더 잘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이혼하겠다고 말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한다. 토니 볼프는 말한다. “헤타이라에 속하는 여성은 착각이나 어리석음을 고집함으로써 유혹하는 여인이 된다. 자유로운 여인 칼립소 대신에 요정 키르케가 되는 것이다.”[중략]
결혼한 여성이 그녀의 헤타이라의 성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이를 억압하면 그녀는 아들을 은밀하게 애인으로 삼고, 딸을 여자친구로 삼게 된다. 헤타이라가 인간관계를 잘 배웠으면 개별적인 관계의 법칙들을 알아차리고 무엇이 거기에 속하고 무엇이 아닌지, 경우에 따라서는 관계가 언제 충족되고 완성되었는지를 알게 된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중에서]
토니 볼프는 ①어머니와 아내의 정신적 형태, ②반려자, 여자친구인 헤타이라(Hetaira : 고대 그리스의 고급 기생), ③아마존(Amazone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호전적 여인족), 그리고 ④메디알레(Mediale : 영매의 힘을 지닌 자, 중개자)의 정신적 형태가 여성성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심리학적 유형과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각각 두 개의 대극으로 이루어지며 네 가지 중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것이 무의식 속에서 열등해진다고 합니다. 볼프는 이것이 살아가는 가운데 의식되어 통합,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이 네 가지 구조적 형태는 문화사적으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형적 구조이자 남성 아니마의 측면에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이부영, 위의 책 참조]
토니 볼프의 설명은 여성의 정신(심리, 영혼)을 ‘어머니와 아내의 정신적 형태’에 묶어두고 나머지 것들을 ‘변이’로 간주하려는 일종의 ‘윤리적 실천’에 종속된 것으로 읽힙니다. 어쨌든 이 ‘설명’은 요즘 들어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불륜적인 사내(社內) 연애’의 한 유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그것들은 통상적으로 여성이나 남성이나 서로에게 ‘헤타이라’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윤리적 실천’과는 배반되는 행태를 보여주게 된다는 공통점을 보입니다. 그런 ‘선택’이 ‘배반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소식’이 될지는 전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풍금이 있던 자리」가 잘 그려서 보여주었듯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원죄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불패의 상처’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게 인간인 것 같습니다. ‘설명’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양선규 소설가/대구교육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