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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9.28 11:12 수정일 : 2020.09.28 11:17
세종의 신악(新樂) 이념- 조선식 아악의 창제
세종은 어느 날 아침 조회에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이오.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그것을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제사에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싶소.“(1)
아악은 중국의 궁정 음악입니다. 주나라는 궁정 아악의 체계를 창시하였습니다. 기원전 11세기 중기에 12율 음율 체계를 완성하였으며 7성의 음계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2). 아악은 고려 광종(949-975)때 들어왔습니다. 광종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악기와 악공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고 한 집안이 악의 업무를 관장 하도록 하였습니다(3). 태종 때 예조 판서는 아악이
전해 진지 오래되어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므로 예전 악보를 찾아 중국의 아악을 복원하여 나라의 정악(正樂)으로 삼자고, 왕에게 건의합니다. 아악은 정악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조선에는 아악 말고도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고유의 악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속악 또는 향악이라고 합니다.
세종은 아악이 중국의 음악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중국인들은 보통 때에도 아악을 들으니 친숙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보통 때에는 향악을 듣다가 죽으면 제례에서 낯선 아악을 듣습니다. 이런 일이 이상하지 않으냐고 세종은 신하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적 문제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을 갖춘 신하가 왕에게 건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아악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개선책을 제시합니다.
“악공(樂工) 황식(黃植)을 명나라로 보내 조정에 들어가 아악 연주를 둘러보게 하였더니, ‘장적(長笛)·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아악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다 하오."
중국에도 악은 아악과 향악으로 나뉩니다. 아악은 품격 높은 정악이며, 향악은 통상의 속악입니다. 이 말에 우의정 맹사성이 응답하며 중국은 하, 은, 주 시대부터 시작과 끝은 아악으로 하지만 사이에는 속악을 섞어 썼다고 말합니다. 중국이 아악에 속악을 섞어서 궁중 의식에 사용하듯이, 세종은 중국 아악에 조선의 향악을 혼합하여 조선식 아악을 창제하였습니다. 이런 향악 풍의 아악을 세종은 신악(新樂)이라고 부르고 국가의 공식 행사에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4).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 행사는 종묘제례, 조회, 연향(宴享)입니다.
1) 연향
왕은 외국의 사신이나 신하 그리고 종친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이것을 연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악이 사용됩니다. 조선 태종 이전에는 연향에 향악이나 당악이 연주되었습니다. 향악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악이며, 당악은 중국에서 수입된 중국의 속악입니다. 속악이란 정악인 아악에 대비하여 통상적 음악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종은 종묘에만 쓰이던 아악을 조회(朝會)나 연향에도 사용하도록 명합니다.
아악은 천자가 제후에게 하사하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세종은 자신이 신하들에게 악을 하사합니다. 세종은 1449년 12월 10일 국가의 고위관리와 종친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 이제 그대들에게 신악을 선물하니 마음껏 즐기시오.”(5) 이날 세종이 기생과 악공을 보내어 연주하게 한 악은 ‘취풍형’(醉豐亨),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입니다. 이 새로운 악을 세종 자신이 ‘신악’이라고 불렀습니다.
"취풍형"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한글가사로 여기(女妓)들이 노래 부르며 춤추는 작품입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입니다. 내용은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립한 건국의 정당성을 선언하며 조선 왕조의 업적을 찬양하고 후대의 왕들에게 권계(勸戒)하는 것입니다.
용비어천가는 125장으로 구성된 시가(詩歌)입니다. 1장은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입니다. 해동 6룡은 세종의 여섯 선조 즉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太宗)입니다. 고성(古聖)은 옛날 중국의 성인이며, ‘고성이 동부하다’는 것은 옛날 성인과 사정이 같다는 뜻입니다. 1장의 의미는 해동의 여섯 용이 날아오르니 하늘이 천복을 내리는데, 이것은 옛날 중국의 성인과 경우가 같다는 것입니다. 2장은 ”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꽃 됴코 여름 하나니“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꽃 좋고 열매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 각각의 장을 악장(樂章)이라고 부릅니다.
‘취풍형’은 시가와 음악, 그리고 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가는 시이면서 노래인데, 용비어천가 125장이 취풍형의 시가 파트입니다. 음악은 조성이 고선위치입니다. 고선이 중심음이니 고선으로 시종하고, 음계는 고선(치)-유빈(우)-남려(궁)-응종(상)-대려(각)로 진행합니다. 무용 파트는 춤을 추는 여기(女妓)인 무기(舞妓) 여덟 명이 좌우 두 줄로 갈라서 연주단 앞으로 나와 춤을 추는 것입니다. 취풍형은 이렇게 시가와 음악, 그리고 무용으로 구성된 종합예술입니다. 이런 형식을 악이라고 부릅니다. 악은 음악보다 의미의 폭이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취풍형과 같은 작품은 악이라고 해야지 음악이라고 부르면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용비어천가』는 125장의 한글 가사 및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본문으로 하였고, 각 장마다 주해(註解)를 붙였습니다. 여민락(與民樂)은 용비어천가 한역시가(漢譯詩歌) 125장 중에서 제1•2,3•4•125장인 다섯 장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취풍형’처럼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무기들이 춤을 춥니다. 여민락은 취풍형처럼 단순히 음악이 아니라 시가와 연주, 무용으로 구성된 종합예술, 즉 악입니다.
‘치화평’은 ‘취풍형’처럼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를 시가로 활용한 악입니다. 역시 8명의 무기들이 두 줄로 갈라서서 춤을 춥니다. 음악은 취풍형보다 6율 높이 조옮김한 음계를 가졌습니다. 1율은 반음 하나이니 6율이 올라가면 반음이 6개 높아진 것입니다.
요즘 뮤지컬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뮤지컬은 노래와 음악, 연기 춤이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입니다. 사람들은 뮤지컬이 현대에 생긴 새로운 형식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고대 중국과 조선의 궁정 예술은 시가, 음악, 춤이 혼합된 악이었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단 두 개의 예술을 시작합니다. 하나는 표현적 예술(an expressive art)이며 다른 하나는 조형적 예술(a constructive art)입니다. 조형적 예술은 건축, 조각, 회화를 포함하며, 표현적 예술은 시, 음악, 그리고 무용의 합금입니다. 건축은 조형적 예술의 기초입니다. 조각과 회화는 사원 건물에서 건축을 보조합니다. 그리고 표현예술의 핵심은 무용입니다. 무용에 말과 음악적 소리가 동반됩니다. 음악과 시가 합쳐져서 전체를 이루는 무용을 ‘3위 일체형 코레이아’(the tribune choreia)라고 부릅니다. 코레이아는 인간의 감정과 충동을 말과 몸짓, 선율과 박자로 표현합니다. 코레이아(choreia/χορεία)는 춤추거나 노래 부른다는 말 코레우오(choreuo)로부터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코레이아는 무용이 중심인 종합예술입니다. 반면 중국과 조선의 악(樂)은 시가와 음악, 무용이 서로 비슷한 지위에서 종합된 예술입니다. 코레이아든 악이든 종합적 성격의 예술입니다. 인류의 초기 표현예술은 종합예술인데, 나중에 여기에서 음악과 무용, 시가 각각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예술은 초기 형태로 회귀하여 다시 종합적 성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2) 종묘제례
조선 시대 국가 행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묘제례(宗廟祭禮)입니다. 종묘(宗廟)는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입니다. 위패(位牌)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입니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선왕들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8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일년 후에 종묘를 지었습니다. 종묘는 처음에 ‘태묘(太廟)’라고 했으며, 태조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종묘로 옮겨 보관했습니다. 종묘제례는 이러한 조상의 영혼이 안식하고 있는 사당인 종묘에서 수행합니다. 왕이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규모가 크고 절차가 정중하고 격식이 숭고합니다. 그런 만큼 제사를 지내는 동안 악이 연행됩니다. 종묘제례악은 시가, 음악, 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왕이 술을 올리는 초헌(初獻)에서는 보대평지악이, 세자와 영의정이 술을 올리는 아헌과 종헌에서는 정대업지악이 연행됩니다. 둘 다 세종이 창제한 ”신악“ 입니다.
3) 조회
조회(朝會)는 모든 벼슬아치가 함께 정전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정사를 논의하던 일입니다. 조회 중 한 달에 네 번, 중앙의 문무백관이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일을 조참(朝參)이라고 합니다. 조참에서도 여민락을 쓰라는 공문을 세종 29년(1447)에 의정부는 내립니다(6).
조선의 악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세종의 정신을 아들 세조는 이어받습니다. 세조는 향악과 아악은 본래 둘이 아니라며 중국 아악을 모두 폐지하고 세종의 신악을 쓰도록 지시합니다(7). 그러나 세종의 신악이념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아악을 절대적으로 숭상하는 많은 신하들이 세종의 뜻에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국의 아악만이 정악이며 세종이 새로 만든 악은 속악이나 향악이라고 폄하 하였습니다. 박연 마저도 중국의 아악만을 부활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세조가 폐지한 아악은 조선 중기에 다시 부활합니다. 영의정까지 오른 정창손(鄭昌孫)은 아악과 속악을 구별하여 국가행사에 아악을 쓰도록 건의합니다(8).
사대주의적 아악관을 지닌 정부 관리들의 집요한 요구는 조선말까지 계속 이어져서 세종의
신악은 속악이나 향악이라 폄하되고 중국의 아악만이 정악이라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성종 때 발간된 악학궤범은 세종의 신악정신을 숭앙(崇仰)합니다. “하늘이 나으신 성군 세종대왕께서는 음율에 정통하시어 누습(陋習)을 폐지하려고 했다.”(9) 누습이란 중국의 아악만을 국가행사에 사용하는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가 세종의 뜻을 이어받은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세조 대왕께서도 악에 정통하시어 가곡을 많이 지었고 제례악을 새로 선정하였다. 제작과 선정방법은 선왕의 뜻을 따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 이를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10) 세조가 세종의 위업을 이어받으려고 해도 지지하고 도와주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악학궤범 서문에 나와 있듯이 악의 근본은 하나입니다. 조선에 향악, 당악, 아악이 있지만 어떤 것이든 핵심은 12율 7성을 쓰는 것입니다. 세종은 악의 근본을 통찰하여 조선의 악을 창제하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몰라주었지만 성종의 악학궤범은 세종의 신악 정신을 높이 받듭니다. 신악학궤범 TV도 세종의 신악 이념을 지지합니다.
(1)上謂左右曰: “ "雅樂, 本非我國之聲, 實中國之音也。 中國之人平日聞之熟矣, 奏之祭祀宜矣, 我國之人, 則生而聞鄕樂, 歿而奏雅樂, 何如?
令伶人黃植入朝, 聞奏《雅樂》, 長笛、琵琶、長鼓相間而奏於堂上, 中國亦雜用鄕樂也。" 右議政孟思誠對曰: "古云: ‘合止柷敔, (生)〔笙〕 鏞以間。’ 則間奏《俗樂》, 自三代之前, 當已有之。(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9월 11일 기유 1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2)한흥섭. 조선 시대의 악 사상. 소나무. 2012. 133쪽.
(3)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5일 신축 10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定雅樂。 禮曹上言:
前朝光王遣使請唐樂器及工, 其子孫世守其業, 至忠烈王朝, 金呂英掌之, 忠肅王朝, 其孫得雨掌之。 又按宋樂書, 元豊年間, 高麗求樂工而敎之。 然則吾東方之樂, 實出中國也。 流傳世久, 恐或有訛, 乞與慣習都監詳加審察, 尋其舊譜, 追唐、宋之遺音, 定盛朝之正樂。
從之。
아악(雅樂)을 정하였다. 예조에서 상언하였다.
"전조(前朝) 광왕(光王) 이 사신을 보내어 당(唐)나라 악기(樂器)와 악공(樂工)을 청하여 그 자손의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는데, 충렬왕(忠烈王)조(朝)에 이르러서는 김여영(金呂英)이 맡았고, 충숙왕(忠肅王)조(朝)에는 그 손자 김득우(金得雨)가 맡았습니다. 또 송(宋)나라 악서(樂書)를 상고하면,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高麗)가 악공(樂工)을 구하여 가르쳤다.’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동방(東方)의 악(樂)이 실상은 중국에서 나온 것인데, 유전(流傳)한 지 대(代)가 오래 되어 혹은 와오(訛誤)된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관습도감(慣習都監)과 함께 자세히 살펴서 그 예전 악보(樂譜)를 찾아 당(唐)·송(宋)의 남은 음(音)을 좇아서 성조(盛朝)의 정악(正樂)을 정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한흥섭. 위의 책. 144쪽.
(5)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2월 10일 병진 1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종친 문무 2품 이상 등의 관원에게 사연하다.
丙辰/賜宴宗親于時御所, 文武二品以上于議政府, 三品堂上于禮曹, 耆老宰樞于耆老所, 又賜宴于承政院。 出內宴歌妓樂工, 令奏《醉豐亨》、《與民樂》、《致和平》等樂, 仍謂曰: "今賜爾等新樂, 須當盡懽。" 尋命首陽大君、義昌君、壽春君侑酒曰: "昔我太祖命義安君, 侑諸承旨; 太宗命孝寧君及予, 侑諸代言。 今喜慶無比, 命王子往侑爾等, 宜極歡。" 徹夜而罷。
종친은 시어소(時御所)에서, 문·무 2품 이상은 의정부에서, 3품 당상관은 예조에서, 기로(耆老)와 재추(宰樞)는 기로소(耆老所)에서 사연(賜宴)하였다. 또 승정원에서 사연할새 내연(內宴)의 노래하는 기생과 악공(樂工)을 내보내어 취풍형(醉豐亨)·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 등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이제 그대들에게 신악(新樂)을 내리니 마땅히 마음껏 즐기라."
하였다. 또 조금 뒤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의창군(義昌君)·수춘군(壽春君)에게 명하여 술을 권하게 하며 말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께서는 의안군(義安君)에게 명하여 여러 승지(承旨)에게 술을 권하고, 태종께서는 효령군(孝寧君)과 나에게 명하여 여러 대언(代言)에게 술을 권하게 하셨다. 오늘의 기쁜 경사를 비할 데가 없어서, 왕자(王子)에게 명하여 가서 술을 권하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마음껏 즐김이 옳겠다."
하니, 밤을 새워서야 그만두었다.
(6)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6월 4일 을축 1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용비어천가,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등을 공사간 연향에 모두 통용케 하다
.
이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내리신 것은 조종(祖宗)의 융성한 덕과 거룩한 공을 노래하고 읊게 하기 위하여 지으신 것이오니, 마땅히 상하(上下)에 통용하여서 칭송하고 찬양하는 뜻을 극진히 하여야 할 것이옵고, 종묘에서 쓰는 데만 그치게 함은 불가하오니, 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豐亨) 등의 음악을 공사간(公私間)의 연향(燕享)에 모두 통용하도록 허락하시되, 조참(朝參)과 표문(表文)이나 전문(箋文)을 배송(拜送)하는 날 궁궐 밖을 나가실 때는 여민락만(與民樂縵)을, 조참(朝參)하는 날 환궁(還宮)하실 때와 표문이나 전문을 배송하거나 조칙(詔勅)을 맞으러 행차하실 때에는 여민락령(與民樂令)으로 하되, 모두 황종궁(黃鐘宮)을 쓰게 하시고, 계조당(繼照堂)에 조참하는 날 자리에 오르실 때는 여민락만(與民樂縵)을, 궁궐 안으로 돌아오실 때에는 여민락령(與民樂令)에 모두 고선궁(姑洗宮)을 쓰도록 일정한 제도가 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今降《龍飛》 《御天謌〔御天歌〕 》, 乃爲歌詠祖宗盛德神功而作, 所宜上下通用, 以極稱揚之意, 不可止爲宗廟之用。 《與民樂》、《致和平》、《醉豐亨》等樂, 於公私燕享, 幷許通用。 朝參及拜表箋日出宮時則《與民樂縵》, 朝參日還宮時及拜表箋迎詔勑行路時則《與民樂令》, 皆用黃鍾宮; 繼照堂朝參日陞坐時《與民樂縵》, 還內時《與民樂令》, 皆用姑洗宮, 以爲定制。"
從之
(7)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1460) 4월 22일.
(8)한흥섭. 위의 책. 170-171쪽.
(9) 악학궤범 서문
(10)악학궤범 서문
치화평"은 남려(南呂)를 주음으로 삼은 평조로 됐다고 『세종실록』 권140에 전한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959096&cid=60486&categoryId=60486
「치화평(致和平)」과 마찬가지로 국·한문으로 된 「용비어천가」전편을 노래하던 음악이다. 『세종실록』과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악보만 남아 있을 뿐 음악은 전하지 않고 있다.
남려·응종·대려·고선·유빈의 5음으로 구성된 이 곡은 고선궁 평조로서 남려궁 평조인 「치화평」보다 6율, 즉 여섯 반음 밑으로 이조된 음계를 가졌다.
「치화평」과 「취풍형」의 음악이 기록된 정간보를 비교하면 「치화평」의 5·3·8정간은 각기 「취풍형」의 3·2·3정간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취풍형」이 「치화평」보다 동일한 가사를 노래하면서도 그 한배, 즉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취풍형」은「봉래의」정재 중에서도 이보다 앞 순서에서 연주되던 「치화평」음악과 단지 리듬과 조성만 다를 뿐 그 선율이며 형식이 비슷한 치화평의 축소형 음악이다.
한편, 「취풍형」과 비슷한 이름에 「취풍형지곡(醉豊亨之曲)」이 있는데, 「취풍형」과 실제로는 음악이 다르다. 세종 때의 「봉래의」정재는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는데 「치화평」이 빠지는 등 많은 변모를 보였고, 「취풍형」음악도 가곡의 농(弄)·계락(界樂)·편(編)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때의 가곡계통의 음악을 「취풍형지곡」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취풍형 [醉豊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0008&cid=46661&categoryId=46661
취풍형은 조선 초기에 완성된 대규모 악곡인 봉래의(鳳來儀)를 구성하는 일곱 곡 가운데 한 곡이다. 한글창제와 동시에 조선의 개국 서사시인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하는 새로운 음악이 창제 되었으니 이것이 봉래의(鳳來儀)이다. 봉래의는 『서경』의 ‘봉황래의(鳳凰來儀)’에서 유래한 곡명으로, “봉황이 오셨다”는 뜻이다. 이는 곧 태평성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취풍형은 세종때 창작된 궁중 음악의 하나로 세종 27년(1445) 이후에 여민란, 치화평과 함께 창작되었고, 봉래의(鳳來儀) 무악(舞樂)에 속한다. 치화평과 같이 국한문 가사로 된 〈용비어천가〉 전편을 노래한다. 음계는 탁고선(E), 탁유빈(G♭), 탁남려(A), 탁응종(B), 대려(D♭)의 5음계로 된 고선 평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취풍형 (국악정보, 2010. 7., 국립국악원, 전라북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24208&cid=42583&categoryId=42583
상 ·하 두 곡에 《용비어천가》 125장 전체를 갈라서 얹은 모두 443각(刻)의 곡조로 된 음악이다. 음계는 고선치(姑洗徵) 평조(平調)로 32정(井) 1각(刻)이다. 이 곡은 《치화평(致和平)》 《여민락(與民樂)》 등과 함께 공사(公私)의 궁중 연락(宴樂)에서 연주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취풍형 [醉豊亨]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7955&cid=40942&categoryId=33383
또 중요한 가치는 음악 연구 자료라 하겠으니, 용가(龍歌)를 풍류의 악가(樂歌)로서 영구히 전하려 하여 ≪세종실록(世宗實錄)≫ 권제140에서 권제145까지에 실린 악보편(樂譜篇) 봉래의(鳳來儀)의 악보 가운데 여민락보(與民樂譜)에는 용비어천가 한역시(漢譯詩) 125장 중에서 제1•2•3•4•125장인 다섯장을 가사(歌詞)로 붙이고, 치화평보(致和平譜)와 취풍형보(醉豐亨譜)에는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 125장 모두를 붙이어 노래로 부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세종실록≫ 권제147 말미에 용비어천가의 서(序)와 한역시 125장 전부를 실어서 세종 때에 이루어진 조정의 공업을 노래한 악장(樂章)임을 보이었으니, 이는 국악(國樂) 연구에 아주 값진 재료가 되는 것임. 그리고 또 한글 글자체 곧 자형 연구에도 귀한 자료임. 현존하는 ≪용비어천가≫는 여러 가지 목판본(木版本)이 있음. 고판본(古版本)으로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가람문고(嘉藍文庫)와 규장각(奎章閣)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가람문고에 있는 것은 권제1, 2의 1책뿐이고, 규장각에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니 한 가지는 10권 5책으로 되었으나 제3책에 묶여진 권제6의 일부가 불탔으며, 또 한 가지는 권제5, 6의 제3책이 없어졌음. 이 밖에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 여러 곳에 낙질(落帙)되어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4335&cid=41826&categoryId=4182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4335&cid=41826&categoryId=41826
『용비어천가』는 125장의 한글 가사 및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본문으로 하였고, 각 장마다 주해(註解)를 붙였다.
원문 다음에 한역시(漢譯詩)와 언해(諺解)를 달았다. 또 이 노래의 1·2·3·4·125장 등 5장에는 곡을 지어서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래의(鳳來儀)》 《여민락(與民樂)》 등의 악보를 만들고 조정의 연례악(宴體樂)으로 사용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4 〈악보(樂譜)〉에 한글 가사 전문과 그 악보가 실려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두산백과)
단종실록 11권, 단종 2년 4월 25일 병오 2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문소전(文昭殿)의 제향(祭享) 및 대소 연향(大小宴享)의 악(樂)에는 새 악보(樂譜)를 쓰기로 하고, 이제 그 절차를 정하였습니다. 문소전(文昭殿)을 출입(出入)하고 오르내릴 때의 악(樂)은 여민락만(與民樂慢)과 여민락(與民樂)275) 을 사용하고, 조참(朝參)하고 배례(拜禮)할 때에는 천수만(天壽慢)을 드립니다. 내연(內宴) 및 사신연(使臣宴)에는 새 악[新樂]을 연주하되, 과작(菓爵)276) 을 행할 때에는 여민락(與民樂)을 사용하고, 안(案)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고, 꽃[花]을 바치고 꽃을 꺾을 때와 작(爵)을 바칠 때에는 보허자(步虛子)277) 를 사용하고, 소선(小膳)을 바칠 때에는 만엽치요도만(萬葉熾瑤圖慢)을 사용하고, 작(爵)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을 사용하고, 음식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찰(引刹)을 겸용(兼用)하고, 작(爵)을 바치고 정재(呈才)하면서 음식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자(引子)278) 를 겸용하고, 작(爵)을 바치고 정재(呈才)하면서 음식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찰(引刹)를 겸용하고, 작(爵)을 바치고 정재(呈才)하면서 음식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자(引子)를 겸용하고, 작(爵)을 바칠 때에는 진작(眞勺)279) 을 사용하고, 대선(大膳)을 바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고, 이어서 파연곡(罷宴曲)을 연주합니다.
사연(賜宴) 및 객인연(客人宴)에는 탁(卓)을 설치하고 여민락만을 사용하고, 꽃[花]을 뿌리고 꽃을 꺾으며 행주(行酒)할 때에는 여민락을 사용하고, 소육(小肉)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고, 행주(行酒)할 때에는 진작(眞勺)을 사용하고, 초미(初味)280) 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찰(引刹)을 겸용하고, 행주(行酒)하고 정재(呈才)하고서 이미(二味)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찰(引刹)을 겸용하고, 행주하고 정재하고서 삼미(三味)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찰을 겸용하고 행주하고 정재하고서 사미(四味)할 때에는 여민락만을 사용하되 인찰을 겸용하고, 행주할 때에는 취풍형(醉豐亨)을 사용하고, 대육(大肉)에서는 여민락만을 사용하고, 행주할 때에는 치화평(致和平)을 사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議政府據禮曹呈啓: "文昭殿祭享及大小宴享之樂, 用新樂譜, 今定節次。 文昭殿出入升降樂, 用《與民樂慢》、《與民樂》; 令朝參拜禮, 獻《天壽慢》。 內宴及使臣宴, 進樂新樂; 令行菓爵, 《與民樂》; 令進案, 《與民樂慢》; 進花折花進爵, 《步虛子》; 令進小膳, 《萬葉熾瑤圖慢》; 進爵, 《與民樂》; 令進食, 《與民樂慢》, 兼用《引刹》; 進爵呈才進食, 《與民樂慢》, 兼用《引子》; 進爵呈才進食, 《與民樂慢》, 兼用《引刹》; 進爵呈才進食, 《與民樂慢》, 兼用《引子》; 進爵, 《眞勺》; 進大膳, 《與民樂慢》, 仍奏《罷宴曲》。 賜宴及客人宴: 設卓, 《與民樂慢》; 散花折花行酒, 《與民樂》; 令小肉, 《與民樂慢》; 行酒, 《眞勺》; 初味, 《與民樂慢》, 兼用《引刹》; 行酒呈才二味, 《與民樂慢》, 兼用《引刹》; 行酒呈才三味, 《與民樂慢》, 兼用《引刹》; 行酒呈才四味, 《與民樂慢》, 兼用《引刹》; 行酒, 《醉豐亨》; 大肉, 《與民樂慢》; 行酒, 《致和平》。" 從之。
(4)
(6)
종묘제례
https://www.youtube.com/watch?v=LvltZHcr_zU
https://www.youtube.com/watch?v=d3Yy_DW0J2s&t=1131s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7일 기묘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아악과 전악의 악공에 대한 천전법을 정하다. 조회와 연향에 모두 아악을 쓰도록 하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일렀다.
"예악(禮樂)은 중한 일인데, 우리 동방(東方)은 아직도 옛 습관을 따라 종묘에는 아악을 쓰고, 조회에는 전악을 쓰고, 연향에는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번갈아 연주하므로, 난잡하고 절차가 없으니 어찌 예악이라 이르겠는가? 아악은 곧 당악이니, 참작 개정하여 종묘에도 쓰고 조회와 연향에도 쓰는 것이 옳다. 어찌 일에 따라 그 악(樂)을 다르게 할 수 있겠느냐?"
황희(黃喜)가 대답하기를,
"향악을 쓴 지 오래이므로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그 잘못된 것을 안다면, 오랜 습관에 젖어 고치지 않는 것이 옳겠느냐?"
하였다. 좌대언 이조(李慥)가 아뢰기를,
"신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서 보니, 봉천문(奉天門)에 항상 아악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중국의 법을 준용(遵用)하는 것이 마땅하다."
定雅樂典樂遷轉之法。 議政府啓曰: "雅樂, 用之宗廟, 其事甚重, 工人去官則止七品, 典樂, 用之朝會燕享, 反得五品去官, 均是樂工而職賞倒置。 乞令雅樂同典樂去官之例, 用一都目。" 上謂左右曰: "禮樂, 重事也。 吾東方尙循舊習, 宗廟用雅樂, 朝會用典樂, 於燕享迭奏鄕、唐樂, 亂雜無次。 豈禮樂之謂乎! 雅樂乃唐樂。 參酌改正, 用之宗廟, 用之朝會燕享可矣。 豈可隨事而異其樂乎?" 黃喜對曰: "用鄕樂久, 未能改耳。" 上曰: "如知其非, 狃於久而不改可乎?" 左代言李慥啓曰: "臣奉使上國, 觀奉天門常置雅樂。" 上曰: "上國之法, 宜遵用之。“
上謂左右曰: “ "雅樂, 本非我國之聲, 實中國之音也。 中國之人平日聞之熟矣, 奏之祭祀宜矣, 我國之人, 則生而聞鄕樂, 歿而奏雅樂, 何如?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 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이오.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그것을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싶소.
況雅樂, 中國歷代所製不同, 而黃鍾之聲, 且有高下。 是知雅樂之制, 中國亦未定也, 故予欲於朝會及賀禮, 皆奏雅樂, 而恐未得製作之中也。
하물며 아악은 중국에서 역대로 제작한 것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黃鍾)의 소리도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확정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朝會)나 하례(賀禮)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까 두렵소.
令伶人黃植入朝, 聞奏《雅樂》, 長笛、琵琶、長鼓相間而奏於堂上, 中國亦雜用鄕樂也。" 右議政孟思誠對曰: "古云: ‘合止柷敔, (生)〔笙〕 鏞以間。’ 則間奏《俗樂》, 自三代之前, 當已有之。
‘악공(樂工) 황식(黃植)을 명나라로 보내 조정에 들어가 아악 연주를 둘어보게 하였더니, 장적(長笛)·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다 하오."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대답하기를,
"옛 글에 이르기를, ‘축(柷)을 쳐서 시작하고, 어(敔)를 쳐서 그치는데, 사이로 생(笙)과 용(鏞)으로 연주한다.’ 하였습니다. 사이사이로 속악(俗樂)을 연주한 것은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9월 11일 기유 1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熟 익을 숙. 익숙하다.
享 누릴 향
丸둥글 환
歿 죽을 몰
歹 살 바른 뼈
況 상황 황
予 나 여
伶 영리할 령(영) 악공
(3) 定雅樂。 禮曹上言:
前朝光王遣使請唐樂器及工, 其子孫世守其業, 至忠烈王朝, 金呂英掌之, 忠肅王朝, 其孫得雨掌之。 又按宋樂書, 元豊年間, 高麗求樂工而敎之。 然則吾東方之樂, 實出中國也。 流傳世久, 恐或有訛, 乞與慣習都監詳加審察, 尋其舊譜, 追唐、宋之遺音, 定盛朝之正樂。
從之。
아악(雅樂)을 정하였다. 예조에서 상언하였다.
"전조(前朝) 광왕(光王) 이 사신을 보내어 당(唐)나라 악기(樂器)와 악공(樂工)을 청하여 그 자손의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는데, 충렬왕(忠烈王)조(朝)에 이르러서는 김여영(金呂英)이 맡았고, 충숙왕(忠肅王)조(朝)에는 그 손자 김득우(金得雨)가 맡았습니다. 또 송(宋)나라 악서(樂書)를 상고하면,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高麗)가 악공(樂工)을 구하여 가르쳤다.’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동방(東方)의 악(樂)이 실상은 중국에서 나온 것인데, 유전(流傳)한 지 대(代)가 오래 되어 혹은 와오(訛誤)된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관습도감(慣習都監)과 함께 자세히 살펴서 그 예전 악보(樂譜)를 찾아 당(唐)·송(宋)의 남은 음(音)을 좇아서 성조(盛朝)의 정악(正樂)을 정하소서."(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5일 신축 10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遣 보낼 견
訛 그릇될 와
乞 빌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