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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가요산책18> 김정호의 하얀 나비

작성일 : 2020.09.10 06:43 수정일 : 2020.09.10 06:46

 

 

김정호, 하얀 나비

 

이승주 (시인)

 

 

~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

~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 나비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도입부의 허밍 ~”은 초연한 듯 초탈한 듯, 이승의 굴레를 훌훌 벗어던진 듯, 바람 부는 듯 물 흐르는 듯, 생사와 천지의 섭리를 달관한 듯, 무언지 모를 숙연함으로 나를 감싸며 그 어떤 경지로 나를 이끌어간다.

어차피 나도 떠나고 언젠가는 님도 떠나야 할 일이므로 지나간 일들일랑 생각지도 말고 그리워하지도 말라고 한다. 핀 꽃은 시들기 마련이고 오면 가는 것이고 생성이 있으면 소멸 또한 정한 이치인데, 미련도 집착도 갖지 말라고 한다. 미련과 집착은 갈기를 흩날리며 날뛰는 길들이기 힘든 번뇌(煩惱)가 좋아하는 사료. 그러니 때가 되면 다시 필 것이므로 꽃잎이 시든다고 슬퍼하지 말라고 나직이 우리네 인생의 회한(悔恨)과 별리(別離)를 다독인다.

그리고 노래의 후반부를 이끄는 허밍 ~”은 왠지 세상과 인생의 모든 사연을 다 속속들이 보고 듣고 아는 바람이, 지나간 일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길 없는 길 잃은 나그네이자 님을 찾아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한 마리 하얀 나비인 노래 속의 화자에게 속삭이는 전언(傳言)처럼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모두 한평생 외롭고 고된 삶의 행로(行路)에서 길을 묻고 길을 찾고 그 길 위에서 길을 잃는 길 위의 나그네요, 한평생 그리움을 좇다 어둠이 내리는 저문 길목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 한 마리 서러운나비가 아닌가.

김정호의 하얀 나비는 천지의 운행과 섭리에 따라 꽃이 피고 지듯 우리네 인생 또한 한 조각 뜬구름이 일었다 사라지는 덧없는 그것과 다름 아닐 것이므로 이승의 인연일랑 생각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서러워하지도 말라고 이르지만, 아래의 정지용의 시 유리창은 그런 줄은 알겠지만 살아서는 어쩔 수 없는 애끊는 그리움과 서러움을 노래한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캄캄한 밤에 잠들지 못하고 외로이 홀로 깨어 자꾸만 입김으로 흐려지는 유리창을 밤새 닦고 닦으며 폐혈관이 찢어진 채 저승의 어둠 속으로 산새처럼 날아간 너를 생각하는 유리창속의 시적 화자가 어쩐지 자신의 죽음과 죽음 이후 생전을 애절히 그리워하는 자신을 미리 엿본 게 틀림없을 김정호와 자꾸 겹쳐지는 까닭은 왜일까. 하얀 나비」 「이름 모를 소녀」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등 우리 가요사를 수놓은 불멸의 명곡들을 남긴 김정호. 그를 빼고서는 한국 가요사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김정호. 사위가 어둠 속에 잠든 고요한 밤에 나 홀로 깨어 흑백화면 속에서 검은 나비넥타이를 하고 접신(接神) 된 듯 폐부를 찢으며 노래의 한()과 혼()을 불러내는 그를 떠올리노라면 어둠 속 어디론가 알지 못할 곳으로 날아가는 한 마리 하얀 나비를 본다. 그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는 매번 나에게 그리워하지 말라고 서러워하지 말라고 바람의 전언처럼 나직이 읊조리듯 속삭이지만, “폐혈관이 찢어진” “하얀 나비로 우리 곁을 떠난 그를 애틋하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1952년 광주 출생, 1985년 폐결핵으로 타계. 향년 33. 원통하다. 서럽고, 무상하고 덧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