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작성일 : 2020.09.07 07:05 수정일 : 2020.09.07 07:12
윤항기, 장밋빛 스카프
<이승주 시인>
그 어떤 장면이나 사건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여운으로 남은 그 어떤 노래는 우리 가슴 속에 오래 잊히지 않고 때때로 그때의 그 현장과 함께 그때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병역을 마친 복학생 형이었다. 대학교 새내기 때 첫 학과단합대회 자리였던가, 학도호국단 병영체험에 대한 격려와 위로의 자리였던가, 차례가 돌아와 그가 마이크를 잡자 우리들은 곧바로 그의 노래를 즐길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들 말소리를 줄이며 노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먼저 좌중을 한번 둘러본 뒤 잠깐 먼 곳을 바라보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와줄 것만 같은데
차라리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들
이 고통 이 괴로움 나에겐 없을 걸
장밋빛 장밋빛 스카프만 보면은
내 눈은 빛나네 걸음이 멈춰지네
허전한 이 마음을 어떻게 달래보나
내게서 떠나버린 장밋빛 스카프
노래가 이어질수록 안경 너머로 그윽하게 눈길이 깊어진 형의 그 노래는 어떤 알 수 없는 마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도 모르게 조금씩 앗아갔다. 노래에 빠져들수록 오롯이 노래의 선율만이 나의 청각과 심중을 채우고 주위의 사물들과 함께 시공간이 사라진 진공을 가득 채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노래가 이끄는 선율을 따라 어디론가 아득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흐르는 것은 야속하고도 무정한 시간이 아니라, 시간은 본래부터 그 자리이며 다만 우리네 인생이 덧없이 흘러갈 뿐이라고. 여태까지, 어쩌면 본래부터 없었을지도 모를 시간에 목덜미를 낚아채이지 않으려 허둥대고 쫓기며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우리네 인생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생각했구나 하는, 어떤 성찰과 함께 혼자만의 커다란 비밀 하나를 깨쳤다. 그리고 그의 노래가 다 끝난 그 순간부터 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이 가요는 나의 애창곡 중의 한 곡이 되었다. 사랑의 환희와 이별의 비애를 경험하기도 전에 먼저 이 노래를 알았고, 이 노래를 통해 상상임신처럼 사랑의 떨림과 이별의 고통과 괴로움을 체화(體化)했다. 쓸쓸할 때 외로울 때 무시로, 내 삶이 도리 없이 나로 하여금 가요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까지 참 많이도 나는 혼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이전까지 일면식도 없던 여인을 첫눈에 반할 때가 있듯이, 그날 처음 듣게 된 그 노래에 내가 온통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면 아마도 그 노래를 바로 그 형이 그처럼 멋있게 영혼을 사로잡듯이 불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마음을 빼앗긴다는 점에서 세대를 초월하는 불멸의 가요는 장부(丈夫)의 가슴을 사로잡는 미녀와 같다. 유튜브에서 알게 된 김인효의 전자기타 연주나 조아람의 전자바이올린 연주에게 흘러나오는 흘러간 가요의 선율은 언제 들어도 요정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치명적이게 나를 유혹한다. 내가 흘러간 가요에 점점 몰입하면 할수록 그동안은 삶도 현실도, 부귀도 영화도, 책임도 의무도 잊는다. 모든 것은 물거품 같아서 나는 오직 반주와 노래에 나를 내맡기게 되고, 반주와 노래만이 나를 온통 휩싼다. 마치 사이렌의 유혹에 빠지면 그렇겠듯이 청각신경 한 올과 영혼 한 조각만 남고 내가 사라지고, 공명의 진공만 남고 시공간이 사라진다. 오직 흐르는 노래의 선율만 내 영혼을 농락하고 빼앗는다. 바야흐로 가요의 열반에 들게 된다. 더러 생각해보면, 아마도 전생의 어느 한 번은 내가 일생을 노래와 풍류로 탕진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생의 그 피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게 틀림없다.
이제 나도 어느덧 사랑의 두근거림을 지나 열망과 환희를 지나 상실과 회한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 그리움의 행로에 들어서고 있다. 흐르는 삶에 어쩔 수 없이 배어드는 서녘하늘의 엷은 노을을 어찌하랴. 문득 내 청춘의 비망록인 첫 시집을 다시금 펼쳐 읽고 싶어질 때가 있듯이, 문득 나를 돌아보니 숱 많던 머리가 듬성듬성한 채로 탈색이 되고, 단단하던 잇몸이 젤리처럼 조금씩 물러지기 시작하고, 반듯하던 허리가 앞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유수와 같구나, 세월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나는 어디로 갔나. 어디에 있나. 헤아릴 수 없는 밤을 애간장 태우며 사모하는 그녀에게 바치는 연작시를 쓰게 하던, 온통 내 영혼을 흔들던 사랑스럽고 어여쁜 나의 요정 그 ‘칸나’는.
귀를 잃으면
세상의 아름다움 반을 잃고
눈을 잃으면
세상의 아름다움 반을 잃고
어둠과 빛조차도 정화하는
칸나야, 내 사랑의 살결은 여리다 핏줄은 여리다
그대 앞에서
나는 귀도 잃고 눈도 잃고
—이승주, 「칸나‧3」
세상에 슬픈 일도 하고많은 중에서
너는 무슨 슬픔으로
꽃이 되었니.
세상에 슬픈 일도 하고많은 중에서
나는 무슨 더 큰 슬픔으로
너를 알게 되었니.
—이승주, 「칸나‧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