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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가요산책16>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작성일 : 2020.08.31 10:38 수정일 : 2020.08.31 10:46

 

 

백설희, 봄날은 간다

 

 

 

아직도 내 마음의 고향은

벚꽃, 진달래, 자목련, 산수유가 피는 봄.

 

땅속에 흐르는 봄 물올라

순이의 대지에 흐르는 물도 색색이다.

봄이 오면 주점(酒店)의 순이는

다시 색색의 꽃이 핀다.

 

단층의 낡은 가겟집들이

저마다의 흐릿한 불빛으로 떠 있는 낡은 소읍(小邑),

꽃향기에 일렁이며 깊어가는 봄밤의 거리.

 

술값도 못하는 사람들

봄밤에 깊이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 돌아가고

냉장고에 술병 아직 남았는데

주점은 비어 있다.

이승주, 봄화집(畵集) · 2

 

서른 되던 해, 아직 교직 초년생이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자질 미달의 학교장 직권내신(?)으로 밀양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아름다운 행성지구에서의 제2의 고향으로 뿌리내려 살고 있다. 그사이에 시인이 되었고, 가정을 이루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처음 낯선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밀양은 밤이면 단층의 낡은 가겟집들이 / 저마다의 흐릿한 불빛으로 떠 있는 낡은 소읍이었다. 총각 선생이 퇴근 후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일찍 하숙집으로 돌아가 혼자 있기는 적적하기도 하여서 거의 매일같이 선생님들과 어울려 여러 술집들을 순례했다.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내가 직장 생활을 하게 되자 호주머니에 늘 돈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서넛의 주점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좁은 골목의 막다른 끝집이었다. 어떨 땐 나이를 잘 가늠하기 힘든, 봄이면 다시 산벚꽃, 진달래, 자목련, 산수유” “색색의 꽃으로 피는 순이술값도 못하는 사람들 / 봄밤에 깊이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 / 모두 돌아가고나면 빈 주점에서 더러 노래를 불렀다. 그중에서도 특히 봄날은 간다를 잘 불렀다. 순이는 나를 반겨주었고, 우리는 적당히 친했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찻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백난아의 찔레꽃등과 더불어 지난 시절 고달픈 삶을 달래주며 이 땅의 온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봄날은 간다. 지금껏 애창되는 흘러간 가요에는 삶에 대한 애환이 절절히 녹아 있어, 이 노래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봄날청춘에 대한 비애와 아쉬움이 오래도록 심중을 파고든다. 비록 가수는 가고 없지만 그의 노래는 남아, 언제 들어도 노래 속으로 몰입되어 가노라면 그 순간만은 삼공(三公) 벼슬도 귀하지 아니하고 소 판 돈을 탕진한다 해도 아깝지 않을 터이다.

봄날은 꽃의 시절이요, 청춘의 시절이다. 봄날은 가고, 가는 봄과 더불어 열아홉내 청춘도 흘러간다. “새파란 꽃잎은 모순이지만 모순이 아니다. 꽃잎이, 잎도 아니고 새파란(초록의) 꽃잎이 어디 있던가. 그러므로 새파란 꽃잎은 함의적(含意的)이다. 청춘이다. “연분홍치마() 봄바람에 휘날리,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을 간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낭군님과의 알뜰한 그 맹서를 떠올리며. 봄날이 다 가도록 낭군님은 기별 없고, “실없는 그 기약에오늘도 부치지 못할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찻길나선다. 낭군님을 배웅했던 그 역마찻길. 행여 오실지도 모를 낭군님을 마중하러.

가을겨울 지나면 다시 또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어김없이 돌아오건마는 물에 떠서 흘러가버린 꽃잎처럼 한번 흘러간 우리네 청춘푸른 봄은 끝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서러운 우리네 삶에 그 맹서그 기약”, “그 노래라도 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이 봄날을 건너올 수 있었으랴. 수수꽃다리 꽃향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오늘, 봄날은 간다를 구성지게 아주 잘 뽑아내던 주점(酒店)의 그 순이가 그립다. <이승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