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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기억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기억의 더께 일곱 -

작성일 : 2020.08.29 07:07 수정일 : 2020.08.29 09:02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기억의 더께 일곱 - 꿈의 방랑, 동아대 미술학과시절

 평범한 불운과 상실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속에 남아 애도와 우울로 연관된다. 1973년 김강석선생님께서 운영하던 <부산종합미술학원> 강사면서 평소 날 동생처럼 좋아해주고 아껴주던 차종례(서양화가. 서울 그로리치화랑 운영)선생님이 하릴없이 시간 보내는 날 불러 같이 서울로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따라 갈 용기는 아예 없었다. 역시 <부산종합미술학원> 강사로 잠시 왔었던 이은석선생님도 마침 초량부근에 <은석미술학원>을 차려 강사로 나와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찢어진 백과사전 같은 옅은 공부지만 그래도 그저 스스로 위로하면서 삼수해서 대학은 가기 싫어 1974년 동아대 미술과로 갔다. 대학을 가니 특히 남포동과 가까워 놀기는 더욱 좋았다.  등교하면 미술학과 친구들은 미술과 여학생을 사이에 두고, 틈만 나면 대형 강의실에서 교양과목을 함께 수업 받던 체육과 학생들과 자주 심하게 몸으로 싸워댔다. 힘으로는 부족한 미술과 친구 중에는 자기 집에 아버지의 사냥총을 들고 와서 체육과 남학생을 위협하는 친구도 있었다. 수업만 마치면 국제시장인근으로 내려와 좋은 안주 무료인 실비집에 가서 무거운 생맥주 3,000cc 큰 병을 팔에 걸쳐서 자랑스레 마셨다. 다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연애만은 치열하게 했다.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많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이때의 동아대학 동기 친구들은 더 평생 친구가 되었다. 세상착한 정지태, 은근부자 이광준, 조기학장 구자홍, 진지재기 우동민, 성실원장 김형래, 은근미남 강무형, 핸썸건달 고영보, 조숙작가 한용식, 동네친구 이영일, 화가희망 허용철, 다재다능 (고)홍성모(제1회 대학가요제 번안곡 <제비>를 불러 출연, 후에 가수, 연극연출가로 활동하면서 부산연극협회장 역임), 대신동 학교에서 가까운 구부산여고 건너편 적산가옥 2층에서 동래고 한해 후배였던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입에 달고 살던 허용철이 운영하던 화실에서 함께 살던 시간, 통금 후 야밤에 발가벗고 대신동 찻길 대로를 뛰어 다니며 화실 뒤 골목 우물물로 목욕하던 기행들, 사거리 맞은 편 길화실을 하던 안창홍과 정병렬의 우울하며 진솔했던 그림들. 대신시장에서 같이 먹던 국수집. 영주동 부산터널입구 3층 홍성모화실에서 성모와 친한 친구들과 객기처럼 호연지기를 자랑하며 술 마시고 토해 내어 화장실이 막혀 고생했던 더러운 기억. 그리고 얼굴은 생생하지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수많은 친구와 부잣집 귀티 나던 여학생들. 친구들 서로의 화실마다 방문하며 서로의 그림에 대해 토론에 빠져 밤을 지새우던 청춘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의 더께들...
 
 등교하면 불편했던 시국 상황으로 울부짖으며 동참을 요청하던 여학생의 웅변에 가슴이 벅차올라 덩달아 문리대 본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어깨동무로 운동장을 돌며 독재타도 구호를 외친 적도 있지만, 사실 중앙정보부에 잡혀 갈까봐 무서워서 빨리 빠져나와 피해 다녔다. 1학년 과 총대라는 명분으로 엄마 같은 오춘란교수님 연구실로 가서 그 분이 주장하시는 회화의 순수 원리에 관한 이론을 들으면서 정신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후에 내가 동아대를 그만 두고 부산대학교로 옮긴 일에 대해 만나면 늘 섭섭해 하고 아쉬워 하셨다.
 놀고 놀아도 깊은 마음속의 그림에 대한 욕구는 밀린 숙제처럼 상대적으로 더 생겼다. 당시 서양화교수님으로는 김종식, 정건모, 오춘란선생님이 계셨지만 교양과정이라 실기수업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사진학은 정인성선생님이셨는데 현상실이 없어 수업시간에 촬영한 필름현상을 늘 사진관에 맡겼다.
 학과대표로 활동하다 보니 선배들과 체육대회 등 학교행사를 많이 치뤘다. 성실조교 의리 백성도. 복학생 모범 학회장 (고)이두옥(후에 두 분 다 동아대 서양화교수로 재직하였고 두 분은 평생 존경하는 형님으로 모시면서 인연을 이어갔다. 유명을 달리한 이두옥형은 지금 안계시지만 나중에 그의 죽음에 대해 꼭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과 함께 김덕성, 이강연, 이성재,박태석, 공정배, 강형근, 황성환, 김광문 등의 형들과 함께...
김종식교수님과의 수업은 종종 서양화전공학생 모두의 현장 야외 스케치 시간이었으며, 수업 후 어울려 막걸리 마시는 재미가 솔솔 했다. 현장에서 선생님께서 바밀리언(주홍)과 청색만으로 그렸던 작품은 늘 누가 가져갔는지 다음 날 꼭 찾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품을 가지고 간 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1980년대 양정에서 <기류미술학원>을 할 때, 김종식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허용철이 늘 술자리로 모시고 다니면서 선생님의 드로잉과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걸 눈으로 직접 보았다. 후에 유족들에게 다 돌려주었다고 했다. 정건모교수님의 화실이 학교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 곳으로 가면 내가 친하고 좋아하는 끼 많은 김덕성, 김광문 등 선배들이 그림을 배우고 있어서 자주 놀러갔다. 부근엔 안창홍, (고)홍성모, 한용식, 허용철 등의 친구들이 화실 생활을 하고 있어서 틈만 나면 들렀다.
 그때 나는 한창 문학에의 열망도 식지 않아서 <동아문학상> 시부문에 응모하여 장원 없는 가작으로 당선되어 이미지스트 초현실주의 시인이셨던 국문과 (고)구연식교수의 심사평이 실린 내용이 그해 교지에도 게재 되었다. 아마도 이미지를 시로 표현한 내 작품과 구교수의 성향이 맞지 않았나 생각되어 진다. 고무되어 시인이나 평론가가 되어 볼까도 고민했었다. 그 시를 다시 읽어 보고 싶다.

 1974년 등록금도 엄청 싸고 수업료도 지원해주는 부산대에 현직미술교사 발령을 보장해 주는 미술교육과가 처음 생겼다. 부산대학교로 진학한 후배 (고)이갑재, 박성원 등이 국립대학의 학구적인 좋은 점을 늘 자랑하며 다니는 모습에 은근 부럽기도 했다. 평소 동아대 미술과는 잠시 있다가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학교생활에 회의를 가진 1975년 다음 해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2회로 응시해서 합격했다. 대신동 동아대를 그만 두고 부산의 양 끝자락인 영도에서 장전동까지 멀고 먼 시골의 부산대로 다녔다. 오로지 등록금이 싸다는 명분하나 만으로~
부산대 미술교육과는 교과 성적도 우수하고 실기도 잘하는 모범생들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아주 높고 치열하였으며 당시 내가 아는 그림 친구들 얼굴이 많이 보였다. 그 해 불합격한 팽모양의 언론 제보로 신창호화실과 이의주교수와의 입시 실기 내용 사전 유출 부정사건으로 신문, 방송이 난리가 났다. 합격은 하였으나 세상 있을 수도 없는 불 합격생중 성적 상위 순 2배수와 함께 재시험을 시행하여 철저한 감독 하에 실기 시험만(사범대라고 목탄 소묘, 수채화, 구성 3과목)을 다시 치고 최종 합격하였다. 그래도 입학 후 자세히 보니 합격생의 거의 절반이 신창호선생님화실 출신이었다.
아~아! 불꽃같은 늦 청춘의 부산대 시절! <계속>

  예유근작. 무위. 나무판넬에 유채. 20x25cm. 1973년 (작가소장)

  예유근작. 정물. 10호F. 캔버스에 유화. 1974년 (1981년 부산 공간화랑 신옥진사장이 가져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