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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8.24 01:24 수정일 : 2020.08.24 01:29
김현식, 사랑했어요
88올림픽이 지난 그해, 동성로 네거리엔 겨울 밤바람이 매서웠다. 인적이 뜸해가던 그 거리에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에서는 김현식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걸음은 종종 쫓기는데 노래는 호객꾼처럼 귀를 이끌었다. 동성로를 다 빠져나와 지하도를 내려설 때야 비로소 노래는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놓아주었다. 지금도 우리들은 잃어버린 사랑과 그때 동성로의 겨울 차가운 밤바람을 이 노래로 더불어 기억한다.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 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이제 와 생각하면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나에게 심어 주었죠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 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 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지금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당신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혼자서 걷는다.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그래도 잊을 수 없는데, 지금 나를 두고 ‘저만치’ 떠나가는 “정든 님”. 나만 혼자 남겨두고 떠나가면 나는 어이 하나. “떠나가면”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가정이 아니다. 지금 정든 그 님이 나를 떠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님을 향한 나의 하소연에도 어쩔 수 없이 돌아설 때, 발걸음마다 맺혀지는 “사랑의 추억”이여.
그 해, 동성로 네거리의 겨울 밤바람이 매서울 때, 또 한 사람 사랑을 잃고 이 노래를 들으며 아마도 눈발 휘몰아치는 종로 네거리를 지나갔으리라. 1989년 3월, 스물아홉으로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기형도. 그가 죽은 뒤 일 주일 후에 문예지에 실린 그가 남긴 마지막 유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빈집」
사랑을 잃은 “나”는 사랑과 함께 했던 것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눈다. 나의 사랑으로 하여 “짧았던 밤들”, 임의 창(窓)가와 내 집의 창밖을 쓸쓸한 나의 마음으로 떠돌던 “겨울안개들”, 사랑으로 인해 타오르고 흔들리던 불면의 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저 “촛불들”, 아무 말도 이제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흰 종이들”, 작별의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사랑을 잃었으므로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 없는 “열망들”. 아, 이제는 내 것인 ‘절망’을 안고 “나”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내 사랑이 떠나간 추억의 “빈집”에 갇힌다. 사랑을 잃었으므로 에이고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세상과 작별하고 사랑의 영원한 추억의 빈집에 든 기형도.
나는 기형도의 시집을 세 권이나 샀다. 처음에 사서 읽고 교무실 책상 위에 꽂아두었는데 누군가 와서 들고 갔다. 두 번째 사서 읽고 교무실에 두었는데 또 누군가 들고 갔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서 집에 두고 있다.
우리네 사랑도 삶도 완성은 마침내 이별인가? 거리에 한파가 몰아치는 지금 “사랑이 무언지” 그것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라는 노랫말이 되울림이 되어 자꾸 마른 가슴을 헤집고 파고든다. <이승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