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인문학 수프

인문학 수프

<인문학 수프11>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

작성일 : 2020.08.18 10:01 수정일 : 2020.08.18 10:07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

 

사람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입시생에게는 대학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고 취업생에게는 취직이 목적입니다. 학자들에게는 학문의 성격에 따라 공부의 목적이 생깁니다. 학문마다 숭상하는 게 조금씩 다릅니다. 대학에 여러 학과가 있지만 크게 묶어 보면, 돈 버는 것(직업교육), 궁금증을 푸는 것(순수 학문), 편리한 삶을 도모하는 것(응용 학문), 사람되는 데 기여하는 것(인문학), 함께 사는 데(사람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사회과학)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직업교육, 학문교육, 순수학문, 응용학문, 인문과학, 사회과학 등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공부의 목적은 아마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 분야에서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습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편 다른 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생애는 구도의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도학자들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도리를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할 것인가에 있었다.

그런데 일반인들의 생활은 매일매일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인처럼 살 수 있을까? 정명도(程明道)정성서(定性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릇 천지의 항상됨은 만물에 두루하면서도 사심이 없는 데 기인하고, 성인의 항상됨은 만사에 순응하면서도 사사로운 정()이 없는 데 기인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확 트이고 공평하여 사물과 접촉할 때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제일이다. …… 성인이 기뻐함은 대상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성인이 성냄은 대상이 마땅히 성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기뻐하고 성냄은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인이 어찌 대상에 순응하지 않겠는가? 그가 어찌 밖을 따르는 것을 그르다 하고 (마음) 안에서 구하는 것만 옳다고 하리요!”

 

성리학자들에 의해 회자된 이 글의 요점은 <곽연이대공 물래이순응(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이라는 10자에 있다. 즉 나의 사사로운 의도적 분별(自私用智)를 없애고 확 트인 마음으로 대상에 따라 도리에 맞게 순응하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항상 범하는 오류인 치우침과 편견을 없애는 핵심은 사심(私心)을 없애는 것이며, 또 우리는 마음 안으로만 추구하고 외부 세계를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치우침이 없는 그런 <중정(中正)의 도>를 어떤 방법으로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리학의 근본 문제의 하나인 이 주제는 중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용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시작된다.

 

하늘이 품부하여 준 것을 성품이라 하며, 자기 성품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의 내용을 정리한[品節]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도라는 것은 한 순간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 희로애락의 정()이 작용하기 이전을 중()이라 하고, 작용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며, 화는 천하에서 가장 보편적인 도이다. 중과 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순조롭게 생육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마음이 외부 사물에 대응하여 작용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에게 하루의 생활이란 희노애락의 정이 부단히 작용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이 작용할 때(已發) 우리는 항상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도리가 우리의 성품에 내재한다는 전제에서 볼 때 치우침이 없는 중정의 도(未發之中)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 중정의 도리를 실천하기만 한다면 곧 성인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이 근본 주제에 대해서 주자가 자기 입장(定論)을 확립하기까지는 크게 삼단계의 변증법적 과정을 겪게 된다. 처음에 주자의 스승이었던 이동(李侗, 1088-1163)은 정적인 방법을 중시하여 <묵좌징심 체인천리(黙坐澄心 體認天理)>를 가르쳤다. 즉 조용히 정좌하고 앉아서 마음을 맑게 하여, 본체로서의 천리를 몸소 깨닫는 것이다. 여기서 본체라는 것은 중용에서 말하는 <미발의 중>이며, 이런 방법은 선불교의 수양법과 유사하다. [김수중, 유가의 인간관, 인간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주자의 공부법은 그 뒤로 찰식단애(察識端倪, 수양이란 그 싹 혹은 실마리를 살피는 것), 거경함양(居敬涵養, 경건 속에서 주체를 기르는 것) 등의 과정을 거쳐 거경궁리(居敬窮理, 거경이란 내적 수양법으로서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가지는 일이며, 궁리란 외적 수양법으로서 널리 사물의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일이다)에 이르게 됩니다. 그처럼 인간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교정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 년 전의 소론들이 지금 보아도 수긍이 가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성정이 쉬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꾸준하게 계도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옛날 사람들의 공부의 목적과 방법을 되새기면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좀 겸연쩍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그 숱한 교육학들이 결국은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사회가 타자공동체로 바뀌고 가정이 바로 서야 비로소 제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인데 전혀 그런 물적 토대가 없이 자가발전만 계속해대는 이론들이 스스로 교육의 전부인 양 으스대 왔던 것도 문제라면 큰 문제입니다.

 

교사를 양성하는 직업 대학에 근무하면서 느끼는 것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사람을 기르는 이론들의 막무가내식 자기주장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반인문학적 태도에 종종 치를 떱니다. 몇 년 주기로 선도 이론이 바뀌는데, 한 번 선편을 잡았다 하면 아주 싹쓸이를 해댑니다. 열린교육이 쓸고 간 마당을 구성주의가 나와서 뒤치다꺼리를 해대더니, 요즘은 창의 인성이라는 게 불쑥 튀어나와서 또 야단을 떱니다. 영재교육이 어떻고 디베이트가 어떻고 융합이 어떻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세우는 것들과는 아주 판이하게 인간을 마치 기계의 한 부품처럼 다루는 폼들이 가히 목불인견입니다. 누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고 하니까 그 말을 받아서 또 누군가가 대학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거기에다가 교육학이 죽어야 교육이 산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검도 공부를 할 때 자주 듣는 말로 , , (守破離)’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 나온 말이라 합니다. ‘지키고 깨고 떠나라는 뜻입니다. 지키는 것()은 선인(先人)들이 쌓아온 경험의 교훈들을 남김없이 답파하는 것을 뜻합니다. 검도에서는 연습(練習)한다는 뜻으로 계고(稽古, 옛일을 자세히 살펴 공부함)라는 말을 씁니다. 기예(技藝)의 세계에서는 물려받는 일이 그만큼 중합니다. 기예를 익히는 자들은 누구나 수련 시간의 대부분을 계고에 할애합니다. 같은 동작을 매일 반복하고 그 숙달에 진력합니다. 도복(道服)을 벗고 있는 시간에도 선인들의 가르침이 담긴 책들을 보면서 옛것이 주는 교훈을 찾습니다. 행여 놓친 것이 없나 노심초사합니다. 그렇게 계고에 치중하다 보면 부득불 이러다 언제 깨고 언제 떠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 하나 몸에 붙이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모자라는데 언제 나만의 것을 찾아서 떠날 수 있을 것인지 막연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 , 라는 가르침이 그 자체로 공연한 관념놀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익히다 보면, ‘한 사람의 일생만 가지고는 다 이룰 수 없는 경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몸으로 하는 것일 경우 조금 알 만하면 몸이 쇠하여 그 끝을 볼 수 없는아이러니가 운명적으로 존재합니다. ‘, , 가 밖에 있는 어떤 경지를 기준으로 그 뜻을 새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깨고 떠난다(破離)’라는 말씀을 좀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키는 것()’은 밖에서 찾지만 깨고 떠나는 것은 안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그것의 표면상의 의미만을 중시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깨고, 나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라고 해석하지 말고, 배운 것을 잘 지키되, 자기가 이룬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그것을 과감히 깨고 떠나기를 반복하자는 격언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깨고 떠난다라는 걸 내 자신의 소박한 경험으로 얻은 것들을 깨고 떠나는 것으로 새겨듣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다는 것(學習)은 결국 앞에서 익힌 것들을 깨고 떠날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앞에서 배우고 익힌 낮은 단계를 고집하지 않고 부단히 그것을 부정해 나갈 때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정작 지킬 것()은 그런 , , 를 몸소 실천한 옛 선인들의 가르침이고, 깨고 떠날 것(破離)들은 오로지 내 작고 비좁은 경험칙들입니다. ‘깨고 떠나는 것은 공부가 지속되는 한 단 한 시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어지면 거기서 공부도 끝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과신(過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기대 밖의 성공으로 이어진(운이 따라주어서), 그렇지만 그야말로 소박한 것인, 그런 불로소득(?)일수록 더 위력이 있습니다. 가히 일당백입니다. 그럴 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말은 듣기(百聞)와 보기(一見)의 대립이 아니라, 소문과 경험의 차별을 뜻합니다. “내가 겪어본 일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철칙이 됩니다. 세간적인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서 그런 경험에 대한 과신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 크는 것은 어디서나 그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을 마다하지 않을 때입니다. 나를 부정하고 타자의 경지를 스스럼없이 인정할 때 사람은 성장합니다. 선생이 되어 이것저것, 무엇이든 가르치다 보면 반드시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이나 경지로 알아듣게설명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주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그런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개중에는 모든 앎이 속으로는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경험칙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사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에 하나의 줄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크는 것은 그야말로 일기일경(一機一境)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특히 자기 성찰을 요하는 앎의 세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수시로 깨고 떠날 일들이 필수적인 곳이 그곳입니다.

스스로 그런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것이 바로 공부의 요령일 것입니다. 늘 어제의 것을 버리고 내일의 것을 향하라고 독려할 때 성공한 공부인(工夫人)이 될 수 있습니다. ‘, , 는 그래서 모든 공부의 헌법이 됩니다. 단지 수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체의 측면에서, 공부의 경지를 부단히 업그레이드 시키는 강제(强制)의 규범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넘은 문턱이 오늘의 내 소박한 경험이 되어 새로운 문턱 넘어서기를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는 것 , , 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선규 소설가 /대구교육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