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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수프10> 마왕의 추억

작성일 : 2020.08.09 08:52 수정일 : 2020.08.18 10:07

마왕(魔王)의 추억

 

TV에서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魔王)>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저것 재미난 스토리텔링과 함께 <마왕>을 들으니 정말이지 마왕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인간의 삶, 이야기가 첨부될 때 감동의 증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8살의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가 <마왕>을 작곡해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출판사에서는 그 신곡을 도저히 판정(이해?)할 수 없어서 동명이인의 슈베르트에게 그것을 보내고, 그는 다시 이런 엉터리 곡을 내가 작곡했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편지를 동봉해 반송했다는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이미 미래는 와 있었는데, 과거에 젖어 사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엉터리로 보였다는 겁니다. 슈만이 아니었다면 슈베르트가 송부한 미래는 영영 우주의 미아로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반송(返送)과 뒤늦은 발견이야말로 천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최초의 방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서양인들의 마왕에 대한 사랑은 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는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에 퍼지면서 여러 토속신앙들을 토벌하면서 생긴 일종의 반대급부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탄(마귀)에 대한 두려움이 그렇게 형상화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일종의 집단무의식적 현상으로서 그들 서양인들이 마왕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묘한 애증병존의 심리상태가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 경우, 젊어서는 그런 마왕 신드롬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글을 고쳐 쓰면서 다시 들어 보니(하나는 가곡으로 하나는 피아노곡으로) 조금 느낌이 달라지긴 했습니다. 불안의 대상화를 꾀하는 예술적 대응으로서의 마왕 신드롬이 충분히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것, 그리고 외디푸스 이래로 존재의 불안을 아버지와 아들’(혹은 아버지의 아들)의 문제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오래된 유럽식 해석의 전통도 이해할 만했습니다. 이른바 가곡 <마왕>의 주제상의 시도동기(示導動機 leitmotif)불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마왕 이야기는 존재의 불안을 노래한 것이며 그 불안의 근저(根底)에는 일종의 거세 콤플렉스가 존재한다는 정신분석의 설명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마왕도 이면(裏面)의 아버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한국적 마왕과 마녀들의 각축장이었던, 그릇된 부모들의 허영과 자녀 사랑(?)을 그린 드라마 <스카이캐슬>ost 'We all lie'가 누가 봐도 <마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복자처럼 들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사도세자가 살아생전에 <마왕>의 존재를 알았다면 분명 데려다 자신의 18번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피를 말리는 부자 갈등을 겪어보지 않은 보통 인간들에게도 짧고 강렬한 슈베르트의 <마왕>은 무언가 깊은 호소력,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어떤 원초적인 느낌을 줍니다. 아마 그런 느낌적 느낌을 신화(원형) 문학론에서는 원형적 모티프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말이 나온 김에 미셸 투르니에의 마왕이라는 작품도 한 번 보겠습니다.

 

마왕은 아벨 티포쥬라는 한 프랑스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의 길을 찾아 나서는 모험담 형식의 소설입니다(보통 이런 소설의 주인공을 신화(원형)문학론에서는 탐색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이 소설은, 회상(유년의 기록, 11살의 소녀 마르띤느와의 만남, 살인범 바이드만의 사형 장면 목격담 등)으로 이루어진 전반부와 비둘기 사육병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겪는 경험담(포로가 되기까지의 과정, ‘칼텐보른에서의 운명 찾기 등)인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아벨 티포쥬가 자신의 운명을 찾는 과정은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과 유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앞길을 열어 밝히는 신화적 상징들을 찾아갑니다. 이 운명의 드라마는 아벨 티포쥬라는 그의 이름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벨이라는 내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성서의 구절들이 눈에 띄던 날까지 아벨이라는 이름은 내게 우연처럼 보였다. 아벨은 목동이었고 카인은 농부였다. 목동은 떠돌이고 농부는 정착민이 아닌가. 아벨과 카인의 싸움은 유랑민과 정착민의 격세유전적인 대립처럼, 더 정확하게 말해 유랑민에 대한 정착민의 가혹한 박해처럼 태초부터 오늘까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희생자는 유랑민이다. 정착민의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파렴치하고 치욕스런 방법으로 집시들을 통제한다. 정착민은 집시를 전과자처럼 다루지 않는가! 게다가 마을 입구에 유랑민 숙영 금지라는 푯말까지 세운다.

카인은 저주를 받았고, 아벨에 대한 증오심처럼 그의 벌은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신이 카인에게 말했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렇게 카인은 그의 입장에서 가장 혹독한 벌을 받았다. 카인은 예전의 아벨처럼 떠돌이가 되어야 했다. 카인은 그 판결에 반항하며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면전에서 멀리 물러났다. 그리고 최초의 마을을 세우고 에녹이라고 불렀다. [미셸 투르니에(이원복 역), 마왕(과 황금별), 종문화사]

 

주인공 아벨 티포쥬는 자신의 이름에서 일종의 운명을 읽습니다. ‘상징이 문화적 매개가 되어 한 인간의 서술적 정체성에 깊은 홈을 파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출발에서부터 근대적 문제의식(이성을 토대로 한)과는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성서적 알레고리의 도입으로, ‘유목민의 후예라는 서술적 정체성을 자신의 인생의 플롯으로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알아야 했던 것은 독일군 SS들이 그악스럽게 절멸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두 민족은 유태족과 집시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유목민에 대한 농경민의 천 년 묵은 증오가 그 절정에 달해 있는 것을 재발견한 셈이다.(323)”라고 적습니다. 카인과 아벨이라는 성서적 알레고리가 인간을 정착민과 유목민으로 양분해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서양인들의 오래된, ‘양분하는 인식은 다음의 인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여자 손님이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소녀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떠날 때 아이는 도리질을 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갑자기 나는 일곱 살 미만의 - , 얼마나 현명한 나이인가! - 아이들은 대부분 왼손을 내민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신성한 단순성이여! 그들은 자신들의 순수성으로 인해 오른손이란 가장 가증스럽고 지저분한 일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른손이 암살자들의 손, 사제들, 소매치기들, 권력가들의 손 속으로, 마치 창녀가 부자들의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듯이 미끄러져 들어갈 때, 불쌍하고 모호하며, 또 겸손한 왼손은 오직 누이들의 악수에나 잡히면서 마치 숫처녀처럼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일곱 살 미만의 아이들에게는 항상 왼손을 내밀 것. [미셸 투르니에, 마왕, 고미숙 , 들뢰즈와 문학-기계에서 재인용]

 

미셸 트루니에의 소설 마왕은 한 인간의 서술적 정체성에 관여하는 여러 종류의 상징적 매개들로 가득 채워진 작품입니다. 특히 유럽인들에게 하나의 숙명처럼 여겨지고 있는 원초적 트라우마들이 유려하게 묘사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징들의 숙소(宿所)’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슈베르트가 그 느낌의 일단을 예술적 영감으로 포착한 것이 가곡 <마왕>이라면 그 전말을 한 인간의 일생을 통해 찬찬하게 묘사한 것이 소설 마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해탈하지 않는 한 불안은 우리의 버릴 수 없는 숙명입니다(한 알의 약으로 그 모든 불안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안 그 자체에 매달리는 것은 백해무익하고 도로(徒勞)에 그치기 십상인 일입니다. 그것보다는 슈베르트나 미셸 트루니에가 한 것처럼 우리가 지닌(우리 안에 잠들고 있는) 여러 가지 상징체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해 보는 것은 훨씬 유익할 듯합니다. 더불어서, 우리 안의 마왕들에게 충분한 발언의 기회를 한 번 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 싶습니다.

<양선규 소설가/ 대구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