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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너머로—김 홍희의 ‘산복 도로’ 사진

작성일 : 2020.08.08 10:52

바다 너머로—김 홍희의 ‘산복 도로’ 사진

배 학수(경성대 교수, 철학)

중국의 풍우란(馮友蘭, 1894년 ~ 1990년) 교수는 철학을 인생에 대한 체계적 사유라고 합니다. 철학의 정의는 시대마다 바뀝니다. 처음 철학이 시작하던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 어떤 식의 앎이든 그것을 추구 하는 활동은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에 대한 가장 넓은 정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활동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생물학이나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은 ph.D 즉 철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철학은 가장 넒은 의미의 철학, 즉 지식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풍우란 교수는 철학을 인생에 대한 사유라고 좁게 규정합니다. 이것은 철학에 대한 현대적 정의입니다. 고대에는 모든 학문을 철학이라고 불렀지만, 근대 이후 철학은 다수의 과학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이제 철학과 과학을 구별하려면 철학을 좁게 규정해야 합니다. 그냥 철학을 앎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면 철학과 과학을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학문의 분과화라는 현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풍우란 교수는 철학을 인생에 대한 체계적 사유라고 좁히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사유는 철학뿐 아니라 예술도 수행합니다. 철학과 예술의 차이는 매체에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철학은 추상적 언어로 사유하지만, 예술은 각자 나름의 매체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일상의 언어로, 음악은 소리로, 사진은 영상으로, 인생에 대해 사유합니다.

김 홍희의 ‘산복도로’ 사진을 보세요. 여기에는 시간에 대한 탐구가 들어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시간의 구성 요소입니다.  인간은 그런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거는 현재에 남아있고, 미래는 현재에서 나오며, 동시에 미래는 현재를 형성하고 과거를 해석합니다. 인간의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를 뿐 아니라, 거꾸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거슬러 올라오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양태를 철학에서는 인간의 역사성이라 부릅니다.

카(E.H.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합니다. 역사는 지나간 일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지향과 현재의 고민 속에서 과거를 새롭게 구성하는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필자는 ‘산복도로’ 사진에서 미래와 현재의 대화를 발견합니다. 단순히 현장을 기록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전망 속에서 현재에 접근하는 작가의 역사의식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진은 평면이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내적 연관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평면에서는 요소가 상이하더라도 동질적 공간에  배치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지향 속에서 현재를 드러내고 싶다고 미래 요소를 화면 앞으로 돌출하게 만들고 현재 요소를 배후로 놓는다면, 그것은 사진이 아니라 조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사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예술가는 매체의 제한성에 불평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사진의 평면성을 수용하면서도 시간의 입체성을 표현하는 능력, 즉 현재와 미래의 물리학적 병열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의 연관을 구성하는 방식이 작가의 창의력일 것입니다.


이 사진에서 현재의 요소는 게시판, 주차장, 그리고 길입니다. 게시판은 근처 주민들이 집을 세 놓거나 사람을 구하는 거래의 마당이며, 주차장에 서 있는 봉고나 지프,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는 먹고 살아 가기 위한 운송 도구입니다. 게시판과 주차장 사이의 좁은 길 역시 차들의 이동 목적이 여유로운 문화생활이 아니라는 점을 말합니다. 빈곤의 냄새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게시판, 신분의 과시나 놀이와는 무관한 생활용 차들의 주차장, 그리고 좁은 길은 여기 사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런 현재가 사진의 전부가 아닙니다. ‘산복 도로’ 사진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봇대와 거기서 바다 건너로 뻗은 전깃줄 입니다. 작가는 사진 중앙에 전봇대를 높이 세우고 전기 줄을 바다 너머로 보냅니다. 전봇대는 기하학적 공간에서는 게시판, 길, 주차장과 이어져 있지만, 형이상학적 공간에서는 그것들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높이 솟아오른 전봇대는 지금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울분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일 것입니다. 전봇대에서 전깃줄이 바다를 건너 저 멀리 나직한 마을로 넘어가며, 동시에 화면의 저 먼 그 마을에서 시작하여 화면의 왼편 상단을 뚫고 올라가는 듯한 착시가 일어납니다. 실제로 전깃줄이 바다를 넘어갈 수 없지만, 여기에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에서 여기로 왕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활고가 일으키는 분노가 차가운 절망을 넘어서 푸릇푸릇한 전진이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소망입니다.

전봇대와 전깃줄이 없었다면 이 사진은 산복 도로의 답답한 인생 밖에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은 흔히 삶의 애환이라고 합니다. 필자는 삶의 애환이 무언인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삶의 애환이란 좋아서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쁜 것이니까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진이 예술이 되려면 사물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물의 현재를 영상에 옮기지 말고, 사물에 대한 작가의 자세를 작품 속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신념이 현재에 새로운 빛을 주고 있기 때문에 산복 도로의 현재는 답답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넘어가는 푸른 전깃줄이 빈곤의 속박을 넘어서는 박력을 산복 도로에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이란 회화와 달리 작가가 마음대로 사물을 작품에 만들어 넣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찍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고정적 현재를 사진에 담으면서도 미래를 표현하고, 미래 속에서 현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솜씨가 이 작품을 빛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