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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기억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기억의 더께 여섯 - 방랑하는 꿈 재수생시절

작성일 : 2020.08.05 08:01 수정일 : 2020.08.05 09:14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역사는 기억하는 자가 사라지면 왜곡된다. 가족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란 것이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나에게는 늘 가깝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성년이 된 후로도 바니타스(Vantitas) 작품들이 늘 눈에 들어왔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나의 작품은 황량한 들판 속에서도 시원의 빛과 생명을 찾아서 멀리 보고 있는 풍경을 통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내 작품 속에 은근히 배여 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나름 겸손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루지 못했던 삶을 ‘혹시 내가 연장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기억의 더께 여섯. -방랑하는 꿈 재수생시절

 아마도 1970년대 초기 당시 그림을 그렸던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듯이, 목숨 걸고서라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진학은 학교, 학원, 가족과 나 자신의 역사적 사명인 것처럼 공부하며 살았다. 나 역시 미술부 한해 선배인 안석준과 동기 정철교와 서울대 시험을 봤으나 세 명 다 불합격이었다. 사실 경쟁률은 17:1 장난이 아니었다. 나 역시 몽매 학벌주의 빠져서 재수로 입시를 자신 있게 도전했지만 허무하게 실패했다. 후기였던 홍익대마저도 낙방이었다.
 못 따 먹을 포도는 쉰 포도라고 어린 마음에 좌절된 꿈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결론은 실력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라고 생각했다.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주말마다 서울까지 비행기타고 교수 실기 지도를 받으러 다니는 명문 여고의 화실 여학생들을 보면서, 아무리 비싼 돈 주고 대학교수에게 렛슨을 받고 한들 입시에 무슨 별 도움이 되겠나? 라고 생각했다. 왜 서울까지 주말에 그림을 배우러 다니는지 그땐 나는 잘 이해를 못했다.
 어리석게도 내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내 부족한 실기 실력은 도무지 인정을 하지 못하고, 그저 현실과 입시의 부조리함을 탓하기만 하면서도 이왕 실패한 김에 재수는 필수라고 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도전하였으나 다시 보란 듯이 낙방했다. 바보 같이 몽매 학벌주의에 빠진 허깨비 같은 청춘이었다.  
 대청동의 재수 전문학원인 '대성학원'을 다니며 한쪽으론 나름 교과공부를 하는 듯도 했다.  저녁엔 늘 광복동입구 동래고 선배인 홍익대 건축미술과 출신 실력파 다혈질 이추복선생이 운영하는 신조형미술연구소(잠시 이추복선생이 결핵으로 병원에 입원중 허종하선생이 운영)에서 입시준비 고등학생을 지도하며 살다 시피 했다. 그러나 남포동, 광복동은 피 끓는 청년인 나에게 얼마나 놀기에 좋았던지... 상남자 멋쟁이 의리의 작가 허종하(서양화가. 사)대한민국 남부미술협회이사장)형을 따라다니며 배운 남자의 의리와 멋과 매너, 의상실을 하던 노양규형, 한해 후배 잘생긴 박성원(전동아고미술교사)과 손종필과 허용철, 박주수(서양화가) 등 그 일당들과...
 먼저 그 열심이던 교회도 출석하지 않았다. 재수학원 친구들과 저녁만 되면 술집을 찾아다니고, 술이 취하면, 청년화가의 객기 비슷한 심정으로 고교시절부터 즐겨 그려오던 남포동 한복판에 이젤을 펴서 조명으로 휘황찬란한 야경을 사람들 보란 듯이 그리기도 했다. 동양미술학원출신의 임택근과 장순근 (지금은 둘 다 미국 LA에서 살고 있음), 고교 동기 정철교와 함께 머리카락은 경찰 단속을 피해 서로들 경쟁적으로 미친 장발로 하고 다녔다. 딸깍발이처럼 머리카락을 내 목보다 소중히 해서 즉결재판장에 가서도 벌금을 내고 자르지 않았다. 그 시절 반항의 아이콘이 장발인데 어떻게 자른단 말인가? 가끔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허~... 벌금은 화실 동료 여대생들이 주로 중부경찰서로 면회 와서 내 주곤 했으며, 와중에 친구들의 권유로 배운 담배를 개폼도 멋있는 척하며 곧 죽을 것처럼 엄청 피워 댔다. 청춘을 유흥으로 태워 보낼 듯이 친구들과 당구도 배우고, 다방에서 죽치며 기회만 생기면 예쁜 여자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화실 친구 박충금(서양화가), 여진호(전삼성여고 국어교사) 등과 종종 고고클럽에 가서 그 머리카락을 흔들어 댔다.
 때로는 정철교와 뜬금없이 엽서를 보내 약속하고 만나서 김해 수로왕릉으로 야외 스케치를 갔다. 김해 쪽에서는 서상환선생님과 김종식선생님도 가끔 뵈었다. 또 임랑 백사장과 동해 바닷가 등으로 풍경도 많이 그리러 다녔다. 그때 그렸던 작품 대다수는 친구들이 가져갔는데 소재가 불분명하여 찾을 수 없고 사진 한장 남아있지 않는 점이 너무 아쉽다. 특히 택근이와 철교는 서로의 집에서 돌아가며 함께 먹고, 자기도 하고, 미래의 꿈을 다짐하며 우정을 확인하려는 듯 거의 매일 만나다 시피하며 함께 붙어 지냈다.

 시나브로 놀면서 그림만 그리던 청년의 꿈같은 시간은 서서히 울먹거리며 돌아섰다. 누나는 장성해서 아깝게 세상을 버리고, 일찍이 큰 형님의 군대에서 의문사한 일로 어머님께서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으로 돈도 날리고, 세월을 평생 거의 보내셨다. 형님의 사인 진상은 결국 밝히지를 못하고 후에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2,007년경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해 주겠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이미 직계가족의 국가유공자도 의미가 없어 포기한 상태다. 둘째 형님도 결혼하여 '한국전력'에 근무 중에 형수님과 어린 조카를 두고 신장염으로 병사하였다. 어머님의 울음소리는 어디서든 들려 왔다. 청춘에 돌아가신 누님과 형님의 사진들을 꺼내놓고 보시면서 한번 시작하면 어찌나 서럽게 우시는지 이웃에 사시는 이모님과 동네 분들이 와서 위로하면 더 크게 소리 내어 우셨는데 나중에는 바닥을 치며 곡소리로 한을 푸시려는 듯 그동안 외롭게 살아오신 인생의 이야기를 창 하듯이 읊으며 우셨다. 당신의 모습을 위로하려고 함께 하던 사람들과 우리 가족들은 어머님의 곡소리를 들으면 더 슬퍼져서 다 같이 엉엉 울었다.
 가족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란 것이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나에게는 늘 가깝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성년이 된 후로도 바니타스(Vantitas) 작품들이 늘 눈에 들어왔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나의 작품은 황량한 들판 속에서도 시원의 빛과 생명을 찾아서 멀리 보고 있는 풍경을 통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내 작품 속에 은근히 배여 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나름 겸손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루지 못했던 삶을 ‘혹시 내가 연장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셋째 형은 학업 성적도 좋았지만 상고를 졸업해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공장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하나 뿐인 동생인 나에게 적극 지원해 주었지만, 집안 형편은 갈수록 기울어져 갔다. 서울 공부와 생활은 언감생심 헛꿈이 되어 찬 이슬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존심을 버리고 부산의 대학, 대신동 동아대 미술과로 진학했다. <계속>

# 74년 부산시공보관 전시실에서(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내 앞에는 진병덕, 김 원선생님이 보이고, 뒤로는 이강연형, 성백주선생님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