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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8.03 07:06 수정일 : 2020.08.03 07:15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11)
박일남, 갈대의 순정
내 어릴 적 어느 날 아버지가 전축을 사 오셨다. 쌀가마만한 스피커가 양쪽에 달리고 턴테이블 안쪽 벽면마다 거울이 끼워진 커다란 전축이었다. 지금 희미한 기억으로 아마 미8군에서 나온 것을 어떻게 구하셨다 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그것을 대단히 애지중지하시고 늘 집안이 텅텅 울리도록 커다랗게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시곤 하셨다. 구비 구비마다 꺾어지고 늘어지고 감정이 실린 아버지의 노래솜씨는 가수 못잖았다. 그때 나는 전축에서 울려나오고 아버지가 부르시는 노래를 수도 없이 많이 들어서 웬만한 노래는 2절, 3절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 중에 이 「갈대의 순정」은 그 시절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로, 내 철없던 그 시절에 나도 모르게 나도 사랑을 잃고 우는 사나이의 비감한 심정이 되어 듣기도 하고 속으로 따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내가 노래방에라도 가면 몇 곡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중의 한 곡이기도 하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어라
아 ~ 아 ~ ~ ~ 갈대의 순정
말없이 보낸 여인이 눈물을 아랴
가슴을 파고드는 갈대의 순정
못 잊어 우는 것은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어라
아 ~ 아 ~ ~ ~ 갈대의 순정
“사랑에 약한” 사나이는 나처럼 눈물이 많았다. 이별 앞에서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이별 앞에 흔들리며 우는 사나이에게, 사랑을 못 잊어 우는 사나이에게 노래의 화자도 따라 흐느끼며 떠나가는 여인이 어찌 눈물을 알까 하고 “울지를 말아라.”고 사나이를 껴안는다. 그 비통한 상심의 장면 앞에 나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내 어릴 적 그때나 젊은 날에. 젊은 날 나도 말없이 떠나보낸 이별 앞에 지푸라기조차 잡고 싶은 갈대였다. 이별 앞에 지푸라기조차 잡고 싶은 갈대였던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여기서 “갈대의 순정”이 그냥 이리저리 지조 없이 흔들리는 뜨내기사랑을 말하는 게 아닌 줄 알기에 이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더욱 내 가슴을 파고든다. 순정이 어찌 이리저리 지조 없이 흔들리는 순정이 있을까. 갈대에게 물어보아도 어느 갈대가 순정이 그렇다 할까. 지조 없고 연약하고 우유부단하다 할까. 다음의 시를 보라. 몸은 비록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갈대가 얼마나 의지가 강한지.
꿈만은 절대, 휘이면 안 된다
갈대는,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거침없이 여름 강 한복판으로 쭉쭉 生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꿈만은 절대, 휘이면 안 된다
그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한낮의 물 바닥 위를 푸들거리며 갈대는 겁도 없이, 곧장 물살을 향해 머리를 내뻗고 있었다
―김동원, 「갈대」
한여름 땡볕 아래 갈대들이 거센 물살을 건너고 있다. 반쯤 물에 잠긴 갈대의 허리가 물살에 떠밀려 휘고, 물 밖으로 드러난 갈대의 상반신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갈대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의지로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거침없이” “쭉쭉” “강 한복판으로” 발을 내뻗고 있다. 그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에. 그 확고한 꿈이 “폭염”이나 “물살”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고 있다. 힘을 내. 절대 꿈만은 휘면 안 돼. 갈대를 보며 시의 화자는 자신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잖은가. 그래서 “갈대의 순정”은, 사랑을 잃고 못 잊어 우는 사나이의 마음은, 이리저리 지조 없이 흔들리는 뜨내기사랑이 아니라 갈대의 절대 휠 수 없는 꿈처럼 절대 변할 줄 모르는 “갈대의 순정”이 된다. 아, 그래서 나도 사랑 앞엔 약하고, 말없이 보낸 그 여인을 잊지는 않을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갈대의 순정”이다. <이승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