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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수프9 > 네 편의 영화 이야기

작성일 : 2020.07.27 11:36 수정일 : 2020.07.27 11:43

 네 편의 영화 이야기

 

재미있게 본 네 편의 영화 이야기입니다. <뜨거운 것이 좋아>(권칠인, 2008), <취화선>(임권택, 2002), <검우강호>(소조빈, 2010), <리틀 포레스트>(모리 준이치, 2014)가 그것입니다. 모두 오래 전에 본 것들입니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제 영화 취향의 맹점(盲點)을 확실하게 보여준 영화입니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무언가 제 안에서 호응하는 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료로 보라고 했다면 절대로 안 볼 영화였는데 곰 TV 무료영화여서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 위의 네 편의 영화가 어떤 공분모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이 네 편의 영화는 모두 책상 위에서 본 것이라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입니다. 주제나 소재, 취향이나 유행, 기법이나 작가의식 등등 모든 면에서 각양각색의 영화들입니다. 심지어는 국적도 다 다릅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영화들입니다. 그러니 컴퓨터 화면으로 본 것 이외에는 한데 묶일 이유가 별로 없는 영화들입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남녀상열지사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영화는 그 동안 최우선 기피대상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영화를 대상으로 한 영화 에세이도 써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뜨거운 것이 좋아>는 제겐 아주 예외적인 영화입니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본, 정말 할 일 없어서 본, 이 영화가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초기의 감정이입 단계에서 약간의 버퍼링(인내심)이 필요했지만 곧 몰입이 되었습니다. 에로티즘을 전경화해서 세 여자의 정체성 서사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에로티즘은 여자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치(精緻)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중년의 홀로 된 어머니, 성년기의 이모, 청소년기의 딸, 이 세 사람이 각자 추구하는 사랑이 일견 다르지만 결국은 다 같은 것이었습니다. 소년기 동성애, 젊은 날의 사랑과 야망, 기약 없는 중년의 불꽃놀이(불장난 아님)가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에로티즘들의 진면목, 다면적 정체성의 실상이었습니다. 가끔씩 불쑥불쑥 현실의 기억들이 영화에 개입해서 몰입의 연결을 끊는 일이 몇 번 있기는 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예쁜 영화였습니다. 이미숙, 김민희, 안소희 세 명의 여배우들도 보기 좋았습니다. 연기 안에서 예쁜 배우가 진짜 예쁜 배우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취화선>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최민식 배우의 열연과 임권택 감독의 예술적 정열이 콜라보를 이루면서 한국영화 최대의 걸작으로 탄생한 작품입니다. 오원은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19세기말의 조선화단을 뒤흔든 화가였습니다. 그의 오원(吾園)이란 아호는 100년 앞선 조선최고의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처럼, “나도[] ()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부터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운 오원은 화재(畵才)에 뛰어났고 술과 색을 몹시 탐했다고 전합니다. 영화는 탁월한 영상미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한 폭의 대단한 그림이었습니다. ()든 색()이든, ()이든 화(), 오기(傲氣)든 절망(絶望)이든, 무엇이든 지상에 내려온 그것들의 지극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화면 곳곳에서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지극한 것들에 대한 예술적 헌정(獻呈)는 어디서나 누선(淚腺)을 자극하는 법입니다. 이 영화도 그랬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입화자소(入火自燒, 불 속에 들어가 자신을 태움)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오원이 도공(陶工)을 찾아가 신분을 감추고 그의 작업을 돕다가(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다가) 끝내 불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을 집어넣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지금도 제 책상 위에 걸려 있는 입화자소(入火自燒)’를 그렇게 영화 속에서 상봉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최고의 에로티즘은 예술 속의 에로티즘이라는 걸 <취화선>은 잘 보여줍니다. 노골적이고 질펀한 정사(情事) 장면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는데 영화는 에로티즘이 철철 넘칩니다. 그런 면에서 <취화선><뜨거운 것이 좋아>는 정통파 작가주의 도색(桃色)영화입니다. 육체의 에로티즘을 추구하지만 맥락의 힘으로 장면 장면을 살려냅니다. 같은 에로티즘 주제라도 무협영화 <검우강호>는 좀 다릅니다. 본디 남녀 간 색정(色情)을 멀리하고 가족애를 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무협극에는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검우강호>는 유난히 특별합니다. 불가(佛家)의 구원 메시지를 표 나게 내세워 천상(天上)의 에로티즘을 펼칩니다. 악연을 지닌 두 남녀주인공이 안팎의 온갖 어려움을 희생과 헌신의 가족애로 극복하고 궁극의 사랑을 이룬다는 멜로적 구성을 지닌 영화입니다. 멋진 무협영화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화려한 액션, 연기력 있는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와 아우라가 앙상블을 이루어야 하는데 <검우강호>는 그 세 가지 요소들이 “500년이라도 기다려 사랑하는 이를 피안으로 건너게 하겠다.”라는 아난의 돌다리 고사(我願化身石橋 受五百年雨打...)를 내세운 불교적 주제와 보기 좋게 콜라보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방불패><와호장룡>을 뛰어넘는 정통 무협극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검우강호>의 주인공은 세우(양자경)와 장인봉(정우성)입니다. 세우는 장인봉의 아버지를 죽인 흑석파의 살수(殺手)입니다.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인 이 두 사람은 그러나, 얼굴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한 사람은 복수를 위해, 한 사람은 회개의 의미로 얼굴을 바꿉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숨은 진짜 주인공은 전륜왕(왕학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감 있게 묘사되는 인물입니다. 흑석파의 우두머리인 그는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낮에는 말단 9품의 내시이지만 밤에는 무소불위의 최정예 암살집단을 이끄는 강호의 최강자입니다. 어려서 거세당한 채 궁에 들어온 전륜왕은 불철주야 무공을 연마해 절세의 고수가 되었지만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달마대사의 시신이 새로운 사지를 돋게 할 수도 있는 비법을 알게 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달마대사는 궁중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거세를 하였으나 궁에서 나온 후 다시 원상회복을 하였다고 전합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입니다.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화와 불행은 그의 가족을 갖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희생과 헌신이 진정한 줄기세포라는 것(육죽이 세우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을 모르고 함부로 나대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전륜왕의 간절한 욕망은 자신의 애제자 세우에 의해 좌절됩니다. 세우는 첫사랑 육죽에게서 자신의 벽수검법(劈水劍法, 물을 가르는 예리한 검법)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전해 듣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합니다. 전륜왕에게 의도적으로 자신의 칼을 빼앗깁니다. 스승은 자신을 배신한 제자에게 제대로 된 훈시를 내리기 위해서 세우의 칼로 보란 듯이 벽수검법을 시전(始展)합니다. 악의(惡意)는 언제나 악의로 되돌려 받는 법, 회심(回心)한 영리한 제자가 놓은 덫에 걸려든 전륜왕은 어이없게도 열한 군데나 세우의 단검(이 칼은 남편의 칼입니다)에 찔려서 쓰러집니다. 이승에서 모든 인간의 생사를 관할한다고 큰소리치던 전륜왕(轉輪王)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습니다. 자신의 생사 하나도 관할하지 못한 채 맥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지 독점과 지배가 아닙니다.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위해서 남과 남의 가족을 해하는 자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전륜왕은 실패하고 세우는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 무한한 선의(善意)와 용서, 가족애, 그런 것들이 있어 우리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무협영화 <검우강호>는 보여줍니다.

 

지금은 서른 살 청년이 된 집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제가 비디오테잎을 빌리러 가면 자기도 따라가서 자기 것을 하나씩 챙겼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드래곤볼>을 빌려왔습니다. TV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는 아이를 수시로 뒤로 당기면서 부지불식 그 내용을 염탐하게 되었습니다. 좀 특이한 게 주인공 손오공의 아버지 이름도 손오반이고, 아들 이름도 손오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코흘리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이 어떻게 똑같냐?” 그러자 아들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대답했습니다.

원래 그래요!” 아이는 별걸 가지고 다 시비를 건다는 투였습니다. 시작부터 그랬는데, 왜 자기에게 트집이냐는 거였습니다. 백보 양보해도 이건 만화가 아닌가? 이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인데 그런 네이밍(이름짓기) 하나를 두고 시비 걸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유전되는 게 또 인생 아니겠는가? 아이의 대답이 그런 상식에 속할 자문자답을 불러왔습니다.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속인(俗人)으로 살다 보면 원래 그런 것들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간과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도 그랬습니다. 연애의 리얼리즘을 화면 속에서 보기 싫어했던 것은 명백히 저의 연애 콤플렉스탓이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그런 염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능숙하지(자연스럽지) 못했던(못했다고 자책하는) 연애 기억에 대한 회피도 조금은 수그러드는 느낌입니다.

원래 그런 것에 대한 직시(直視)가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절감케 해 준 영화가 <리틀 포레스트>(모리 준이치, 2014)입니다. 우리 영화로도 리메이크된 작품입니다(임순례 감독, 김태희 류준열 주연). 성년기에 접어든(우리식으로는 대입 수능시험이 끝난 뒤) 한 소녀가 시골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기록입니다. ,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마다 7종의 음식 만들기가 시전(始展)됩니다.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무렵에 나온 영환데(원작은 만화) 시골에서 혼자 사는 일상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유행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혼자되자 자신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남편의 고향으로 귀촌합니다. 아이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자 그런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아이가 고향에 뿌리를 내릴 무렵 홀연히 아이 곁을 떠납니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서 다시 도회로 나갑니다. 튼튼한 뿌리를 갖게 된, 그리고 혼자 남겨진 영화의 주인공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과 감사함을 절로 알게 됩니다. 어머니로부터 어깨너머로 전수받은 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그녀의 손길이 사뭇 거룩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겁니다. 그런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었기에 만화에서 영화로 옮겨졌고 또 이웃나라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과 감사함을 실감나게 전이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원래 그런 것들 중 하나를 생생하게 환기시켜주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네 편의 영화인가? 마지막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 이 네 편의 영화 주인공들이 제 안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에로티즘도, 예술에 대한 동경도, 복수심도, 희생과 헌신도, 자연의 품 안에서 혼자서 자립하는 미숙한 자아도, 모두 제 안에서 저의 자기 동일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낯익고 이쁘고 살가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것들이 어찌 제 주인공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네 편의 영화이야기를 제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양선규 소설가/ 대구교육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