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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평전 25 > 김춘수 시인 불멸의 ‘꽃’이 되다 -김춘수 시인의 서울 시절 (4)

작성일 : 2023.10.15 01:21 수정일 : 2023.10.15 01:25

<김춘수평전 25 서울시절3>

 

김춘수 시인 불멸의 이 되다

-김춘수 시인의 서울 시절 (4)

 

양 왕 용

 

200485일 조간 조선일보에 간밤에 김춘수 시인이 기도폐색으로 의식불명이 되어 분당 서을대 병원으로 이송되어 투병중이라는 기사가 났다. 필자는 그동안 정정하시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하여 여러 곳으로 수소문하였다. 어제 오후 댁에서 미음을 먹다가 기도폐색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김 시인의 큰 따님 김영희 여사는 훗날 인터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날 가슴 있는 데가 결린다고 하고 아마도 폐렴기가 있었나봐요. 상식적으로는 폐렴이면 열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열이 없으셔서 전혀 몰랐지요. 응급실 모시고 갔는데 입원도 안 하시고 같이 집에 오시겠다고 고집하시어 다시 모시고 왔는데 일하는 아줌마가 밥을 너무 안 잡수신다고 해서 미음 한 숟갈 잡수셨는데 그게 가래랑 섞여서 기도가 막힌 것 같았어요. 그거 보니까 참 겁나더군요. 기도가 막히면 호흡이 안 되는 거지. 그런다면 돌아가시겠더군요. 산소 공급이 5분 지나면 너무 늦은 상태가 되죠. 사람의 목숨이란 게 참 허망하죠. 한 순간에 가시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아 하고 넘어지셨고 그 뒤로 계속 의식이 없으셨으니까 고통 없이 가신 거죠.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셨는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셨다는 것, 그게 그나마 위로가 돼요.( 강현국 편 우리 어느 둑길에서 디시 만나리<학이사>2019, P.230)

 

이렇게 김 시인은 의식 없이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필자는 상경하여 병실로 갈까 했으나 혹시 안정될지 모른다는 주위의 실낱같은 희망을 위안 삼아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런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의 학부 제자인 최라영 평론가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춘수의 무의미시 연구(2002.7 논문 통과)로 박사학위를 받아 그 논문이 책으로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함께 병실을 방문하기로 하고 상경하였다. 최 비평가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김 시인을 몇 차례 만났고 200211일 대한매일( 서울신문이 한 동안 이 명칭으로 발간됨)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김 시인의 시집 들림, 도스토옙스키(민음사,1997)를 텍스트로 하여 산홋빛 애벌레의 날아오르기-김춘수론으로 당선되어 김 시인을 기쁘게 하였다. 병실을 최 평론가와 함께 방문하니 김 시인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병실은 큰따님 김영희 여사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 최 평론가를 소개하고 찾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는 가져간 논문을 김 시인의 머리맡에 두고 선생님 저가 왔습니다. 최라영 평론가가 박사학위를 받아 그 논문을 가지고 함께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되돌아오지 않는 필자 혼자만의 말이었지만 혹시나 들을 수는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한 말이었다.

김 시인의 병상을 자주 찾아간 시인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만년의 김 시인을 아버지처럼 모신 류기봉 시인과 마지막 제자로 알려진 심언주 시인이 있다. 심언주 시인은 충남 아산 출신 초등학교 교사로 2004년 봄 김 시인이 추천하여 현대시학으로 데뷔한 시인이다. 심언주 시인은 김 시인의 병실을 방문한 날에는 그 사실을 꼬박꼬박 일기에 남겼다. 그 가운데 일부를 20052월호 현대시학추모특집에 그리움으로 남은 꽃이라는 제목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일부를 다음과 같이 발췌해 보았다

 

200484; 저녁을 먹는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쓰러지셨다고, 의식불명상태시라고 했다. 87; 무척 긴장이 된다. 증세가 좀 회복된 듯한 느낌에 모두들 들떠 있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고 계셨기 때문이다. 816;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니 조영서 선생님께서 와 계셨다. 지난번에는 너무 섭섭해 혼자 우셨다고 한다. 826; 류기봉 시인의 포도밭예술제가 있는 날이다. 함께 가기로 했는데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저 기지개만 켜실 뿐……923;큰 아드님과 따님 내외분께서 와 계셨다. 요즈음엔 병실을 나올 때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말로 선생님과의 일방적인 대화를 한다.1122; 11월 중순 이후 선생님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간다. 부어 오른 손등의 상태가 마치 고무장갑에 공기를 빵빵히 채운 모습을 연상케 한다.1125;선생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다. 생신날인 줄도 모르시겠지. 오늘은 큰 따님께서 많이 우신다. 생신날인 줄도 모르고 병원에 누워계시는 선생님. 지금쯤 한려수도를 향해 긴 걸음을 옮기시는 거나 아닌지……케익에 촛불도 켜드리지 못하는 우리는 모두가 우울하다. 1127; 저녁에 선생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늘 저녁을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1129:1교시 학교 수업 도중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께서 9시쯤 운명하셨다고, 큰 따님과 둘째 따님 곁에서 무척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한다. 왼쪽 오른쪽을 한 번 돌아본 후 아주 맑은 모습으로 가셨다 한다.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서둘러 상경하여 1130일 오후부터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의 영안실 밖의 문상객 접견실에서 밤늦게까지 머물렀다. 필자와 일행으로 함께 한 시인들로는 권기호 교수를 비롯한 권국명, 양채영, 박청륭 이진흥 등 주로 김 시인이 추천한 시인들 가운데 나이가 60을 넘긴 측이었다. 도광의 시인은 김 시인의 추천을 안 받았으나 경북대 문리대 국문과 직계 제자였기 때문에 함께 했다. 그리고 뒷날 아침의 영결식 참석과 장지인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로 같이 가기 위하여 그 근처 여관에서 합숙하면서 김 시인과 얽힌 이야기를 밤새 나누었다.

1129일 이후의 TV 방송과 20041130일 이후의 경향 각지의 신문들에 김 시인의 죽음이 보도기사와 함께 특집 기사로 앞 다투어 다루어졌다. 특집 기사와 추모사, 추모시 등의 제목과 집필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2004.11.30.);김광일 기자 꽃의 시인 영원한 꽃되다

동아일보(2004.11.30.);허문명 기자 불멸의 지상에 남기고와 유종호 평론가의 추모 사 시로 쓴 이미지 음악하늘에 울리소서게재

중앙일보(2004.11.30);신준봉 기자 의 참뜻 깨우쳐준 순수시의 대가

한국일보((2004.11.30.);최윤필 기자 술어적述語的 세계서 어미적語尾的 세계로와 함께 김종해 시인(그 당시 한국시인협회 회장)의 추모시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가게재

서울신문(2004.11.30.) 황수정 기자 꽃의 시인영원 속으로 지다

경향신문(2004.11.30.);조장래 기자시단의 꽃천상의 품으로

국민일보(2004.11.30.);박서강 기자 꽃의 시인하늘 꽃밭으로 떠나다

문화일보(2004.11.30.);최현미 기자 김춘수 원로시인 별세-향년 82와 함께 노향림 시인 추모사 위대한 의 시인 열정작품 영원히게재, (2004.12.1.); 심언주 시인 추모사 국화꽃 잎 날개 달고 날아가시는 선생님게재.

한겨레신문(2004.11.30.);최재봉 기자 탈관념탈역사무의미시한국 모더니즘 정점으 로

 

이 기사들은 이기철 시인이 그의 은사이자 시인이고 아동문학연구의 대가였던 이재철(1931-2011) 교수로부터 생전에 받은 자료로서 그의 저서 김춘수의 풍경(2021,<>문학사상,PP351-353)에 일부를 언급하고 있기에 필자가 이 시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추석연휴인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사진으로 촬영하여 받은 자료이다. 사실 필자는 인터넷으로 이 자료들을 볼 수 있으리라 싶어 여러 사이트에 들어갔으나 1998년까지의 기사와 2013년부터의 기사는 네이버와 한국언론진흥재단 사이트에서 검색이 가능하였으나 2004년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기철 시인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서울에서 그 당시 나오는 일간지 가운데 세계일보기사가 빠졌다. 그런데 필자는 2004124세계일보의 청탁을 받아 시인 불멸의 꽃이 되다라는 재목으로 200자 원고지 10매의 글을 필자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기고하여 회고한 바 있다. 따라서 서울의 일간지에는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김 시인의 죽음을 크게 다루었다.

이 일간지들 외에 인터넷에 검색된 기사로는 매일경제(2004.11.29.)김춘수 시인 꽃처럼 지다, 통영 지역신문인 한산신문(2004.8.6.)김춘수 시인 위독등과 대구일보매일신문기사도 부분적이지만 보인다.

TV방송의 경우 다행히 네이버 검색을 통하여 세 군데 검색할 수 있었다. KBS의 경우 2004112910시 뉴우스에서 앵커의 꽃이라는 시로 한국시단을 대표해온 김춘수 시인이 오늘 별세했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김진희 기자가 육성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유족 김영희 여사의 간단한 인터뷰도 있고 20017월에 한 김 시인의 인터뷰 시라도 안 쓰면 나는 배겨낼 수가 없다는화면도 삽입되어 있다.

MBC의 경우 저녁 뉴스데스크에서 앵커의 한국 시단의 원로 김춘수 시인이 오늘 향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은 한국의 대표 시인이었습니다.’라는 멘트 다음으로 김 시인의 대표작 이 낭송되면서 김성우 기자의 육성으로 시작 경향과 문제작을 언급하고, 김 시인이 생전의 인터뷰(1989) 화면도 두 장면 등장하고 있다. 이건청 시인은 뉴스 중의 인터뷰에서 투철한 실험의식과 시인 정신으로써 꾸준히 시작에 임한 그런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던 시인이었다. 이런 점은 우리 한국시가 본받을 바라고 생각을 한다.”라고 하고 있다.

SBS의 경우도 8시 뉴스에서 앵커가 ‘‘의 시인으로 유명한 우리 시단의 원로 시인 김춘수 시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라는 멘트에 이어 이정은 기자가 테마기획으로 취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만년에 김 시인을 모시고 여러 모임을 다녔던 조영서(1932-2022) 시인과 큰 따님 김영희 여사의 인터뷰도 삽입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시 사상 이렇게 시인의 죽음이 각종 언론 매체에 주목받은 것은 김춘수 시인이 처음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19469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본부가 해방1주년기념으로 부산에서 발간한 사화집 날개에 처녀작 애가哀歌를 발표한 때로부터 2004123일에 발간한 유고시집 달개비꽃에 수록된 작품들까지 신문지상과 방송 인터뷰 등에서 언급한 대로 죽을 때까지 그는 현역시인이었다. 60년에서 1년이 모자라는 59년 동안 그는 시 쓰기와 시론과 비평 그리고 산문쓰기에 매달린 시인이었다. 김종길(1926-2017) 시인이 마산 MBC TV 추모다큐 <시인 김춘수-바다로 간 처용>에서 언급한 대로 가장 예술가적인 시인이자 전문적인 시인이었다. 그리고 김 시인을 떠나보낸 그를 아끼고 그로부터 시를 배웠던 우리 모두는 1952625 전쟁기에 본래의 건물은 육군병원으로 징발당하고 판자집 가교사였던 마산고등학교에서 16개월 동안 국어과 교사로 같이 근무한 김남조 시인이 앞의 다큐에서 언급한 대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지붕이 벗겨진 집에서 사는 허전함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2004121일 아침 우리 일행은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영결식장의 앞 벽에는 <大餘 金春洙 先生 詩人葬>이라는 프랙카드 밑에 2004121일이라는 날자만 적혀 있었다. 10시에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사회는 이수익 시인이 맡았고 주요연보를 조영서 시인이 낭독하고 이어서 김 시인의 생전유성녹음이 청취되었다. 그리고 류기봉 시인과 박정남 시인이 대표시 처용단장을 낭독하였다. 조사는 김종길, 정진규 시인이 하였다. 그리고 김종해 시인과 심언주 시인이 조시를 낭독하였다. .

모두가 서울시인 중심이라 사실 경북대학교 제자 우리로서는 다소 서운했다. 그러나 경북대 제자인 박정남 시인이 울먹이며 시를 낭송하자 식장이 숙연해 져서 다소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의 글을 쓰면서 통영의 예술의 향기 대표 박우권 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온 마산 MBC 추모다큐를 털어보니 영결식의 끝머리에 헌화를 하는 사람들이 촬영되어 있었다. 김종길, 김남조, 김종해 시인 그리고 여류시인 두 사람 다음으로 권기호 시인과 필자가 국화 송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래서 제자로서의 도리는 어느 정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결식을 끝내고 영정의 뒤를 따라 영결식장을 나선 우리는 대기한 버스에 올라 경기도 광주공원 묘지로 갔다. 그 날의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추위는 없었으나 햇볕은 나지 않고 다소 흐렸다. 묘역에 도착하니 바로 옆에 1999년 작고한 사모님 명숙경 여사의 묘비가 깨끗한 자태로 김 시인을 마지하고 있었다. 하관식에 필자의 순서가 되어 삽으로 시토를 하였다. 세 번하는 것이 관례인데 슬픔 때문에 한 번 하고 물러났다. 그런 후에 어떻게 서울로 돌아와 부산으로 내려왔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 시인의 장례식이 끝난 후 비록 언론처럼 신속성은 없었으나 각종 문예지 20051월호에는 여러 모양으로 김춘수 시인 추모 특집을 마련하였다. 현대문학,문학사상, 현대시,그리고 현대시학1월호와 2월호에 걸쳐 대형 특집을 마련하였다. 필자가 추모의 글쓰기에 참여한 잡지로는 그 당시 대구에서 발간된 생각과 느낌이라는 계간지 2005년 봄호가 있다. 거기에는 대구의 제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 필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기획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 시>에는 김열규, 양왕용, 권국명, 도광의, 장윤익, 이하석, 이태수, 박정남, 홍영철, 노진화(생각과 느낌발행인).박미영 등 여러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필자는 에리꼬로 가는 길을 선정하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국민 애송시 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2004년 계간 시인세계가 시인 246명에게 물은 가장 좋아하는 시의 결과는 1위였으며 2위는 윤동주의 서시, 이어서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서정주의 자화상등이었다. 그리고 12년 전 명일동 김 시인 추모행사에서 이미 랩으로 불리워졌으며, 최근에는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인기그룹 방탄소년단(BTS)의 곡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 변주되어 등장하고 있는 사실로 화제가 되었다.

기획 <나와 김춘수 그리고 추억>에 참여한 문인들은 양왕용, 권국명, 장윤익, 이하석, 박청륭, 박정남, 홍영철, 박미영 등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단호하게 그리고 인정스럽게 사신 그대라는 글을 썼다. 마지막 기획 <김춘수론>인데 여기에 권기호, 이진흥 두 시인이 참여하고 있다. 물론 필자가 미처 못 본 많은 문예지가 추모특집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글들을 모두 수집하는 것은 앞으로 후학들이 해야 할 일이다.

 

끝으로 통영시 측에서 김춘수 시인 탄생100주년을 맞아 김춘수 시인의 생가 구입을 서둘러 줄 것을 소망한다. 최근에 초정 김싱옥(1920-2004) 시조시인의 생가는 구입하여 문화재로 등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생가의 현재의 소유주도 과거와는 달리 통영시만 나서면 매도할 의사도 가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새로 선출된 통영 시장은 건축학도 출신으로 과거의 시장들에 비하여 손색없는 문화예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도 들었다. 김 시인의 100세 생일인 금년 1125일 전 생가구입의 구체적 논의라도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유족들이 타도시가 아닌 통영시에 유품을 기증한 것은 김 시인의 생전의 고향에 대한 애정도 감안했겠지만, 통영 행정기관과 시민들의 김춘수 시인 사랑의 열정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하루빨리 생가 터에 <김춘수문학관>이 건립되어,<김춘수유품전시관>에 임시로 전시된 것들을 옮기고 김춘수 문학 연구의 체계화와 지속성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김 시인이 탄생한 1125일부터 서거한 1129일까지 <김춘수문학제>가 마련되어 해마다 초겨울이지만 따뜻하기만 한 통영으로 김춘수 시인을 사랑하고 그의 불후의 명작 을 애송하는 남녀노소가 몰려들기를 소망한다.

 

*양왕용;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 독교작가회의 한국 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