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작성일 : 2023.10.05 12:10
명절 민심 잡기 유감
/윤일현
“정치가 명절도 삼키는가 보다. 정치 과잉을 실감한 추석이었다.” 고향을 다녀온 어느 친구의 말이다. 형제자매, 일가친척이 만나면 그 무엇보다도 우선 반가워야 한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어떻게 지냈는지, 못 보는 동안 특별한 변화는 없었는지 등을 물어야 한다. 지금은 다르다. 정말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형제간이라도 조카들의 취업이나 결혼 문제 등을 꼬치꼬치 캐물으면 안 된다. 가족 친척끼리 당연히 주고받아야 하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니 대화는 자연적으로 정치나 경제 문제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경제에 관한 이야기는 “젊은 애들 취직이 갈수록 힘이 든다. 금리는 계속 오를까? 집값은 어떻게 될까?” 등 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그친다. 경제 문제는 대개 진전된 논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듣고 읽은 정보로는 자기주장을 고집하기가 어려운 전문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 형식적 대화가 오가고 나면 자연스럽게 정치문제로 넘어간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언성이 높아지고 한 치 양보 없는 격론이 벌어진다. 정치에 대해서는 누구나 일가견을 가진 전문가다. 정치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세상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은 정치로 귀결된다. 정치가 상호 양보와 타협을 통한 공동체의 발전에 순기능으로 작용하지 못하다 보니 일반 국민도 정치적 견해 때문에 서로 대립하다가 서먹서먹해진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팬덤의 극단적 언행이 여의도 정치판을 흔들고 있다. 열혈지지자들은 편향적인 유튜버나 다양한 비정규 매체들과 결탁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악마화한다. 그들은 가족 친지조차도 동지와 적으로 나누면서 비난하고 공격한다. 사람을 잃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 문제로 얽히거나 종교적 논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종교 자리에 정치를 넣어야 한다. 정치가 미풍양속을 해치고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의 탈법과 불법 행위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한다. 우리 정치인들은 눈에 빤히 보이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한다. 자기의 잘못을 덮기 위해 국민을 갈라치기 하여 서로 대립 반목하게 하는 것이 일상사가 됐다. 그들은 후안무치와 적반하장의 끝판왕이다. 그들의 안중에 민생은 없다. 정치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진행해야 할 입법이 지연되거나 실종되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여론조사와 지지층의 반응이다. 어느 정당이나 ‘명절 민심 잡기’에 총력을 기울인다. 명절 기간에 ‘우리는 항상 옳고 상대는 무조건 나쁘고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란 사실을 주입하고 홍보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전 국민을 정쟁으로 끌어들여 가족 친척도 막장 이전투구에 동참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빈말이라도 ‘이번 명절에는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고, 골치 아픈 정치 논쟁 따위는 하지 말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부모 형제들과 힘겹던 옛날을 회상하며, 가족애를 확인하는 귀한 시간 가지십시오.’라고 할 수는 없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 유럽인은 자유를 선고받는 대신, 고향을 상실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린 시절, 시골 고향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은 관찰과 평가의 대상이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생활의 침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울타리가 튼튼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은 강하게 가질 수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에는 어김없이 마을 대항 릴레이 경주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행사가 많아 사람들은 그때마다 혈육에 준하는 동질감과 단결심을 가졌고,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는 울타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 든든했다. 타지를 떠돌며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곳, 그 느낌, 그 손길, 그 충만함 등은 잊지 못한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농촌 인구의 절대다수를 도시로 이주하게 했다. 바쁜 일상에서 도시인들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불문의 미덕으로 간주하게 됐다. 익명의 바다에서 현대인이 얻게 된 자유는 이렇게 고향을 상실한 대가로 획득한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우리에겐 따뜻한 인간애, 절대적인 휴식과 안식의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정치가 그 최후의 보루를 파괴하고, 존재의 우물을 오염시키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한다.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