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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평전 24- 서울시절3> 공직에서 물러나 만년을 보낸 명일동 시절

작성일 : 2023.10.05 12:07

<김춘수평전 24- 서울시절3>

 

공직에서 물러나 만년을 보낸 명일동 시절

-김춘수 시인의 서울 시절(3)

 

양 왕 용

 

 

김춘수 시인의 서울살이는 19814월 제11대 국회의원이 되면서 부터이다. 갑자가 시작한 서울살이라 미처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국회의 등원을 시작했고 1982년에 잠원동 대림아파트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1986년 강동구 명일동 우성아파트 9506호로 옮겨가기 전까지 살았다. 그곳에서 지질연구소(현재의 지질자원연구소) 연구원인 둘째 아들 김용욱(1950-)과 함께 살다가 19831월 초에 둘째를 결혼시켜 개포동으로 분가시켰다. 그 당시 이미 1980년 대구에서 결혼한 큰 아들 김용목(1948-)은 분가하여 독립하였고 막내 김용삼(1952-2016)은 이태리 유학 중이었다. 집에는 1983년부터 부인 명숙경(1926-1999)여사와 두 사람만 사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 강동구 명일동으로 옮아가 살다가 1999년 초에 부인 명숙경 여사의 위암이 발병하자 명일동 아파트는 전세를 주고 강남구 대치동 큰 딸 집 근처의 셋집으로 옮긴다. 2년 후인 2001년 아파트를 처분하면서 대치동에서 분당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1999년 명일동을 떠났으나 아파트를 처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일동 시절을 1986년부터 2001년까지라고 볼 수 있다. 명일동 시절을 어떻게 설정하던 서울에서 가장 많이 머문 공간은 강동구 명일동 우성 아파트였다. 우성 아파트 풍경은 덕성여대 국어국문학과와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이미 30대의 나이로 중견 직장인이 된 김 시인의 두 손녀 유미(1983-) 유빈(1990-) 두 자매(둘째 아들 김용욱의 딸)가 대학 졸업 직후와 고등학생 시절에 쓴 책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바다(2008,위즈덤하우스)에 있는 명일동의 추억(김유미,앞의 책 pp22-34)에서 손녀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얽힌 추억과 함께 잘 나와 있다. 그 가운데 김 시인뿐만 아니라 김유미 양에게도 명일동이 어떠한 의미 있는 공간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다음의 글이다.

 

명일동이란 나에게 있어서 참 남다른 곳인데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15년 가까이 사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관련된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이 거의 다 이곳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할머니가 암 선고를 받자 할아버지는 큰고모댁 근처에서 사시기 위해 대치동으로 이사하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또다시 분당으로 이사하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분당에서 사셨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 할아버지 댁은 오직 명일동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셨던 명일동의 동네 모습 이곳저곳은 아직까지도 한 곳 빠짐없이 눈에 선하다. 아파트 통로를 나오면 왼편에는 현중(1984-, 큰 아들 김용목의 아들)이와 내가 함께 놀았던 작은 놀이터가 있다.---중략한편 통로에서 오른쪽으로 약간만 걸어가면 나무로 둘러싸인 낡은 분홍색 건물의 유치원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은새유치원이었다. 그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에 아주 자그마한 놀이터가 있었다. 그 놀이터에는 그네도 없고, 시소도 없고 오로지 미끄럼틀만 두 개 있었다. 평소에는 그 놀이터에서 은새유치원의 원생이 놀았겠지만 현중이와 내가 할아버지 댁에서 노는 시기가 거의 방학 때였기 때문에, 그 유치원도 방학이어서 유치원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곳은 늘 우리 둘만 노는 그런 곳이다.(김유미, 앞의 책22-26)

 

김유미 양뿐만 아니라 김 시인의 서울살이에서 가장 유의미한 공간은 명일동이다. 유미 양의 글에는 자상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문방구에서 손녀와 손자의 장난감을 사주고 쇼핑센터 일식집에서 같이 밥을 먹기도 하였다. 명숙경 여사가 돌아가고 나서 일식집에 갔더니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주인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는 김 시인의 모습도 나와 있다. 그리고 유미 양이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찾아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산책하시던 길, 할머니 손잡고 은행에 다녀오던 길, 쇼핑센터 등을 찾아가 그 동안 변하지 않은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이러한 명일동에 시인김춘수길이 생겼다. 그 경위에 대하여 2012.5.24. 03:05에 입력한 조선일보 양승식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 강동구 명일동 우성아파트, ‘의 시인 김춘수가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지난 20일 오후 이 아파트단지 원터근린공원에서 만난 김 시인 손녀 김유미(29)씨는어릴 적 할아버지와 같이 거닐던 길이예요. 손녀에게 당신의 시를 이야기하시곤 했죠라고 말했다. 김 시인은 이 공원을 거닐며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라는 명일동 천사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강동구는 김 시인이 2004년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6년부터 2001년까지 15년 동안 명일동에 살면서 이 지역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점을 감안, 이 일대에 김춘수길을 만들고 기념판도 세워 노 시인과 명일동의 관계를 되새기기로 했다. 김 시인의 16번째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는 소소한 명일동 풍경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지난 14-19일 열린 ‘2012 강동북페스티벌행사에서는 김춘수 추모행사가 열려 그의 대표작 을 가사로 쓴 랩 노래가 선보이고, 시인의 손녀 김씨와 동네친구였던 민용태(69) 교수가 꽃을 위한 서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김 시인의 제자인 류기봉(47) 시인은 매일 아침 부인과 함께 명일동 숲을 거닐던 고인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김 시인은 평생을 함께한 아내 명숙경(73) 여사와 1999년 사별하고 2001년 분당으로 이사 그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했다. 이해식 강동구청장은 김 시인과 관련한 지역 명소를 계속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벌써 10년 전의 기사이다. 이러한 강동구 명일동을 직접 탐방하고 류기봉 시인과 함께 그 숲길을 거닐어 보기로 약속했으나 코로나 19로 인하여 결행을 못하고 있다. 코로나가 잠잠하는 가을이면 10년 전에 강동구청장이 한 약속을 얼마나 지켰는가를 확인도 할 겸 김 시인의 서울살이 하던 공간과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의 묘소도 참배하여 볼까 한다. 김 시인의 큰 딸 김영희 여사에 의하면 류기봉 시인은 일 년에 네 차례 김 시인의 묘소에 간다고 한다. 2004121일 안장식 때에 시토하면서 슬픔 때문에 세 번해야 할 삽질을 한번 밖에 못한 필자로서는 류기봉 시인의 정성에 정말 부끄러울 뿐이다.

류기봉(1965-)시인은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30여년간 아버지와 함께 포도농사를 짓는 시인이다. 그리고 1998년부터 9월 첫째 주 토요일이 포도나무 1500그루의 첫 수확이 임박하면 포도나무에 시 몇 수 걸어놓고 포도밭 예술제를 한다고 한다. 1998-99년에는 류기봉 포도밭 시와 그림전도 개최하였으며 시집으로 포도 눈물(2005) 산문집포도밭 편지(2006),삼인시집 푸른 손금의 페르소나(2021)등이 있다.

앞에 인용한 김유미, 김유빈 자매의 산문집에서 류 시인은 현대시학주간을 지낸 정진규(1939-2017) 시인과 함께 격려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유미 양의 글 류기봉 선생님과의 추억(앞의 책 pp50-55)에는 김 시인을 방문할 때의 류 시인의 인상과 김 시인 내외와 류 시인 그리고 유미 양이 막 중학교에 입학하였을 대에는 23일 춘천 강연회 나들이에 함께 했다는 사실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리고 명숙경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장례식장을 지켰으며, 김 시인이 홀로 된 후에는 자주 할아버지 집에 들려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김 시인이 쓰려지셨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에도 식구들 사이에 충혈된 눈의 류 시인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김 시인의 장례식장에도 당연히 언제나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결같이 서 있었다고 한다. 20041130일부터 출상할 121일까지 장례식장을 지킨 필자와 한 공간에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상경의 기회가 있으면 김 시인의 큰 딸 김영희 여사와 류 시인을 함께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기세가 꺾이지 않는 코로나 19 때문에 (사실 필자는 지난 4월 상경 길에 예방접종 3차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감염되어 기관지에 기저질환이 있어 급하게 음압병동에 들어갔으나 폐렴초기까지 진행되어 일 주일 동안 집중치료를 받은 뒤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상태이다.) 전화로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를 직접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90년대 초 저가 관계하는 문학모임의 행사에 김 시인을 초청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저의 승용차로 남양주, 가평, 양평 등 주로 북한강변을 따라 3-4시간 드라이브를 한 후 풍광 좋은 찻집에서 차 한 잔 한 후 서울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런 후 시를 보여주게 되어 1993현대시학에 추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전으로 이사 간 둘째 아드님 댁으로 유미, 유빈 두 손녀 만나려 가는 길도 여러 번 모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2년 전에는 조영서(1932-2022) 시인, 서정춘(1941-) 시인, 노향림(1942-) 시인 세 시인과 함께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도 가졌습니다.

 

사실 이러한 인연은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이 예사로워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이다. 유미 양의 글에서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부자지간의 혈연으로 맺어진 것 이상의 관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류 시인과 김 시인의 머무는 공간이 가깝고 류 시인이 시간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김 시인의 만년의 제자복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88년 방송심의위원장을 그만 둔 후부터 김춘수 시인은 공직생활을 그만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나이도 66세로 대학에 있었다고 해도 정년할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 쓰기와 산문쓰기는 공직에 있을 때보다 훨씬 왕성해진다. 이 시기인 19884월에 펴낸 그의 제10시집 라틴점묘 기타(1988.4, 탑출판사, 신국판 변형 100)는 그의 시집 가운데 유일한 여행이 제재가 된 시집이다. 그는 1981년부터 시작한 공직 생활 가운데 해외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그 때의 여행은 시적 제재가 되지 않았다. 이 시집의 제재가 되고 있는 여행은 1986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세모에 다녀온 짧은 여행이라고 이 시집의 서문격인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 시집에는 프랑스(<드골 공항에서 오를리 공항까지>)를 거쳐 스페인(<스페인소묘>)과 그리스(<그리스소묘>)를 여행한 여정이 펼쳐지고 있다. 짧은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제재가 된 까닭을 앞의 글에서 오래 전부터 라틴문화권에 대한 동경과 흠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집은 스페인 기행이 주가 되고 그리스와 프랑스는 조금 곁들인 정도였다면서 앞으로 보완하여 여행시집을 한 권 엮겠다고 하고 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집을 내고 꼭 1년만인 19904월호 현대문학처용단장<3><4>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처용단장<1>의 연재는 현대시학창간호인 19694월호에 시작하여 중간에 잠간 쉬고 난 뒤에 <2>를 역시 현대시학에 연재하여 1970년대 초반에 중단한 상태로 있었다. 평단과 학계에서는 장시 처용단장을 본격적인 무의미시라고 보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최라영 평론가의 처용연작연구(최라영 김춘수 시 연구,2014,푸른사상, pp13-46)가 있다. 그런데 근 20년이 지난 19904월호에 처용단장<3>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11월호에 마치고는 한 호도 쉬지 않고 19912월호부터 <4>를 시작하여 6월호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부는 이미지 중심의 유년시편이라고 볼 수 있으며 2부는 이미지보다는 리듬 즉 불규칙한 반복에 의지하는 시편들이었다. 3부와 4부는 청년기의 일본감방체험과 유년기 혹은 청장년기의 독서체험과 일상체험이 혼재해 있고 부분적으로 해체시적 경향도 보였다. 처용단장을 비롯한 그의 무의미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도 있다.(<박덕규·이은정 편저 김춘수의 무의미시,2012 ,푸른 사상 총458>에는 앞의 최라영의 글을 비롯한 17편의 글이 편집되어 있음) 이렇게 쉬지 않고 장시를 완성시켰으며, 20047월까지 19회에 걸쳐 34편의 작품을 현대문학에 발표한다. 그리고 19911015일에는 장시처용단장만 편집된 제11시집처용단장(신국판176)을 박의상 (1943-)시인이 운영하는 미학사에서 7순 기념으로 내고 있다. 그 시집의 말미에는 산문들 장편 연작시 <처용단장> 시말서,그 때 여름그 여름의 바다,시인이 된다는 것, 자유,, 역사는 어디 있는가?가 수록되어 있다. 장시 처용단장만으로 한 권의 책으로 엮기는 부족한 분량 탓으로 수록된 산문들이었겠지만 그 가운데 장편 연작시 <처용단장> 시말서<1960년대 후반에서 1991년까지의 나의 시작 주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글로 장시 처용단장뿐만 아니라 그의 무의미시 이해와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될 긴 산문으로 민음사 판 김춘수시전집(1994,신국판, 553) 말미와 이남호 교수가 편집한 김춘수 문학앨범(웅진출판, 4×6298)에 재수록 되어 있다.

이 시기에 김 시인이 한 작업 가운데 의미 있는 것 하나는 그의 두 번째의 시 이론서 시작법을 겸한-시론(1961, 문호사 4×6판 세로 쓰기 220)의 전면적인 개정판을 낸 것이다. 이 책은 신문예19596월호부터 19602월호까지 연재한 시 어떻게 읽고 어떻게 지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경북대학교 전임강사 발령을 받고 난 직후 급하게 대학 학부의 교재용으로 대구의 출판사에서 낸 한국 최초의 시작법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198910시의 이해와 작법(고려원 신국판 282)으로 전면적인 개정판을 낸 것이다. 체재도 가로쓰기로 바꾸었고 표현도 30년 전과는 달리 많은 부분을 바꾸어 새로운 세대가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개정하였다. 1999년에는 이 책을 다시 출판사를 자유지성사로 옮겨 출판하고 있다. 이렇게 김 시인이 시작법에 관한 저서를 30여년에 걸쳐 개정증보판을 내고 있는 까닭은 이미 앞에서 필자가 밝힌 대로 시작법의 중요성 탓도 있겠으나 김 시인의 시세계가 작고할 때까지 변하고 실험정신이 충만한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 시작법에 대한 생각 역시 변하고 보다 보충되어 왔다는 것을 번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 시인은 1980년대 말부터 정진규(1939-2017) 시인이 주간으로 책임지고 출판하던 현대시학과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시와 시에 대한 산문을 발표하였다. 정 시인은 김 시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생전에 나는 선생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아 그 복을 마냥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관계하는 시 전문지 현대시학의 큰 기둥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싶어 내가 사전을 뒤적여 찾아낸 기숙’(耆宿 나이 들어 덕망과 경험이 높고 깊은 사람)이라는 말로 선생님을 호칭하고자 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마다하지 않으셨다. 다만 너무 이름이 호사스럽구먼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우리 현대시학기숙으로 늘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때로는 따뜻했고 때로는 호된 꾸짖음도 주셨다. 선생님은 참으로 우리 시를 사랑하고 시의 위의를 지키시는 우리 시단의 유일한‘ ’기숙이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현대시학이 한때 너무 많은 신인을 배출하자 선생님은 시가 무슨 돗데기시장처럼 헤퍼서야 말이 되느냐고 무섭게 꾸짖으셨다. 선생님 말씀대로 곧 자세를 바로 하여 현대시학은 오늘날까지 많은 시인들이 신뢰하고 선망하는 지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유미,김유빈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바다<예담,2008 정진규, 격려사>)

 

정 시인은 김 시인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20041129일부터 121일 장례 기간에 특별한 역할을 했다. 김 시인의 신인남발에 대한 무섭게 꾸짖은 것은 오늘날 양산되는 신인에 대한 경종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시인과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현대시학에 발표한 만년의 글로는 일종의 한국현대시사에 대한 단상이라고 볼 수 있는 <시의 위상>이라는 제목으로 1에서 55까지 일연번호가 부여되어 20회 연재한 글이다. 이 글은 연재가 끝나자 말자 황근식(1952-) 시인이 경영하는 도서출판 둥지에서 시의 위상(1991.3.11.신국판 268)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 면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이 필자를 안타깝게 한다.

 

지방에서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의 업적이 관심에서 소외되고 잇는 경우가 있다. 일반 저널리즘은 두말할 것도 없고, 문학 저널리즘까지가 그들의 관심 밖으로 돌리는 일이 흔하고, 평단도 그렇다. 이 땅의 문화가 부피를 못가지고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 기회에 내가 그 시적 성과를 눈여겨보아 온 지방 거주의 시인들을 몇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혹 무슨 암시나 자극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강현국, 권국명, 권기호, 박청륭, 엄국현, 양왕용, 양채영, 이구락, 이진흥, 이태수 등이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비평)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하겠다.

 

열거한 시인들의 여섯 사람은 그가 추천하였거나 데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경북대학교 출신들인데 이들을 입학연도별, 출신학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권기호(56,국어국문학과),권국명(60,국어국문학과),양왕용(63,국어교육과),강현국(68,국어교육과),이구락(69,국어국문학과),,엄국현(72,국어국문학과) 순서이다.

타교 출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일 맏형은 양채영 시인이다. 그는 1964문학춘추에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초회추천을 받았으나 곧 잡지 발간이 중단되어 19651월호 시문학2편의 작품으로 완료추천된 김춘수 시인 추천 1호 시인이다. 박청륭 시인은 계명대학 출신이나 1974-75년에 김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데뷔한 시인이다. 이진흥 시인은 서강대 출신이나 석사,박사 학위 지도교수로 김 시인을 모셨고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았다. 마지막 이태수 시인의 경우는 영남대 철학과 출신이나 김춘수 시인이 70년대 초반 추천하고 싶었으나 신동집 시인이 먼저 추천하였다고 하여 한동안 섭섭해 하였을 정도로 아끼는 시인이었다. 이태수 시인은 70년대 중반부터 매일신문사에 근무하였는데 집이 만촌동 김 시인 댁 근처라 자주 만났고 심지어 김 시인이 시내의 일본서적 전문서점에 나올 때에는 매일신문사와 가까워 영화관에 같이 가기도 하였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렇게 학교 제자로 혹은 추천한 인연으로 맺어진 시인들이었지만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시단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따로 언급하겠다고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00484일 기도폐색으로 갑자기 의식을 잃고 투병하다가 1129일 돌아가신다. 이 점이 필자로서 안타까운 것이다.

 

만년에 쓴 산문 가운데 의미 있는 것은 1997년 봄 일종의 자서전인 김춘수 자전소설 꽃과 여우(1997,민음사,국판249)를 발간한 것이다. 이것 역시 원구식 시인이 주재하는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1년 동안 연재한 것이다. 이 책도 1950년대에서 그치고 있다. 그래서 대학교수 시절과 그가 직접 <책 머리에>에서 사족처럼 추가하고 있는, 그 자신이 직접 언젠가 밝히고자 한 1980년대 정차참여에 대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약속을 못 지킨 미완의 책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만년에 1960년대부터 1991년까지 추구한 무의미시 지향성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슬픔의 정서가 짖게 이입한 말기시의 경향의 계기가 된 부인 명숙경 여사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에 관련된 시편들의 창작 배경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1999년 연초에 명 여사의 위암이 갑자기 발병한 것이다. 명 여사는 오래 전에 유방암을 앓았으나 건강하게 가정을 꾸려갔다. 특히 못하나 박을 줄도 모르고 문명의 이기에 대해 지나친 혐오감을 가져 가사에는 전혀 무관심이고 오로지 시와 산문 쓰기와 독서에만 매달리는 김 시인을 대신하여 가계를 꾸려가던 명 여사가 위암이 발병한 것이다. 위암은 치료가 가능한 암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발병위치가 치료가 불가능한 곳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큰 딸 김영희 여사는 회고하였다. 김 시인과 그 가정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발병하자 명 여사는 죽음을 예감하였는지 거처를 명일동에서 대치동 김영희 여사 집 근처에 세를 얻어 옮겼다. 그러다가 4개월이 된 45일 별세하게 된다. 김 시인에게는 정말 청천벽력이었다. 그 때부터 김 시인의 거처는 큰 딸을 근처에 마련되었다. 김영희 여사가 분당 선경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바로 앞 동으로 옮겨 큰 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명일동 아파트는 2001년에 처분하지만 1999년부터 대치동에 있다가 분당으로 옮겨 일 하는 아주머니는 두었지만 김 여사가 이침 저녁으로 찾아가 보살피는 생활이 2004년까지 계속되었다.

김 시인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내에 대한 시 쓰기로 달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제16시집 거울 속의 천사(2001,민음사 ,신국판 변형112)는 명 여사가 떠난 2년 동안의 시들로 편집되어 있다. 그의 시집 가운데 처음으로 <이 시집을 아내 숙경의 영전에 바친다>라는 헌사가 있으며 머리말 성격의 글은 없다. 대신 <후기>에 이 시집발간의 경위를 밝히고 있다. ’아내가 떠난 지 꼭 2년이 되었다로 시작하는 이 후기는 중간에 이 시집에 실린 여든아홉 편의 시들 모두에 아내의 입김이 스며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에 내 나이 올해 여든이다. 이런 나이에 이만큼 많은 시를 단시일(2)에 쓸 수 있었다니 믿기지 안 는다, 아내가 그렇게 이끌어 준 것이다.’라고 하여 후기 전체가 아내에 대한 헌사이다. <거울 속의 천사>는 릴케의 영향에 의하여 붙어진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집은 곧 2쇄에 들어가 김 시인을 기뻐게 하고 있다.(조영서;적막 속의 즐거움,강현국 편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2019,학이사 p115)

다음으로 생전의 마지막 시집인 제17시집 쉰한 편의 비가(2002,<>현대문학,신국판 변형,96) 는 헌사는 없으며 제목도 없이 <1번 비가>에서 시작하여 <42번비가><비가를 위한 말놀이 1-9>로 구성되어 있다. <책 뒤에>라는 글에서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패로디한 것이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김 시인 자신의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 점을 <책 뒤예>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1번과 2번에서부터 아내의 죽음의 그림자가 보여지고 있다.

이 시집을 내고 김 시인은 20041월 그의 마지막 전집인 김춘수 시전집(2004.<> 현대문학 신국판 1150)김춘수 시론전집 ,Ⅱ』(<>현대문학 신국판 661,542) 발간에 힘쓴다.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그 해인 200482세까지 시 쓰기와 산문쓰기에 매진한 시인 특히 시론과 비평 전개에 힘쓴 시인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 기독교작가회의 한국 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