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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9.24 12:56
<김춘수평전 23 –서울시절<2>>
방송심의위원장과 한국시협 회장 시절의 김춘수 시인
-김춘수 시인의 서울 시절<2>
양 왕 용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제12대 국회의원 임기를 채운 후에도 김춘수 시인은 대학의 책임자로 가기를 기대하였으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 동안 방송심의위원장으로 공직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그 당시의 방송심의위원회는 1981년 개정된 <언론관계법>에 의한 기구로 그 전신은 방송윤리위원회였다. 현재는 2008년 그 동안 변화된 방송매체들의 양상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 개편되었으며 여러 문제로 언론에도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1962년부터 방송윤리위워장으로 봉사한 사람들은 강원룡, 이숙녕, 이항녕, 윤석중 등 이름만 들어도 어떤 분들인지 알만한 분들이다. 그러다가 1981년 3월 7일 <언론관계법>이 개정되면서 방송위원회와 방송심의위원회가 설립되는데 이 두 기관은 서로 독립기관의 성격이 강하였다. 방송 정책과 방송의 허가와 취소, 재허가 등은 방송위원회 소관이었으나 방송의 각종 프로그램의 심의는 방송심의위원회에서 맡았다. 방송이 제도문화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문화적 측면에서 심의한다는 원칙 아래 *인권존중, *보도, 논평의 공정성 보장, *민족주체성 함양,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발, *아동청소년 선도, *가족생활의 순결, *공중도덕과 사회여론, *기타 등의 기준으로 보도, 교양, 연예, 오락, 광고 등의 프로그램을 심의하였다. 방송위원장은 장관급이고 심의위원장은 차관급이었으나 방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실질적인 일을 하는 곳은 심의위원회였다. 위원장으로는 중앙대 정치학 교수를 거쳐 서지학자의 특성을 살려 국회도서관장을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지낸 강주진(1919-1985)박사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수고했으며, 김춘수 시인의 바로 앞인 1985-1986년에는 조선일보 논설고문인 선우휘(1922-1986) 소설가가 수고하였다. 1986년 3월 선우휘 작가의 후임으로 김춘수 시인이 보임된 것이다. 1988년에는 언론관계법이 폐기되고 방송법이 제정되자 방송심의위원회는 방송위원회 산하기관으로 바뀌었다. 김 시인은 1988년 1년 동안은 바뀐 제도에서 심의위원장으로 일하였기 때문에 3년 동안 일하였던 것이다.
이 시절의 김춘수 시인의 일상과 모습을 자세하게 증언해준 사람은 최근까지 한국장로문인회 회장을 지낸 오성건(1939-) 시인이다. 오 시인은 1986-1988년 김춘수 시인의 방송심의위원장 시절 총무국장으로 김 시인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오 시인은 방송위원회 기획, 정책, 연구, 감사, 방송심의실장 등을 역임하다가 정년한 분인데, 그 당시 방송심의위원회는 오늘날처럼 방송회관이라는 독립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신문사 건물인 프레스센터 14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방송심의위원장은 비상근직이라 월급은 지급되지 않고 잦은 심의위원회 때마다 일정액의 수당이 지급되었는데 김 시인은 매회 지급받지 않고 월말에 한꺼번에 월급처럼 받아 가기를 원하여 그렇게 해드렸다고 오 시인은 회고했다. 김 시인은 매일 일정 시간에 출근하여 심의회가 없으면 책도 읽고 글도 쓰곤 했다고 한다. 시나 산문이 완성되면 오 시인에게 읽어보게 하고 의견을 물었으며, 신간 저서가 나오면 맨 처음 서명을 하여 받는 영광도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점심때에는 미식가인 김 시인을 따라서 강남의 좋은 음식점에도 자주 갔다고 한다. 오 시인은 그렇게 가까이 모시면서도 그 당시에는 김 시인이 대단한 시인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그가 나중에 수필과 시를 공부하면서 김 시인의 위상을 알게 되었고, 그 때에 김 시인의 글을 읽은 것이 알게 모르게 문인이 되는 자양분이 되었음도 깨달았다고 한다. 비록 방송심의위원장은 명예직이었으나 승용차가 제공되었고 문화예술계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각 분야의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그 위상은 대단하였다고 오 시인은 회고하였다.
필자도 1986년 3월부터 1987년 2월까지 1년 동안 국내교류 교수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김 시인을 자주 만났다. 언젠가는 김 시인의 사무실에 갔다가 나오다가 복도에서 그 당시 방송위원장인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고병익 박사를 만나 김 시인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그 당시 국제교류재단 임원을 지내는 성권영(1941-1986) 시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김 시인의 배려로 홍익대학교 정문까지 승용차로 가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있었던 일로 기억에 남는 일은 전재수(1940-1986) 시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전재수 시인은 김 시인이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자 가장 기뻐했으며, 김 시인이 한국시협 회장에 추대되도록 자기 나름으로 애를 쓰기도 했다. 1982년 10월 9일과 10일 양일간 부산에서 개최된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때에 서울에서 내려온 전 시인과 필자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 그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숭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거의 마치고 앞으로 대학교수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 이 무렵은 김 시인이 민정당 국회의원을 막 시작한 때였다. 앞에서 소개한 신규호 시인으로부터 들은 다른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국회로 전재수 시인의 김춘수 시인 사무실 방문 길에 신규호 시인이 따라나섰다는 것이었다. 신 시인은 비서실에 앉아 있고 전 시인만 김 시인 사무실에 들어간 한참 만에 안에서 갑자기 김 시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 당시 석사학위를 가진 전 시인이 김 시인에게 대학교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한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 시인이 “정 모 시인은 학사학위 그것도 전공이 다른 학위이지만 모교 국어국문학과 시론 교수로 있지 않는냐”고 하니까 김 시인이 대뜸 큰 소리로 한 이야기가 비서실까지 들렸다는 것이다. “니가 정 모 시인만큼 시를 잘 쓰느냐”고 반복하여 큰소리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전 시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울면서 김 시인의 말에 서운해 하는 전 시인을 달랜다고 신 시인이 애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전 시인은 김 시인의 이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동국대학교 국문과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하였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하여 고등학교는 그만 두고 학원 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동기로 그 당시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교수였던 오양호(1942-) 평론가의 주선으로 인천대학교에 주당 4시간의 강의도 하는 등 분주하게 지냈다. 1986년 늦가을로 기억된다. 전재수 시인이 늦은 밤 귀가 길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 밤새 아파트 문밖에 있었던 것을 뒷날 아침에 부인이 발견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필자는 홍익대학교 교류교수에 맡겨진 강의를 하기 위한 상경 길에 들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필자는 전 시인의 영안실로 문상을 하지 못했지만 들려온 소문으로 김 시인은 전 시인의 문상을 가서 홀로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아마 앞의 전 시인에게 모질게 한 말을 자책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김 시인은 제자들에게 때로는 단호했지만 때로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김 시인의 임기시절의 방송심의 가운데 눈에 뜨이는 것이 1987년 9월 5일 방송금지가요 500곡을 해제하였다는 기사이다. 금지가요 832곡 가운데 500곡이 해제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미자 가수가 부른 <동백 아가씨>와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 그리고 송창식의 <고래 사냥>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1987년 9월 5일 이전에는 이 노래들이 방송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방송심위원장 취임과 거의 동시인 1986년 3월 임기 2년의 한국시인협회 25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한국시인협회 50년사』(2007, 국학자료원 p347)에서 김유중 평론가는 김 시인의 국회의원 시절과 이 시기가 겹친다고 하고 있으나 사실은 살핀 것처럼 국회의원의 임기가 끝난 뒤였다. 다만 방송심의위원장 임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한국시협 회장이 된 것이다. 김 시인은 사무국장에는 서울대 교수인 오세영(1942-) 시인을 부탁하였고 사무차장으로는 김 시인의 대구 시절부터 인연이 있는 권택명(1950-) 시인이 수고했다.
이 시절의 김 시인의 모습은 오세영 시인의 회고기와 권택명 시인의 회고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오 시인의 경우 김 시인의 성격에서 탓일 것이라고 하면서 김 시인을 회장으로 모시기에 어려운 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새 회장이 부임하고 사무국이 구성되면 관례적으로 하는 첫 행사가 신구임원 상견례이다. 즉 전임회장단과 사무국 간사들 그리고 새 회장이 구성한 임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점심을 나누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환담하는 모임이다. 사무국장으로 임명된 나는 당연히 이 일을 준비하여 회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랬더니 회장님은 그 경비(회식비)는 누가 대느냐고 했다. 이제나 저제나 시인협회에는 경상비가 없었다. 그 모든 운영비는 회장이 책임질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회장님께 그것은 선생님이 알아서 하셔야 될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회장님은 화를 벌컥 내셨다. 회장이 돈 내는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드렸더니 이제는 당신은 회장을 하지 않겠노라는 것이다. 당신이 임명한 사무국장이 당신의 회장 사표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된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오세영;「나와 시인협회」<『한국시인협회50년사』,2007,국학자료원>, p476)
이러한 일이 있었지만 상견례도 마치고 김 시인은 2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했다. 물론 오세영 사무국장과 권택명 차장이 김 시인의 성격 탓으로 고생을 했지만, 사실 모든 단체의 운영이 회장이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며 요즈음은 한국시협이나 필자가 책임지고 있는 한국현대시협 모두 이러한 상태에는 벗어나 안정적으로 협회가 운영되고 있다.
김 시인의 그 당시의 경제적 여건은 국회의원 시절처럼 세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1981년 선임된 예술원 회원 수당이 고정적인 수입이었지 심의위원장으로서의 수입도 앞에서 언급한 심의수당을 한꺼번에 월급처럼 받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3남 용삼 군은 5년 동안 이탈리아 유학생으로 조각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비를 보내는 것도 상당히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권택명 시인으로부터 들은 김 시인의 회장으로서의 책무는 오 시인이 앞에서 피력한 것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세영 교수의 앞의 글에서도 권 시인은 사무차장이었지만 ‘명석한 두뇌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비할 수 없는 성실성 그리고 책임감으로 거의 사무국장을 대리해서 모든 일들을 명쾌하게 일을 처리하면서’(오세영; 앞의 글, 앞의 책 p475) 한국시인협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권 시인은 그 당시 외환은행 남대문 지점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남대문 지점은 대한상공회의소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방송심의위원회가 있는 프레스 센터와는 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 김 시인에게 불러 갔으며 점심 식사도 여러 번 같이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인세가 나왔다고 50만원을 주면서 협회 살림에 보태라고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김 시인의 회장임기 막바지인 1987년 8월부터 1988년 2월까지인 6 개월 동안 사무국장 오세영 교수가 미국 아이오아대학교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리를 비운 때에는 더욱 김 시인과 자주 대면하면서 사무국장 역할까지 하게 되어 더욱 많이 도왔다고 한다.
김 시인의 회장 임기 동안 유능한 사무국장과 사무차장을 둔 탓으로 한국시인협회는 어느 때보다 많은 일들을 했으며 협회 운영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오세영 사무국장의 노력으로 문예진흥원의 기업체 순회시낭독회와 순회강연, 창작지도 프로그램에 채택되어 참여한 회원들의 협조로 시협 운영을 위한 경상비가 확보되었으며, 그 때까지 없었던 한국시협상 운영규약을 제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시의 날>이 제정이 된 일이다. 1908년 11월 1일 최남선(1890-1957) 시인이 《소년⟫ 지를 창간하고 거기에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가 발표된 것을 기념하여 11월 1일을 <시의 날>로 제정하여 그 선포식을 하고 행사도 여러 가지 하였다는 점이다. <시의 날> 제정에 계기를 부여한 분들은 그 당시의 《한국일보⟫ 김성우 편집국장과 자매지《소년한국⟫ 책임자였던 김수남 씨였다. 이 두 분은 시 애호가였고 시낭송의 대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 때문에 1967년 11월 1일 신시 60주년 행사를 그 당시의 서울시민회관에서 <시인만세>라는 이름으로 시의 축제를 개최할 때 당시 《한국일보⟫ 자매지인 《주간 한국⟫(책임자 김성우)에서 주최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시인만세>라는 이름으로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전국적인 시낭송대회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상승되어 1988년 신시 80주년이 되는 해에 김성우, 김수남 두 분들과 시인들이 뜻을 모아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1957년에 발족한 한국시인협회뿐만 아니라 1971년에 발족한 한국현대시인협회와 공동으로 <시의 날> 선포식을 가졌다. 그 당시의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은 6·25 전쟁기에 마산고등학교에서 김춘수 시인과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는 이원섭(1924-2007) 시인이었다. 권택명 시인은 오세영 시인이 자리를 비운 탓으로 그 당시의 행사 진행에 애를 많이 썼으며, 부대 행사인 시화전 자리에서 방송 인터뷰를 하였다고 한다. 이 선포식을 기념하여 역시 김성우, 김수남 두 분이 재직하고 있던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시인만세>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시의 애호가들과 더불어 개최되었다. 이 행사 이후 해마다 한국시인협회와 한국현대시인협회가 번갈아 가면서 <시의 날> 행사를 주관하여 개최하고 있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 독교작가회의 한국 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