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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9.24 12:52 수정일 : 2023.09.24 12:56
2-5. 산복도로
/양선규
대구 같은 단일 도심 분지형 도시에 없는 것이 산복도로(山腹道路)입니다. 도시 안에서 산을 횡단하거나 가파르게 기어오르는 도로가 없는 것이지요. 어릴 때 고모님댁이 있던 부산에 가면 그 신통한 도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부터 신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기들 공간임을 주장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서울이면 경복궁, 창경궁(원), 덕수궁, 종묘 같은 망한 나라(조선왕조)의 궁 이름들이 그런 것들이고 부산이면 산복도로, 자갈치, 40계단, 영도다리 같은 항구도시 특유의 지명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대구에는 달성공원, 수성못, 동성로, 반월당, 범어네거리 같은 사람 많이 모이는 지명들이 다른 도시들보다 좀더 위세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모르긴 해도 대구 사람들은 대구 안에서도 모종의 장소애(場所愛, topophilia)를 품고 사는 것 같습니다. 대구 사람들의 장소애는 유명합니다. 지방은행 중에서 대구은행만큼 영업실적이 좋은 곳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화랑도의 고장, 교육문화의 도시 같은 말들이 자주 눈에 띄곤 했는데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요. 초등학교 졸업 무렵 마산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합포, 3.15, 몽고정(몽고간장), 신마산, 구마산 같은 말들이 신기했습니다. 그때는 마산에 산복도로(무학로)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마산에 가보니 그 말이 도로표지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마(산)고 뒷산’이라 불리던 무학산 학봉 중턱을 동(북)에서 서(남)으로 4차선 도로가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6.25 이후에 급격하게 도시 팽창을 겪으면서 생긴 부산의 산복도로와는 달리 마산의 산복도로는 시가지 교통 편의를 위해 생긴 순환도로의 성격이 짙습니다. 당연히 부산의 산복도로가 풍기던 소시민들의 그 물기 젖은 동병상련의 아우라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산 위에서 아래로 항구를 내려볼 때의 장관도 훨씬 못하고요. 굳이 산복도로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버스에서 내려 핫도그를 사 들고 벚나무 언덕으로 갔다. 꽃으로 풍성했던 벚나무 가지는 어느새 여린 잎을 틔우며 연두색으로 변해갔다. 의자는 비에 젖어 있었다. 의자 모서리에 앉아 핫도그를 먹으며 항구를 내려다봤다. 항구는 안개에 싸여 흐릿했다. 등대 불빛이 안개를 뚫고 언덕으로 다가왔다.
“비 오는 날은 이 동네가 더 멋진 것 같아요.” 대문이 열리더니 그가 의자로 왔다.
“의자 모서리 불편하지 않아요?” 나는 엉덩이가 아니라 발이 젖어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그럼 자기 방으로 가서 발을 좀 말리자며 널빤지를 건넜다. 널빤지를 한걸음에 건넌 그가 대문을 열었다. 그와 달리 나는 좀 주춤거렸다. <중략>
“발 닦아요.” 그가 내민 하얀 수건에서 햇볕 냄새가 났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발을 닦았다. 그러면서 그가 나의 발가락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앉아요.” 그는 내 발가락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커피를 마셨다. 의자는 창을 향해 놓여 있었다. 반듯한 창으로 항구를 보며 마시는 커피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릴 때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는 말이 요즘 들어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산복도로가 있는 도시에서 마지막 남은 삶의 끝자락을 아련히 붙들고, 마치 안개에 젖은 풍경처럼, 고즈넉이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구칩니다. 햇볕 냄새 나는 하얀 수건과 항구를 바라보며 마시는 특별한 커피 한잔을 앞에 둔, 그런 한적한 노년의 세월을 꿈꿔 봅니다. 물론, 하염없는 꿈으로만 그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