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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105.두 스승 이야기

작성일 : 2023.09.24 12:49

두 스승 이야기

/윤일현

 

그날은 5학년인 형이 대구시장 상을 타는 날이었다. 아버지도 초대받았다. 아버지와 형은 아침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엄마가 새 동정을 달아 인두로 빳빳하게 다림질한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은 엄마가 풀을 먹여 다림질한 하얀 무명 셔츠를 입었다. 오후에 상장과 부상을 든 형을 앞세우고 아버지가 뒤따라오셨다. 표정이 어두웠다. 시상식을 마치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세 명이 시청 앞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밥값을 계산할 때 아버지가 가진 돈이 음식값의 절반밖에 안 됐다고 했다. 나머지는 선생님이 냈다며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돈을 보냈다. 선생님은 받지 않으셨다. 선생님 아들이 형과 같은 학년이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냈다. 친형이 외국에 있는 동안에도 그 형은 꾸준히 내게 연락하며 자기의 근황을 말해주고 안부를 묻곤 했다. 박낙현 선생님, 그 후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대구시 변두리에 있어 시골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었고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조반석죽, 아침에 밥 먹고 저녁에 죽 먹으면 보통 이상으로 사는 집이라고 하던 시절이다. 2학년까지는 오전 오후반이 있었다. 그 당시 점심시간에는 강냉이죽이나 빵을 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대구 중심가의 부잣집 맏딸이었다. 오후반이던 어느 날 학교에 좀 일찍 갔다. 강냉이죽을 끓여 배급하는 급식소 앞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께서 점심 먹었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엄마가 아침에 밭에 나가면서 학교 가기 전에 먹으라고 찬장에 넣어 둔 밥을 오전 10시쯤 미리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급식소 가마솥 옆 부뚜막에 나를 앉히고는 커다란 양푼에 강냉이죽을 가득 담아 주셨다. 선생님께서 다음부터 점심 안 먹은 날은 내게 오너라.”라고 하셨다. 그 후 죽을 몇 번 더 먹었지만, 선생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선생님께서는 나보다 두 살 많은 늦둥이 남동생이 있었는데, 사철 동생 옷을 가지고 와서 수업이 끝난 후에 내게 입혀보고 분필로 표시하고는 밤새 직접 바느질하여 줄였다. 그다음 날 내게 입히고는 멋지다, 우리 똑똑한 꼬마 신사라고 하시곤 했다. 내가 헌 옷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선생님의 강냉이죽과 직접 수선해서 입혀주던 사아지(serge) 당꼬바지와 모직 재킷의 감촉과 온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삶의 고비마다 선생님께서 괜찮아라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꿈을 꾸곤 했다. 이현숙 선생님,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엄마는 척사 유생의 맏딸이었고, 명망 있는 척사 유생 집에 시집왔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 치르기에 바빴다고 한다. 해방 이후 토지가 제대로 보상도 못 받고 군부대에 수용돼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외할아버지가 신식 교육을 거부했기 때문에 엄마는 문맹이었다. 기억력이 비상했다. 스무 명이 넘는 사촌들 생일을 다 기억했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친척들은 엄마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런 엄마가 자주 입 밖에 내는 말이 있었다. 누가 나쁜 짓을 하면 하늘 내려다본다.”죄는 지은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간다.”라고 하셨다. 사람은 한날한시 같아야지라는 말로 일관성과 신뢰를 강조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아침마다 골목 끝까지 따라 나오셔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라라고 당부했다. 내가 초중고를 거치면서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다며 넌 참 인복이 많다라고 하시곤 했다. 맞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훌륭한 선생님들이다.

 

서이초 비극 이후 교권보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교권보호 4법이 국회상임위를 통과했고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교사의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은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교육 현장이 황폐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풍토가 조성돼야 모두가 꿈꾸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교육의 본질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까? 학교를 무조건 믿고 따르던 학부모, 힘든 여건 속에서도 자부심과 사명감을 잃지 않던 선생님이 서로 힘을 합쳐 아이들을 키우던 그 시절이 그립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