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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수프 8> 괴물의 탄생

작성일 : 2020.07.14 02:10

<인문학수프8> 괴물의 탄생

                                                        

<괴물>(봉준호, 2006)이라는 영화가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2006년 여름, 한강 여의도 둔치에 괴생물체가 나타난다. 한강의 어류, 양서류, 파충류 중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생물체는 크기는 버스만하고, 다리 한 쌍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기형다리 1, 뒷다리가 되다가 중단된 돌기, 길고 날렵한 꼬리, 그리고 마치 연꽃잎이 벌어지듯 5갈래로 갈라지며 흉측하게 벌어지는 형태의 입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식욕과 탐욕으로 인해 먹이를 통째로 삼키고, 자신의 은신처에 먹이를 저장해 놓는 습성이 있다. 한강과 그 주변 둔치가 주요 활동무대인 이 생물체는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매우 히스테리컬하고 예측불가능하다. 그래서 때론 사람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며 난폭한 모습을 보이지만, 가끔 심술도 부리고, 엄살을 떠는 등 어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생물체를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부른다.”[daum 영화, 참조]

왜 우리는 '괴물'에 집착할까요? 늘 그렇지만 이야기 속의 괴물은 현실에서의 불안과 공포를 반영합니다. 그렇다면 <괴물>이라는 영화는 우리 시대의 어떤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는 것이었을까요? 흔히 말하기를 힘 있는 것들의 괴물성이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외세가 우리 땅에 심어놓은 그 모든 폭력의 상징이라고도 말합니다. 혹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젊은 세대들에게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 일체가 영화의 '괴물'에 반영되어 있다고도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 시대의 '힘 있는 것들의 괴물성'이 가장 그럴 듯한 것 같습니다. ‘한강(서울의 도심)에 살면서, 돌연변이 종이고(우리 가운데서 태어난 것이고), 온갖 탐욕의 화신(닥치는 대로 가지려 하고)이며, 히스테리컬하고 예측불가능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가끔씩 엄살을 떠는(겉으로는 선한 미소를 띠는)’ 성격은 우리 시대의 가진 자들의 성격적 일면을 대변합니다. 말하자면 전형성을 띤 캐릭터입니다. 그것이 한강이라는 휴식(힐링)의 공간에서 배반적으로나타나고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도드라지고 있는 '그럴 리 없는 것들의 돌발적인 출현과 그 파괴성'을 환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현실 자체가 예측 가능성을 벗어나 흉측한 괴물이 되고 있는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괴물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무엇인가 당혹스러운 변화가 강요될 때 우리 곁에 나타납니다. 당대의 공포와 관련된 괴물의 창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서양의 유명한 괴물로는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비슷한 삶을 산다. 이들은 서로 상보적이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똑같은 사회의 무서운 두 얼굴, 즉 같은 사회의 양극단인 것이다. 다시 말해 흉측하게 생긴 비참한 사람과 잔혹한 소유자, 즉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변하는데, <사회 전체가 자본의 소유자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견이자 미래에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보장해 주는 생각인 동시에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종언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포문학은 바로 분열된 사회의 공포감으로부터, 그리고 이 두려움을 치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탄생했다.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위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포 문학은 일단 공포를 만들어낸 이상 이것을 제거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하며, 깨진 균형 상태를 복구하고 역사를 멈출 수도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괴물은 미래가 괴물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괴물의 적수, 괴물의 적은 항상 현재를 대변하며 득의양양한 19세기의 그저 그런 문화, 즉 민족주의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신적이고 속물적이며, 무기력하고 자기만족적인 문화의 정수를 대변하고 있다(특히 가족의 의미가 강조된다). 무시무시한 괴물에 사로잡힌 대중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이 악마 파괴자의 온갖 악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괴물을 퇴치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다소 황당한 문학적 묘사와 함께 닳고 닳은 데다 수없이 반복되어 온 유형을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은 전혀 미지의 인물과 접촉하면서 다시 엄청난 위력과 신기함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괴물은 사회 안에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적대 관계와 공포를 사회 자체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대체하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에서 투쟁은 <악마라는 종족><인간 종> 사이에 벌어진다. 감히 악마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동적으로 인간이라는 종, 사회 전체의 대변자가 된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괴물은 보편성, 즉 이제는 불확실하게 된 사회의 통합을 재구성하는 데 봉사하게 된다.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흡혈귀 드라큘라는 이전의 괴물들과는 달리 역동적이고 전면적인 괴물들이다. 바로 이것이 이들을 보고 사람들이 경악하는 이유이다. [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역, 공포의 변증법중에서]

영화 <괴물>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공포영화의 일반적인 룰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대중은 이유 없이 고통받습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불안과 공포가 다층적이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영화 한 편으로 시대의 징후를 모두 읽어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에서 생산되고 있는 이런저런 괴물 담론들을 보다 보면 우리 시대의 불안 증세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탐욕의 화신이지만, 스스로 피해자라고 여기는(물론 무의식적 층위겠지요) 수많은 괴물들의 현존을 어떻게 재미로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참고로 옛날이야기 속의 괴물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지금의 괴물과는 많이 다릅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알록달록 여우 구슬>입니다.

어느 마을의 총각아이가 고개를 넘어서 글방엘 다녔습니다. 총기 있고 글 잘하는 총각아이였습니다. 하루는 고개를 넘는 데 꽃 같이 예쁜 색시가 나타났습니다. 넋을 잃고 있는 총각아이에게 색시는 육체의 향락을 가르칩니다. 색시는 총각아이의 귀를 잡고 입을 맞추고는 제 입에 물었던 알록달록한 고운 구슬을 총각아이의 입에다 넣어줍니다. 그리고는 또 자기 입으로 가져갑니다. 그러기를 열두 번 하고 사라집니다. 날마다 그 짓을 반복했습니다. 그런 일이 날마다 되풀이되니 아이가 무사할 리가 없었습니다. 날로 몸이 수척해지고 공부에 전혀 진척이 없었습니다. 괴이히 여긴 훈장이 어디 몸이 아프냐고 물었지만 총각아이는 아무 일 없다고 잡아뗐습니다. 보다 못한 글방 훈장이 총각아이의 뒤를 밟았습니다. 문제의 그 장면을 목격한 훈장은 다음날 총각아이에게 색시의 구슬을 삼켜버리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단단히 일렀습니다. 몇 번의 실패를 겪고 총각아이는 드디어 구슬을 삼킵니다. 그러자 색시가 커다란 구미호가 되어 죽어 넘어졌습니다. 총각아이가 넘나들던 고개가 여우고개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사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전하는 괴물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이는 입에 문 도토리가 구슬이나 되는 것처럼 뱉어냅니다. 황순원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다른 형태로 된 여우 이야기도 있습니다. “구슬을 문 채 하늘을 보고, 또 땅을 본 뒤, 마지막으로 색시(사람)를 향해 뱉어라라고 훈장이 당부하는 내용으로 진화된 것도 있습니다. 어린 총각아이는 하늘과 땅을 보는 일까지는 성공했지만 끝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색시의 얼굴을 향해 구슬을 내뱉지 못한 채 그냥 구슬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천문과 지리에는 능통할 수 있었지만 인사(人事)에는 통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보는 눈의 결핍이 결국 훗날의 화를 부르고 맙니다. 그렇게 교훈을 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글을 읽다 보면 역사에 이름이 남는 사람들의 인물평에 천문지리(天文地理)’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천문지리에 능통했다는 식으로 한 인물의 능력과 자질을 뭉뚱그려서 고평(高評)합니다. 거기다 인사(人事)’까지 포함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정리도 간단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러러서 하늘의 무늬를 보고 구부려서 땅의 이치를 살피는지라, 이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연고를 알며, 처음을 미루어 살피고 끝을 돌이켜 보느니라. 그러므로 죽고 사는 원리를 아느니라.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 知幽明之故 原始反終 故 知死生之說)[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 498]

천문지리하늘의 무늬와 땅의 이치였습니다. 하늘의 무늬는 상()이고 땅의 이치는 형()이랍니다. ‘인사라는 말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미 땅의 이치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무늬는 보고(), 땅의 이치는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 배우고 자신을 성찰한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시골의 산골아이가 그냥 구슬을 삼켜버린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였습니다. 그 이치를 떠나서 천문, 지리, 인사를 제멋대로 끼워 맞춘 옛날이야기의 순박성에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옛날에는 괴물마저도 순진했으니 그 정도의 견강부회는 순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족 한 마디. ‘괴물을 퇴치해내는 힘은 오로지 공동체의 지혜, 혹은 가족의 힘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알록달록 여우 구슬>에서는 전자가, 영화 <괴물>에서는 후자가 힘을 발휘합니다. ‘공동체의 지혜가족의 힘은 인류가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원초적인 힘의 원천입니다. 그러한 인식은 여러 가지 고래(古來)의 이야기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세상에 믿을 것은 공동체의 지혜와 가족의 힘밖에 없다가 옛날이야기 <알록달록 여우 구슬>과 영화 <괴물>의 이면적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그런 원초적인 주제가 공공연하게 나대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는 말도 가능합니다. 공동체와 가족에 대한 패러디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질병으로 공동체가 공격받는 이야기나 윤리의 실종으로 가족이 붕괴되는 이야기가 횡행하는 사회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놓인 사회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연대감마저 상실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큰 울타리로서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가족적 유대감이 붕괴되고 있는 작금의 우리 사회가 많이 염려스럽습니다.  <양선규 소설가, 대구교육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