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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9.18 11:37
지네 2 - 색즉시공色卽是空
서산에 해가 지고 대숲에 새 깃들면 강마을 뒷마당에 댓잎 한 장 일렁인다. 으스름 달빛 아래 천족千足 지네 배舟를 저어 동굴 속 어둠을 끌고 세상 밖을 출타시다.
닭도 없고 족제비도 없는 평화공존 이 세월에 어찌 아니 화평하리. 철갑도포 단단 여며 온몸이 뼈대로 굳은 전사戰士님네 팔자걸음. 맨땅을 걷더라도 어슬렁 출렁출렁 낙동강 카누 젓듯 남해바다 거북선 뜨듯, 수많은 노를 저어서 출렁이며 오는 짐승.
저다지 촘촘한 발은 어찌 다 움직일꼬. 어지러운 걸음에도 엉기지 않는 비법秘法은 초정밀 자동제어칩自動制御chip이 네 머리에 박힌거냐. 무념無念이 순리라던 노자 어른 말씀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물결 치면 치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 걷는 행운유수行雲流水 보법步法인가.
출렁이는 긴 역사에 발자취로 새긴 사연. 우리네 인간들은 기껏 두 발 달고서도 길 하나 바로 걷기 이다지 어려워서 흙탕에 나뒹군 영웅 어디 한둘이러냐. 한세상 걷는 길은 형형색색 가시덤불. 뾰족한 돌부리며 깊이 모를 웅덩이며 가슴 속 비운 유혹誘惑도 그냥 넘기 어렵느니. 생각이 둔한 이는 되는 대로 살아가고, 머리만 영리한 자 발길이 외로 걷고, 가슴이 영악한 놈은 말[言]도 발[足]도 따로 기고….
한순간 생각만도 끔찍한 네놈 두고 내 족적足跡 생각하며 두 발 훑어보니 짧지 않은 그 세월에 엉긴 길목 많았구나. 첫발을 잘못 디뎌 빼도 박도 못한 사연, 헛디딘 한쪽 발에 남은 발도 빠진 사연. 아둔한 내 발과 달리 영악한 네 보법步法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방향을 잡았으면 네 길이나 갈 일이지, 무슨 뜻을 품어 남의 집을 들오느냐. 축축한 땅을 뒤져 지렁이나 먹는 놈이 식성이 같기를 하냐 잠자리가 같으냐.
천지만물 삼기실 제 조물의 깊은 뜻은 사람은 사람끼리 미물은 미물끼리 제 각각 분수에 맞춰 먼발치로 사는 것을. 뒤죽박죽 엉긴 까닭 속사정이 궁금해서 토막 낸 네놈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이 한밤 무위無爲로 앉아 긴 사색思索에 잠기노라.
사공이 너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너도 나도 모두 잘나 전문가 넘치는 세상 네 발도 사공이 많아 뒤죽박죽이 되었느냐. 요즘같이 바쁜 세상 기계처럼 도는 삶에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이빨 빠진 톱니더냐. 때는 바야흐로 초첨단 전자시대. 고전적古典的 네 수학數學이 전자파 장애를 받아 헷갈린 정밀회로精密回路가 제 갈 길을 놓쳤느냐.
고장이 아니라면 밝은 낮이 괴롭더냐. 스스로 어둠 되어 햇빛을 등진 의지. 두꺼운 철갑옷에 속살이 뜨겁더냐. 흉측한 네 생김새가 빛을 보기 민망터냐. 눈에 뵈는 삼라만상이 호화찬란 형형색색이라, 황홀한 세상살이를 어둠 속에 보려느냐.
흉물스런 네깟놈도 <님의 침묵> 읽었더냐. 만해 스님 읊은 말씀,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가 다 허상虛像이라. 스스로 그림자 되어 더듬이를 세우느냐. 자나깨나 폼생폼사form生form死 우리네 인간이사 눈으로 그려보고 손으로 만져보아 속이야 썩고 비어도 겉멋으로 빛나거늘….
하긴, 그럴 테지. 색色이란 허망해서 밤에 본 그 모습이 만상萬象의 본질이라. 한밤중 공空으로 보는 네놈 뜻도 옳으려니.
영웅의 생명이든 미물의 목숨이든 한 세상 사는 길이 생로병사生老病死 한 길이라. 색色으로 겉치장한들 무한영광無限榮光 이어지랴. 얼굴에 색칠하고 이마에 별을 달고 옷깃의 금배지며 수첩 속 금빛 명함.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눈감고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무지개려니.
치떨리는 불청객을 강둑 너머 내던지고 낙동강 강바람을 허위허위 거닐면서 이 한밤 가로등 저쪽 빛으로 된 세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