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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9.16 10:43
<김춘수 평전 22;서울시절 1>
김춘수 시인,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지다
-김춘수 시인의 서울 시절(1)
양 왕 용
1978년 9월에 경북대학교에서 영남대학교로 옮긴 김춘수 시인은 1979년 3월 학기부터 영남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게 되었다. 1980년에는 문리과대학이 문과대학과 이과대학(2017년 자연과학대학으로 명칭 변경)으로 분리되자 자연스럽게 문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영남대학교 초대 문과대학 학장이 된 것이다.
김 시인이 처음 부임했을 때의 총장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교육학자이면서 교육철학을 강조하는 이인기(1907-1987) 총장이었다. 이 총장은 영남대 3,4대 총장(1974.2.23.-1980.6.16.)을 지냈다. 따라서 김 시인을 문리과대학 학장으로 처음 임명한 사람은 이인기 총장이었다. 그는 전국의 유명교수를 영입하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김 시인은 이 계획에 의하여 영입되었다. 그러나 이 총장은 1980년 6월 재단 이사회에 사의를 표하고 영남대학교 총장을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간다. 1980년 6월 16일 영남대학교 최초로 학내에서 발탁된 조경희(1918-2013)교수가 제5대 총장으로 이사회에서 선출되었다. 조 총장은 1937년 경성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 전신)를 33회로 졸업하여 일제 강점기 말에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는 영남대 법정대 교수로 교무처장, 대학원장, 법정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런데 조 총장은 졸업했으면 경기고 36회인 김 시인의 3년 선배이기 때문에 김 시인이 영남대로 옮기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김 시인이 부임 직후 학장으로 발탁된 것과 그리고 문과대 학장으로 계속 보임 받은 것도 조경희 총장과의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김 시인의 조 총장과의 인연과 김 시인의 학장 시절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기철 시인이 그의 저서 『김춘수의 풍경』(<2021,문학사상사> p21)에서 언급하고 있다. 학장으로서 김 시인은 결재 서류를 자세히 읽기보다 직원들을 믿고 도장만 찍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김 시인이 영남대 학장으로 있었던 1979년과 1980년은 대한민국 역사상 큰 소용돌이가 일었던 시기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한 박정희 대통령 서거, 12월12일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하나회 중심의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에서 비롯한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 12월21일 최규화 제10대통령 취임과 그 이듬해 8월16일 사임, 1980년 4월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 대규모 시위, 5월17일 신군부 세력에 의한 비상계엄령 선포, 5월18일 광주 시위대와 계엄군의 충돌로 격화된 광주민주화 항쟁, 5월27일 계엄군 광주 항쟁 진압,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9월1일 전두환11대 대통령 취임, 10월27일 대통령 7년 단임 간선제의 제5공화국헌법 공포 등 시국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격랑이 드디어 김 시인에게 몰려왔다. 이 시기에 대하여 김 시인이 두 번의 대담에서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김영모의 인물론 ‘꽃의 시인 김춘수’1991,8 월간 엔트 프라이즈, pp325-341, 이유경 「외롭고 심심해진 팔순의 시인 김춘수」 『시인의 시인 탐구』,월간조선,2002 pp93-116) 그리고 권기호(1938-) 교수의 그 당시의 증언과 신규호( 1938-2022)시인의 목격담 등을 바탕으로 재구해 본다.
1980년 11월 하순 김 시인이 속리산으로 문과대 교수들과 1박2일의 연찬회를 떠났다가 귀가하자 매일신문 전달출(1931-2010) 사장이 전화가 왔더라고 사모님이 전했다. 긴한 전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김 시인은 전달출 사장을 잘 몰랐다. 밤11시 쯤 편집국장이 자기 회사 사장이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교수식당에서 점심이나 하자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튿날 전 사장이 편집국장을 대동하고 학장실로 왔다. 편집국장이 전 사장에게 김 시인을 소개만하고 떠나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지금 대여당이 생기는데 김 학장이 경북지역 대표로 15명의 창당 주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메신저로 왔으니 수락 여부는 자기에게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김 시인은 학교의 보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총장을 핑계대어 면할 작정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막상 총장은 그 당시의 대학의 어려운 현안과 시대적 상황 판단에 민감하여 오히려 ‘영남대학의 영광입니다’ 하고 적극 권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 되어 어쩔 수없이 수락하게 되었다. 전달출 사장은 가톨릭 신부이자 천주교 대구교구 사무처장이면서 매일신문이 가톨릭 재단이라 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경북 경산 출신이고 그 당시의 실세 전두환과는 같은 전 씨라도 가까운 집안은 아니었는데도 종친이라는 입장에서 경상북도를 대표하여 국보위의 입법위원 81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 시인을 경북대표라고 내세웠던 것이다. 며칠 후 자신이 김 아무개라 하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락해 줘서 고맙다면서 내일 아침 10시 역에서 뵙겠다는 것이었다. 만나 수인사를 하고 보니 김정남이라는 나중에 민주정의당 대변인을 한 젊은이로 그와 함께 열차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 날이 11월 27일이었다.
필자는 서울역에 내린 김 시인의 모습은 그 당시 서울에서 유한공고 교사를 하던 김 시인의 제자인 전재수(1940-1986) 시인과 그의 학교 동료였던 신규호(1938-2022)시인을 통하여 들었다. 전 시인에게는 1980년대에 서울역에서의 모습을 실감나게 들었으나 신 시인에게는 최근까지 몇 번 들었던 일화이다. 김 시인의 1980년 11월 27일 서울역에 내린다는 소식을 전 시인이 듣고는 신 시인에게 함께 서울역에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섰다는 것이다. 서울역에 도착한 김 시인은 사복을 입었으나 군인 신분임이 드러나는 건장한 청년들과 함께 프라자 호텔로 간다는 말만 남기고 과잉 경호를 받으며 갔다고 한다. 이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는 김 시인이 비교적 자상하게 밝히고 있다.(이유경; 앞의 글 ,앞의 책,PP.111-112)
숙소가 프라자 호텔로 잡혀 있었으나 그는 고소공포증이 있다며 옛날 자주 묵던 서린동 쪽 여관에서 자겠다고 고집했다. 아침에 어제 그 젊은이 하고 웬 중년신사 한 사람이 방에 찾아와 너부죽이 큰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권정달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이제부터는 자기가 모시겠다고 했다.
그들에게 이끌리다시피 해서 창당주비위가 열린다는 무역회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모인 15명 중 대여(김 시인의 호)가 안면 있는 사람은 소설가 송지영 씨뿐이었다. 창당주비위회의라는 것도 가관이었다. 저들이 모든 스케줄을 짜놓고 일사천리도 진행했다. 주비위가 하는 일은 기자들에게 얼굴만 보여주고 기념사진 몇 장 찍는 것이 전부였다. (이유경; 앞의 책 p111)
이 사실에 대한 그 당시의 보도는 1980년 10월29일 조선일보 1면에 톱기사로 나와 있는 것이 여러 언론들 가운데 가장 자상하다. <여,민주정의당 창당선언>이라는 헤드 라인 아래에 ‘어제 15인 발기준비위 첫모임’이라는 표제가 있다. 그리고, 15명의 발기인 명단과 창당 취지문이 박스로 처리되어 있다. 그 기사의 첫 머리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5공화국의 정치를 주도할 신여당이 28일 발기 준비를 위한 첫 모임을 갖고, 가칭 「민주정의당」의 창당을 공식선언했다. 개혁주도세력인 권정달, 이종찬 씨 등 입법회의의원 3명, 구정계, 노동계, 문화계 인사 각 2명, 재야, 관계, 재계, 언론계, 여성계 인사 각 1명 등 15명의 발기인들은 이날 오전 서울 무역회관 22층 회의실에서 『민주복지정의사회를 구현하고 겨레의 염원인 조국통일의 꿈을 기필코 이루어 나가려는 새 시대의 국가지표를 달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을 발족시키기로 했다』고 선언했다.(1980.11.29. 조선일보 1면 머릿기사)
김 시인의 경우, 송지영(당시 65세 평북 출신,입법회의의원,문예진흥원장)과 ‘문예’로 구분되어 58세 경남 출신, 시인, 영남대학교 문리과대학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경북지역 대표가 아니라 그 당시 송지영(1917-1989)소설가와 함께 문화예술계를 대표한 2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 시인은 이렇게 창당주비위원으로만 끝나지 않고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은 권정달 의원의 강권으로 1981년 3월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 민정당 전국구 37번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다. 그 당시 제12대 국회는 1지역구 2명의 중선거구제에 의한 선거로 92개지역구에 184명 전국구 92명 총 276명으로 민정당은 92명의 지역구 의원과 예비후보 14명을 포함한 74명의 전국구 의원을 공천하였다. 선거결과는 지역구 90명, 전국구 61명으로 총151명이 당선되어 과반수를 넘는 안정적 여당이 되었다.
김 시인은 4년 동안 문공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필자에게 김 시인이 토로한 바는 그 당시 이규호 문교부 장관에게는 국립대학 교수의 처우개선에 대한 질의를 자주 했는데 이 장관은 사립대인 연세대 출신이니까 국립대 교수의 열악한 처우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진희 문공부 장관에게는 정지용 시인과 김기림 시인의 해금에 대해서 여러 번 질의하니까 이 장관이 사석에서 김 의원은 그 문제밖에 질의할 것이 없느냐면서 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금해 주지 않으니 자꾸 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중앙일보 1984년 3월14일자에는 김춘수 의원이 당시 이진희 문공부 장관에게 질문한 내용이 <국회 상임위 질문 답변 요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도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음)
김춘수 의원(민정) 질문; 정지용·김기림·이태준 등 월북자각의 30년대 작품들은 좌익 이데올로기를 반대하고 순수문학 이념을 전형적으로 반영한 것들인데, 이를 좌익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출판금지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 작품들을 해금, 출판하게 할 생각은 없는가?
이진희 문공장관(답변); 정지용·김기림의 30년대 작품에 프로문학적 요소는 없다. 그러나 출판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작품 내용 때문이 아니고 해방 후 그들의 행적 때문이다. 일반에게 출판되지 않더라도 문학사연구에는 얼마든지 개방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 중에도 30년대 이후 것은 문제 있는 것이 있다.
김춘수 의원(민정); 그렇다면 자진해서 이북에 갔고 불온자금을 받은 윤이상의 작품은 왜 국내에서 공연하는가. 6·25 혼란 통에 과오가 있다 해도 한쪽은 되고 한쪽은 안 된다는 것은 형평상 맞지 않다.
이진희 문공장관(답변); 윤이상은 이북에 가지 않았고 현재 서독에 살고 있다. 정지용·김기림의 행적을 이북에 가서 파악할 수야 없지 않은가.
필자가 확인한 또 다른 문공위 자료에 의하면 학술진흥재단 조성옥이사장에 대한 질의응답에서도 학술원에서 진행하는 교수들의 논문평가에서 교수들에게 평가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질책하고 있다. 이 시절, 독일 방문 길에 고향 선배이자 해방직후 통영문화협회 회원으로 같이 활동했던 윤이상(1917-1995) 작곡가의 독일 집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그의 완전한 복권을 애썼던 점이나, 그 시절 겸하였던 문예진흥원 고문(1983년 정한모 시인 문예진흥원 원장 시절)의 자격으로 윤이상 음악회을 가지게 주선한 것을 큰 위안으로 삼은 점.(김춘수;나의 예술인 교우록<윤이상 편>강현국 편저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시인 김춘수의 문학과 삶 p288)도 윤이상을 사상적 측면보다 예술성의 성과에서 파악해야 된다는 그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회의원으로서의 김 시인은 나름의 전문성을 살려 대학이나 문학계와 음악계의 현안에 대하여 개선하기에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 시인은 미완의 자전소설 『꽃과 여우』 <책 머리에>(1997,민음사,p14-15)에서 이 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내 자서전이지만 알단 1950년에서 그치기로 한다. 그 뒤 30여년의 내 생애 후반기는 보류해 두기로 한다. 시일이 지날수록 전망이 더 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내 생애 후반기에는 1980년 초의 정치 관여라는 꽤 까다로운 문제가 낀다. 밖에서는 내 정치 관여를 도덕적 측면에서 보고 있는 듯하나 나는 전연 다른 입장이었다. 내 정치 관여는 문제가 된다면 논리적 문제이지 도덕적 문제는 전연 아니다. 이 문제를 내 스스로 해명하려면 좀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명하기는 해야 할 일이긴 하다. 밖의 비판에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진실은 내가 밝힐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 하는 소리다. 이 또한 내 문학에 그대로 연결된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그는 정치 관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말하자면 도덕적 잣대로 무조건 비난을 하지 말고 정치 관여의 구체적 팩트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그 진실을 스스로 밝히겠다고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밝히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김 시인의 정치참여는 그 당시의 젊은 대학생 특히 세칭 운동권 학생들의 반발을 크게 샀다. 그 하나가 영남대학교 강단 복귀의 불발이다. 대학교수로서 정년(1922년 11월 25일이 생년월이니 만 65세 학기말은 1988년 2월말)을 앞두고 영남대학교 국어국문과 강단에 복귀하고자 했으나 그 당시의 운동권과 학과 학생들의 반발로 결국 정년 6개월을 남긴 1987년 8월말 사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 당시 필자에게 김 시인은 “내가 국회에서 이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것은 국회 의사록에 있는데 막무가내라 안타깝다”고 했다.
다음은 부산에서 필자도 실제로 목격하고 당한 일 하나를 소개하겠다. 경성대학교 대학극장에서 한국일보사가 주최하는 전국 순회 시낭송회에 김 시인이 초대된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행사장에 부산 시내 운동권 학생들이 몰려와 구호를 외치며 행사를 방해한 사태를 필자는 현장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그 소동의 주동자들이 부산대학교 문학동아리 소속의 학생들이라 필자는 더욱 민망했다. 불과 10년 전의 1970년 말의 문학행사에서 열광적으로 환영받던 김 시인의 모습과 겹쳐져 정말 안타깝기만 했다.
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로 첨가하고 싶은 것은 김 시인이 1982년 2월 말 경북대학교에서 받은 명예문학박사 학위에서 유추되는 소문의 진실이다. 학위를 받은 후 축하연 비슷한 것을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행사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권기호 교수와 필자가 김 시인의 차에 동승하여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새삼스레 선생님답지 않게 명예문학박사학위냐’고 하는 질문이 있었다. 그러자 김 시인은 혹시 대학의 책임자로 오라는 데가 있으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했다고 답하셨다.
이유경 시인의 글에 보면 김 시인은 2년 정도 국회의원 생활을 견디다 못해 학교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마침 모 대학에 총장 자리가 났다며 주위에서 정치를 해 보라는 사람이 있어 그 때의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과 친분이 있는 이규호 문교부 장관에게 부탁을 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학에는 대학과 관계없는 엉뚱한 인사가 임명된 것을 보고 그나마 단념했다고 한다.(이유경 앞의 책 P113) 그 모 대학을 이유경 시인의 불확실한 기억과 필자가 조사한 여러 가지 사실을 유추하여 밝혀보았다. 영남대학교 조경희 총장의 임기가 끝난 것이 1983년 1월이었고 그 후임은 다시 외부에서 왔다. 만약 국회의원 2년 만에 대학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면 역사의 소용돌이를 쉽사리 빠져 나온 격이 되어 학생들에게 당한 곤욕을 겪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 회의 한국 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