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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수프/ 작고 외롭고 단단한 것들을 위하여 > 2-4. 우주의 리듬

작성일 : 2023.09.16 10:40

 

2-4. 우주의 리듬

 

언젠가 문학 속의 말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양선규, 코드와 맥락으로 문학읽기참조). 정진홍 교수의 햄릿감상문을 읽고 난 뒤였습니다(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참조). 알고 싶은 것은 많이 있는데 문학은 늘 문안으로 들지 못하고 문밖만 떠돌 뿐이었습니다. 정진홍 교수의 햄릿감상문은 초독, 재독, 삼독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 물음에 저 나름의 물음을 덧붙여 본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글에서 저는 정진홍 교수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기면서 몇 마디 의문을 덧붙였습니다.

“<말은 말뿐일 뿐이다>, 그것 하나 알려고 평생을 책과 씨름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저 말일 뿐인 것을 두고 이 말 저 말, 말들이 많았다. 햄릿에 등장하는 그 많은 말들, 그 많은 아포리즘들의 효용은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가르침이었다(그것이 문학의 역설적 효용인지도 몰랐다). 텍스트는 비어 있다. 그것은 끼니를 잇지 못하는 참혹한사정(事情)에다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푹 과서 잡수시도록 하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김종삼, 북치는 소년참조)에 불과한 것이다. 빈손으로 병문안 온 친척 어른의 공허한 부탁 말씀처럼 문학은 그냥 끔찍하게던져진 것이다. 그것(문학)은 본디 사치스럽고, 무모한것이고 역설이다. 아니 이 원래 그런 것이다. 햄릿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이 내 지난 상처에 대한 위로였다면, 그것 역시 비어 있는 텍스트에 내가 무모하게 무엇인가를 비벼 넣은 것이다.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말과 문학, 그리고 현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지 절실하게 공감한 뒤에 쓴 글입니다.

인간은 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 때문에 그르치는 일도 무수히 많습니다. 말과 인간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본디 말은 큰 것에 대해서는 말을 못합니다. 특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규범적인 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저 작은 것으로만, 생활의 기호로만, 자신의 역할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이나 글로 전수되지 않는 다른 그 무엇, 큰 것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위에서 자신의 햄릿재독을 비어 있는 텍스트에 내가 무모하게 무엇인가를 비벼 넣은 것이라고 말하는 정진홍 교수의 발언도 그 역시 말로 전하는 문학 작품 속에서 큰 것 하나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말로 사는 인간의 한계와 비애를 깨달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문학은 그래서 종교나 철학과는 달리, 가급적이면 큰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하는 편입니다. 비유로 말하고 상징으로 감싸려는 문학의 언어는 언어가 자살할 때 쓰는 무기’(토도로프)와 같습니다.

부득이 엄청 큰 것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을 때 인간은 주문(呪文)을 동원합니다. 주문은 말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해석하다가는 다시 작은 것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리듬(음악), 우주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진()주문은 아니지만 불가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옴마니반메훔, 나무관세음보살 같은 진언들도 그 비슷한 목적과 효용을 지닙니다. 작은 것들 때문에 번뇌에 사로잡힌 중생을 구제하기를 염원하는 큰 말들입니다. 오늘 글의 제목인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치매에 걸린 한 지식인 할머니가 어릴 때 만난 외계인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말입니다.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뒤 영화일에 종사하는 그이의 딸이 어머니의 유품들을 살펴서 그 말을 해석한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주문에 대한 딸의 해석이자 이 소설의 결구입니다.

 

수없이 흥행에 실패한 SF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들, 그 어느 장르보다 고난도의 특수분장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대체재가 넘쳐나는 영화들 사이사이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있던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니니코라치우푼타는 끝내 만날 수 없었던 큰 것들의 대명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 때 얼핏 본 그 큰 것들의 그림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고 그런 것 없이도 삶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지막 주문마저 속절없이 떠나보낸 것을 후회합니다. 우주의 리듬 속으로 귀환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할 텐데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