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작성일 : 2020.07.10 10:16 수정일 : 2020.07.10 01:18
6.할머니의 시간
날마다 할머니 곁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잠들 때까지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는 손자가 있었다. 할머니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난리통에 피란 가서 고생한 일까지 온갖 이야기를 청산유수로 늘어놓곤 했다. 드디어 밑천이 떨어지게 되면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 달비골이라는 마을에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죽은 불쌍한 아이가 있었단다. 어미가 죽고 일 년 만에 애비도 병으로 죽게 되었지. 할애미(할머니)는 손녀가 다섯 살까지는 동냥젖을 얻어 먹여가며 애지중지 길렀단다. 나이가 들어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렵고, 아이를 먹여 살리기도 힘들게 되자, 손녀를 먼 친척 부잣집에 수양딸로 보낼 수밖에 없었지. 할애미는 손녀를 보내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단다. 어느 날 할애미는 손녀가 너무 보고 싶어 집을 나섰단다. 할애미는 장에 가서 커다란 수박을 하나 사서 들고는 염천 더위 속을 바삐 걸었단다. 손녀가 사는 마을은 큰 고개를 두 개 넘어야 했지. 소금 단지보다 무거운 수박을 들고 있었지만 고개 하나는 단숨에 넘었단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지만 두 번째 고갯마루까지 용케 당도할 수 있었단다. 고갯마루에 서니 손녀가 사는 집이 멀리 산 아래로 아득하게 보였고, 할애미는 잠시 땀을 닦으려고 수박을 곁에 놓고 주저앉았단다. 그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수박이 그만 고개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단다. 수박이 계속 데굴데굴 굴러 가고 있다. 아직도 굴러내려 가고 있단다. …”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요 장면마다 보태지는 할머니의 의성어와 의태어는 극적인 효과를 더한다. 수박 없이 손녀를 만나게 될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슬프고 궁금하여 손자는 빨리 다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할머니는 아직 수박이 굴러 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다 굴러가고 나면 그 다음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말한다. 손자는 수박이 구르기를 멈추었는지를 계속 묻다가 잠이 든다. 그 다음 날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고 오히려 손자에게 물어본다. 손자는 수박이 깨지기 전에 산신령님이 받아 주어 할머니와 손녀는 수박을 맛있게 잘 먹었을 거라고 답한다. “아이고, 내 새끼. 똑똑하기도 하지. 그래, 네 말대로 산신령님이 수박을 받아 주었단다”라고 말하며 조손이 꼭 끌어안고 볼을 비빈다.
유년의 시간은 종잡을 수 없다. 정신없이 놀 때는 금방 해가 기울고, 밭에 나간 엄마를 기다릴 때 시간은 너무도 느리게 흐른다. 할머니는 언제나 시간 밖에 있는 존재였고, 시간의 길이를 멋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마술사였다. 대동아 전쟁과 6·25를 하루 저녁 만에 재현할 수도 있지만, 수박이 다 굴러 내리는 데 꼬박 하룻밤이 걸리기도 한다. 유년의 시간은 일정한 템포로 흘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무 각박하고 빈틈없는 시간관념을 강요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그 길이는 달라져야 한다. 나른하게 늘어진 나태와 여유가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배양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대구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