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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7.07 11:26 수정일 : 2020.07.24 01:28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살아가면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는 육체처럼 허무하고 공허하다. 그리고 이처럼 소중한 나의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현재의 나의 삶이 죽음과 같다. 소중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미래의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생각의 확신으로 ‘나는 어쩌다 화가가 되었을까?’ 하는 나만의 <기억의 더께>를 찾아가서 글로 써보는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또 색다른 작업을 할 때 마다 느껴지는 기억의 더께 모두가 현재의 나의 시간 속에서 생각의 꼭지와, 영감 등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시간 속에서 존재하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든,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든 간에 나만의 과거 시간인 <기억의 더께>는 언제나 현재의 작업하는 나와 함께하는 소중한 현실인 것이다.
기억의 더께 넷 - 화가의 꿈을 먹고 살던 미술학원시절
관인 제1호 부산종합예술학원은 나의 고교시절 시간의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동 창선파출소 앞 미화당백화점과, 용두산 공원에 연결된 구름다리 바로 밑 5층. 엘리베이트도 없이 백화점과 용두산 공원까지 모두가 긴 계단으로 걸어서 다니던 길. 5층 미술학원은 무용학원 옆 좁은 통로안쪽에 있었다. 그 통로를 지나 갈 때면 음악소리와 함께 “힐, 토”를 외쳐대는 무용선생님의 구령소리에 맞춰 발레복을 입고, 바를 잡고 있는 여학생의 아름다운 자태를 연상하곤 혼자 가슴 쿵쾅거리며 지나 다녔다. 어쩌다 무용학원 남자 원장선생님은 구경하러 오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가끔 나를 불러 원장실에서 부산의 예술계이야기를 해주는 건 좋았지만 너무 만지고 해서 싫었다.
무용학원을 지나 미술학원 문을 열기도 전부터 들리는 김강석선생님의 쿨럭 거리는 기침소리는 오늘도 내가 그림을 배우기 전에 당연히 통과 의례로 들어야만 하는 가슴 앓는 소리 통증이었다.
미술학원의 김강석선생님에게서 자존심과, 책보기와, 글쓰기를 배웠다. 미술이 재능과 솜씨로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병환 중에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시는지 경청하지 않으면 ‘생각도 없이 작업하는 놈’이라고 아주 기분 나빠 하셨다. 백남준선생 이야기를 자주 하시고, 부산의 일부 선배작가의 욕을 어린 우리에게도 아주 심하게 하셨다. 그리고는 김청정(조각)선생님 등 신문지상을 통해 필화사건으로 논쟁도 잦았다. 오히려 요즘 언론이 아주 다양해 졌는데도 작가의 발표 작업에 대한 논쟁할 지면이 없는 점이 아주 이상하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작가는 엄청 많아 졌는데도 평론가의 수는 너무 작다. 역시 이론교육에 대한 대학교육 커리큐럼이 잘못되어 온 결과다.
당시 예술철학서나 미술사 서적이 제대로 있지도 않았지만, 선생님께서 앉아 계셨던 의자 뒤 책장에는 늘 일본의 <미술수첩> 등이나 영어 원서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선생님은 늘 그 책들을 자주 보기를 권하셨다. 나중에 홍익대대학원 졸업논문을 쓰면서 원서를 직접 번역하면서 공부했던 경험은 그때의 좋은 습관이 몸에 배였던 것 같다.
부산의 반듯하고, 칼 같은 미술평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던 분으로 유명하셨지만 자존심 강한 작가들에게 테러도 많이 당하셨다 했다. 그러나 평소 학원에는 주로 차동수, 김영교, 하인두선생님 등 몇 분이 실기지도를 해주시고, 이용길(판화), 최민식(사진) 선생님과 김규태(국제신문 편집국장)기자 등 여러분이 많이 놀러 오셔서 또 그림지도와 그림이 무엇인지 말씀도 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책과, 자존과, 미술이 재능과 솜씨로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걸 좋아하셔서 늘 나를 잡고 지겹도록 장황하게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다. 더군다나 화실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박생광, 김영교, 하인두, 김구림선생님 등의 기라성같은 작품들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특히 참 정말 황당하게도, (이건 비밀인데~ㅎ) 유화는 그리고 싶고, 캔버스 살 돈이 없어서 고심하던 중, 마침 정물대 뒤쪽에 <왕비다방>에서 개인전시를 마치고 팔지 못한 하인두선생님의 작품이 많이 재여 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작품위에다 몰래 내 정물화를 덧칠하여 그리기도 했다. 일본화풍 왜색조의 박생광선생님 작품은 창가 쪽 벽 옆에 낮게 걸려 있었다.
병중이신데도 직접 자료를 보여주시면서 기침을 계속하면서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는지 안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아픈 것은 그 후 얼마 사시질 못했다. 44세의 한창 나이로 요절만 않으셨다면 한국의 화단 비평에 큰 획을 그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학원을 접게 되었을 때, 찢어지게 가난한 선생님의 대청동 산비탈 단칸방으로 동생분과 함께 리어카에 그 많던 학원의 그림들과 책을 실고 갔다.
왜 내가 직접 리어카를 산으로 끌고 가고 있는지?, 여기는 어디인지?, 그리고 그 많던 원생들 모두들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림을 어디서 해야 될지 몰라서 혼자 눈물을 질질 흘리며, 큰소리 내어 꺼이꺼이 하고 소리 내어 울며 오르막 골목길을 걸었다.
다 안고 살았으면 좋을 그때의 많은 학원 선후배, 또래 그림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깊은 동료애를 느낀다.
한국화가 신현대, 목공예가 (고)조현부, 조각가 (고)이종빈, 화가(고)송주섭, 정복수, 류성철, 박충금, (고)김종수, 판화가 안병옥, (고)이승남, 박현수, 영화감독 박광수 등. 그리고 그 많던 미술학원의 예쁜 여학생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계속>
고3 절 졸업앨범 사진

예유근 芮遺根 (Ye, you-gun) 1954 釜山生 Born in Busan
● 1975~79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졸 ● 1979~83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졸
●개인전:9회(서울,부산)/단체전 및 국제전 : 2019 행복한 나들이전(갤러리GL/부산)외 약460여회 국내외전 출품 / 경력:부산미술협회 부이사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 부산현대작가회 회장, 브니엘예고 예술교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등 역임
▪ 석사학위논문
美國抽象表現에 있어서의 同時的 두 性向(1983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 연구논문
현대미술정신의 저류에 대한 소고(1996) 동의대학교 예술대학회지
미술평론가 고이시우선생-부산화단의 선비(학술논문학술지예술부산 통권 제42호 (2006. 3·4)
▪ 수상
1981 부산미술대전 서양화부문 대상, 1990 제1회 청년미술상(공간화랑주관)●수상:1981부산미술대전 대상, 1989부산청년미술상
●현 : 부산미술인촌 추진위원장, 부산비엔나레 이사 / ●작품소장 :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부산시립미술관, 그랜드호텔, 동방호텔, 지오 플레이스, 온종합병원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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