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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평전>20.대구시절<5> 강신석화백과의 우정, 그리고 영남대학교로의 이직

작성일 : 2023.09.01 08:38

<김춘수평전> 20.대구시절<5>

 

강신석화백과의 우정, 그리고 영남대학교로의 이직

-김춘수 시인의 대구 시절(5)

 

양 왕 용

 

경북대학교에서 김춘수 시인이 맡은 유일한 보직은 197291일부터 2년 동안 맡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학과장이 유일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혔다. 우선 72학번이자 시인인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이상규(1953-) 명예교수에게서 들은 김춘수 시인 학과장 시절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그 당시 국어국문학과 출신들의 가장 안정적인 직장은 교직과목을 이수한 후 중등학교 국어 정교사 자격을 취득하여 국어교사가 되는 길이었다. 70년대에만 해도 학과 정원의 전원이 교직과목을 이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어국문학과 정원이 그 전 해 만 해도 15명이었다가 72년에 20명으로 늘어났으나 미처 교직과목 이수 정원변경을 교육부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하여 5명이 탈락될 수밖에 없게 되는 낭패를 당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대체적으로 성적순으로 정하는 것이 상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학과장 김춘수 시인은 성적순보다 그냥 사다리 타기로 하자고 하여 학생들이 그대로 수용하여 5명이 탈락되었다고 한다. 이상규 교수와 그리고 KBS 아나운서이자 명사회자로 이름을 떨친 왕종근 방송인, 뒷날 중견 언론인이 된 두 동기남학생과 여학생 한 사람이 탈락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락된 줄 알았던 교직과목 이수배정은 김 시인의 노발대발로 그 뒷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었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어제 육군대령이라고 자기의 신분을 밝힌 학부형이 김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왜 성적순으로 선발하지 않고 사다리 타기를 했느냐고 항의하였다면서 그래서 학점 조금 잘 딴 것이 대수냐면서 다 실력 있는 학생들이라면서 야단을 쳤다고 하는 바람에 육군대령을 아버지로 둔 왕종근 동기가 크게 곤란했다고 한다. 이렇게 노발대발한 김 시인의 질책으로 이들은 정말 열심히 학업에 임하였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었다면서 이상규 시인의 동기들이 만날 때마다 화제에 올린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의 부끄러운 과거가 생각났다. 필자가 김 시인으로부터 들은 첫 과목은 1964년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2학년 1학기 <현대시론>과목이다. 그 때에 김 시인은 필자를 연구실로 불러 시험문제를 주면서 강의실에 가서 칠판에 판서를 하고 시험이 끝나면 답안지도 거두어 연구실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필자를 조교처럼 인정하여 무감독으로 시험을 치룬 것이다. 모든 문제에 필자는 정말 자신 있게 시험지 전면을 꽉 차게 답으로 메꾸었다. 그런데 학기말 성적을 받아 보니 전공과목 가운데 가장 낮은 60점이었다. 필자는 그 순간 정말 당황하였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시인으로서 혹은 시 연구자로서의 가능성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는 그 당시에는 직접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한참 지난 후에 왜 그렇게 되었냐고 항의 비슷하게 말하니 김 시인의 대답인즉 그래 연필로 새까맣게 잘 알아보지 못하게 적은 답안지가 하나 있더군. 그게 자네 답안지였나?” 하시면서 그럴 수도 있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시는 바람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말하자면 악필로 인한 불이익을 당하여 그 다음부터는 모든 과목의 답안지 작성에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필자가 대학 교수가 되어서는 악필의 답안지도 꼼꼼히 읽어 주면서 채점을 하게 되는 습관도 그 때에 연유된 일이었다.

김춘수 시인을 회고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원고료를 철저하게 챙기고 돈에 대하여 인색하다는 글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그런 김 시인의 면모를 1965년 연말 필자의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때 경험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월간 시문학2회 추천을 앞두고 생애 최초의 상경을 감행했다. 시문학을 발간하던 문덕수 시인을 찾아뵙기 위하여 상경하였는데 그 때에 김 시인으로부터 사상계사로 가서 편집장 유경환 시인에게 원고료를 받아 오라는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원고료를 받지 못하고 곧 보내드린다는 답변만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서 생각나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마산 시절부터 깊은 교분을 나누었던 강신석(1916-1994) 화백이다. 강 화백은 <한국향도문화전자대전>(창원)의 기록에 의하면 1916년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1945 하르빈 공대 교수로 있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으며 1952년에는 해군의 종군작가로 참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강 화백은 1960년대에는 주로 마산의 다방 <외교구락부> 등에서 활동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파스텔 화가였는데 파스텔이 갖고 있는 부드러움과 따스한 느낌이 작품 속에 잘 드러나 있으며, 국내 전시는 물론 이태리, 프랑스 미국 등에서 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김 시인의 회고기 나의 예술인 교우록, ( 강현국 편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2019, 학이사> pp263-269 )’강화백편에 의하면 마산 시절부터 꽤 가까웠던 사이로 알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바처럼 3.15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현장인 마산 3.15의거를 같이 겪기도 하였다.

강 화백은 말년에 미국 뉴욕에서 후두암으로 작고하였는데 김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경북대 철학과 하기락 교수와 아니키스트로 의기투합하여 하 교수가 강 화백이 미국에서 투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가는 길에 국내 유명한 한의사에게 특별히 조제를 부탁한 한약을 들고 방문하였다고 한다. 김 시인과는 시화전을 마산과 부산 그리고 대구에서 여러 번 가졌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1967년 필자가 대학원 1학년 초기 대구에서 처음으로 시화전을 가졌다. 그 때에 대구 중앙통 인근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있던 강 화백을 여관과 다방 그리고 전시장에서 몇 번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도 대구의 맥향 화랑에서 40점의 작품으로 두 번째 시화전을 가졌다고 이상규 교수가 기억하고 있다. 이 교수가 학부 시절이었지만 김 시인의 부탁으로 강 화백의 길 안내 역으로 가깝게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시화전의 편당 가격은 10 만원 정도 하였으며 전시회가 끝날 무렵 거의 다 판매가 되었다고 한다. 화랑 대표인 김태수 선생이 화랑 대여료도 받지 않고 판매 대금 전액인 400만원 가까운 돈을 김 시인에게 전하니 그 자리에서 김 시인이 헤아려 보지도 않고 강신석 화백에게 뉴욕의 가족을 만나려 가는 여비나 하라면서 건네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우정에 감동하였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하였다고 한다. 사실 40편에 가까운 작품이 다 팔리는 것과 화랑대표의 대여로 받지 않는 것과 김 시인 행동은 지금 같은 풍토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1970년대 대구에는 이런 낭만과 인정이 존재하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시화전을 자주 한 것 말고도 김 시인의 작품 속에 강화백이 여러번 등장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강 화백의 호는 화구花龜이다. 이것을 한글로 풀이하면 꽃밭의 거북이 된다. 사실 강 화백은 작은 키에 큰 눈을 가진 모습이 거북과도 닮았는데 김 시인의 시 꽃밭에 든 거북(195961일 판 시집 꽃의 소묘에 처음 수록)은 김 시인의 꿈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강 화백을 두고 쓴 시라는 짐작이 가는 김 시인의 회고의 글이 있다.(앞의 글 PP264-265 ) 강신석 화백은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애연가였다. 이 파이프를 대상으로 한 시가 강 화백의 파이프(19691125일 판 시집타령조·기타에 수록)이다 이 작품은 김 시인의 앞의 회고기에도 전문이 인용되어 있다.

 

어느 봄날

강 화백이 물고 있는 파이프에서

강 화백의 얼굴만한

커단 낙엽이 지는 것을 보았다.

어느 가을날

강 화백이 물고 있는 파이프에서

시네라리아의 귀여운 한 송이가

반쯤 피었다 지는 것을 보았다.

파이프를 물고 있을 때의

강 화백의 쌍거풀진 커단 눈은

언제 보아도 젖어 있다.

-강 화백의 파이프전문

 

김 시인이 인용하면서 사용한 텍스트는 19941125일에 나온 민음사 판 전집이다. 19691125일 판 시집 타령조·기타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앞에서 언급한 1967년의 제1차 시화전 때를 전후하여 쓰여진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커단이라는 시어는 커다란의 경상남도 사투리이다. ‘시네라리아는 지중해 카나리아군도가 원산지인 국화과의 다년초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가을에 파종하여 봄에 피는 1년 초로 취급된다. 12-13°c의 저온에서도 잘 잘라고 파랗게 혹은 빨갛게 국화 모양으로 피는 꽃은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다. 이 시에도 김 시인의 60년대 후반의 특징인 무의미시의 경향이 보이고 있다. 강 화백의 파이프에서 나오는 연기를 봄에 지는 낙엽으로 비유한 것과 가을날의시네라리아꽃으로 비유한 표현이 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무의미적 상상력만 납득되면 그렇게 어려운 시는 아니다.앵초(시집남천1977p100-101)강신석화백께라는 부제가 붙은 일종의 헌시이다. 그리고 김 시인의 장시이자 대표작인 처용단장 3(현대문학19904월호<통권424>-19914월호<통권433> 연재)에도 44-46에 걸쳐 강 화백의 뉴욕에서의 죽음과 파이프와 시네라리아가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은 강 화백(1993420일 판 김춘수 산문시 서서 잠자는 숲수록)이다. 이상으로 볼 때 강 화백은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0년 동안 김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고 있다. 김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이 강 화백이다. 1970년대 후반의 필자와의 인연은197651일 자로 필자가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전임강사로 임용된 직후인 부산대학교 개교기념행사인 효원축제(515-20일까지)의 문학동아리 부대문학회의 <문학의 밤. 행사의 초청 시인으로 김 시인을 모셨다. 그 날은 비가 간간이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행사장 대학극장(현재 10.16기념관)이 문학회 회원과 일반 학생들로 가득 찼다. 강연을 마치고 나니 여학생들이 서로 가져온 김 시인의 시집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였다. 김 시인은 예상 못한 환호에 경북대학교는 이렇지 않는데를 연발하며 여학생들이 가져온 시집에 일일이 사인도 해 주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그 당시 풍족하지 못한 예산 탓도 있었으나 용호동 우리과 학부모가 운영하는 횟집에서 식사를 대접하였는데 김 시인이 끝내 우리 집으로 가서 주무시겠다고 하여서 대학 옆의 장전동 121-12번지 우리 집으로 김 시인을 모셨다. 두 아들들이 자던 방을 비워 잠자리를 마련해 드렸다. 다음해인 1977년 가을에는 부대신문사의 행사로 해마다 개최하던 문인초청 강연에 이청준 소설가와 하께 모셨다. 이때에 예전에 해인대학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던 허종현 총장을 방문하고 나온 뒤에 본관 로비에서 김 시인과 이청준 작가 그리고 그 당시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재학 중 이원섭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한 강선학(1953-) 시인이 학보사 기자 신분으로 동행했는데 네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김 시인의 문학앨범 성격의 저서에 종종 소개되기도 하였다.

국회의원 시절인 1984년에는 부산의 문학단체가 초청한 필자와 김 시인의 공개 대담을 갓 개관한 대청동의 <가톨릭센터>에서 가졌다. 그 때에도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강당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필자는 청중 가운데 김 시인의 시 의 낭송 희망자를 찾았다. 여러 희망자 가운데 여고생을 지명하여 암송하게 하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2시간에 가까운 대담을 마친 후에는 몇 사람의 질문도 받았다. 그런 후 약 달포 뒤에는 대구에서도 같은 행사를 가졌다. 그 때의 일로 가장 기억이 남는 일은 김 시인과 청마와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청마의 시에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고 질문하면서 초기작을 언급하면서 김 시인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이다.

이렇게 70년대 후반에 김 시인은 많은 시인 지망생과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그리고 김 시인의 시를 애호하는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시인이었다. 이런 김춘수 시인이 19789월 학기부터 1961년부터 18년 동안 강단을 지키던 경북대학교를 떠나 이웃의 영남대학교로 옮긴다. 그 당시의 영남대학교의 재단인 영남학원 이효상(국회의원과 국회의장 지냄) 이사장의 임용장에 의하면 교수 11급봉으로 임용기간 197891일부터 1988831일까지로 발령을 받았다. 필자의 기억으로 그 무렵의 영남대학 신문 사설에는 타대학의 유명 교수들을 초빙 사실을 사설로 썼는데 김 시인에 대해서는 문학사에 남을 시인을 초빙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영남대학교로 김 시인이 옮기자 경북대학교는 야단이 났다.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학생들과 교수들은 물론이고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학생들과 교수들이 일제히 김 시인의 영남대학교 이직을 반대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김영희 총장을 찾아가 사표를 수리하지 말라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국어교육과 교수로 뒷날 경북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천시권 교수에게 필자가 직접 들은 바로는 김영희 총장을 찾아가니 김 춘수 교수가 그렇게 유명한 시인이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김 시인으로부터 이 무렵 몇 달을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 두 곳에서 봉급을 받았는데 영남대학교 봉급이 훨씬 많아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중으로 받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겠습니다.” 라고 하자 김 시인은 아닐세. 사실 경북대학교 퇴직금을 받아 자식 집을 마련해주기로 했는데 그 일이 지연되어 낭패를 봤네.“라고 반문하였다. 김 시인의 경북대학교 인사기록 카드에 확인해 보니 19781230일 의원면직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실 김 시인은 197891일 영남대학교에 부임하였는데, 1230일까지 학내 반발을 의식해 김영희 총장이 김 시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아 벌어진 헤프닝이었던 것이다. 이 시절에는 이러한 이중근무도 가능한 일이었다..

영남대학교 시절의 김 시인의 여러 모습은 이기철(1943-) 시인이 쓴 김춘수의 풍경(문학사상사,2020)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 시인은 김 시인이 영남대학교에 부임한 초창기 1년 반쯤 김 시인의 무급 조교로 일했다.(앞의 책 P.17) 이 시인은 김 시인의 연구실이 22층 연구동 복판인 12층에 배정되어 김 시인이 고소공포증을 호소하여 인문관 2층으로 옮겼다고 언급하고 있으며(앞의 책 p16), 김 시인이 영남대학교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일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시인이 1978년에 경북대하교에서 영남대학교로 교수직을 옮겨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봉투를 뜯어보고 연구실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국립대학교인 경북대학교보다 사립대학교인 영남대하교의 보수가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월급을 온라인으로 보내지 않고 현금을 봉투에 넣어 직접 전달하던 시절이었다.(이기철, 김춘수의 풍경2020, 문 학사상사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