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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103. 정치와 수사학

작성일 : 2023.08.28 11:45 수정일 : 2023.08.28 11:47

정치와 수사학

/윤일현

 

넓은 영토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로마제국은 항상 갈등의 소지를 갖고 있었다. 제국을 통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지배 계급 간의 소통과 화합이 필요했다.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가 수사학이었다. 수사학은 지배층의 결속과 우호적 관계를 맺게 해 주는 문화적 장치였다. 엄격한 형식을 갖춘 수사학의 표현 방식은 존경받을 만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통념이 사회를 지배했다. 수사학은 교육받은 사람들의 공통 언어였고, 교양인의 필수 조건이었다. 제국 변방의 사람도 수사학에 능통하면 로마에서 교양인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수사학은 후기 로마 제국에서는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일컬어졌다. 엘리트들에게 수사학은 공직 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핵심 과정이었다. 그들은 수사학을 배움과 동시에 엄격한 말하기 예절도 익혔다. 목소리가 적절한 톤을 유지하지 못하면 반항적이고 단정치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품위 있는 화법은 교양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었다. 수사학이 가르치는 항목 중 상당 부분은 자제력과 관계있었다.

 

평소 철천지원수라도 상을 당하면 상가를 찾아 조문하고 상주를 위로하는 것이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대통령 부친상을 두고 야당 대표의 팬 카페에는 대통령과 부친을 조롱하는 글이 엄청나게 올라왔다. 입에 담기도 싫지만, 우리가 지금 어느 지경에 와 있는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 부친이 광복절에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기쁜 광복절” “축배를 들자” “나라 말아 먹을 아들을 생산한 자. 빠른 시일 내에 아들 부부 데리고 가라, 저런 인간에게 별세라는 말이 아깝다.” 대통령 지지자들의 막말도 크게 차이가 없다. “전과 4범이 여길 어디라고 와” “안면 인식장애인, 당장 구속하라문상 온 야당 대표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이념과 편 가르기에 눈이 멀면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일까.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이 모든 것은 정치인 스스로가 자초한 현상이다. 스마트폰 보급과 SNS, 유튜브 같은 비제도권 매체의 활성화는 팬덤이라는 배타적인 결사체가 반대 세력을 향한 증오심과 분노를 아무 제어장치 없이 마구 쏟아내게 했다. 특정 정치인을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은 팬덤이라는 일종의 폐쇄적 결사 항전 집단을 결성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됐다. 정치인도 손쉽게 열혈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팬덤의 과격한 언행을 방관하거나 심지어 부추기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지지자를 돕기보다는 그 정치인이 지지층을 확대하는 데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해당 정치인은 단호하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못 하고 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남을 깎아내리기는 쉬워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지지해 주기란 어렵다. 그러니 표현이 거칠고 지나쳐도 쉽게 내칠 수가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팬덤을 의식하여 정치인 자신이 저속한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 법사위에서 일상이 된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의 이성을 잃은 언행은 양식 있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보통 사람도 하기 어려운 막말과 고성, 냉소와 비아냥거림, 노골적 무시와 인격 모독이 질의응답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분노를 자제력 상실과 연관시키는 것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로마 제국이 팽창하면서 지역 간, 지배 계층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분노 조절은 통치 계급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 엘리트에게 자제력분노 조절은 자기 관리와 처신의 핵심 요소였다. 분노 조절의 실패는 정치적 고립을 의미했다. 일찍이 로마에서는 분노를 영혼의 질병으로 규정하고 가장 심각한 병으로 간주했다. 후기 로마 제국의 수사학은 분노 조절이라는 감정 수업을 포함하게 됐다. 대기업은 업무 수행에 필요한 기본 자질 검증을 위해 그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적성시험을 본다. 영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배운다. 모든 기업은 구성원의 자질 향상을 위해 직무 연수를 한다. 국민 정신건강과 자라는 세대들을 위해 정치나 공직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업무 수행에 필요한 수사학과 화법 등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언행의 품위와 품격, 분노 조절 방법 같은 교양 교육을 받게 한 후 자격시험을 치게 할 필요가 있다. 오죽 답답하고 한심하면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