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김춘수 평전
작성일 : 2023.08.25 10:36 수정일 : 2023.08.25 10:39
<김춘수평전(19);대구<4>>
명암明暗이 교차된 70년대의 김춘수 시인
- 김춘수 시인의 대구 시절<4>
양 왕 용
김춘수 시인의 시집 가운데 의미 있는 시집으로 1969년 11월 25일 대구의 문화출판사에서 낸 『타령조打令調·기타其他』가 있다. 이 시집은 국판 112면 양장으로 케이스까지 있는 시집이었다. 그리고 문화공보부의 작가기금에 힘입어 출판된 것이라는 점도 밝히고 있다. 김 시인도 후기에서 밝히고 있지만 이 시집은 1959년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로 낸 제4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후에 10 년 만에 낸 제5시집이다. 의미 있는 시집으로 평가할 수 있는 까닭은 이 시집에 수록된 연작시 「타령조」 9편 때문이다. 이 시편들은 1960년대 상반기에 발표된 작품으로 여기서 타령조라 한 것은 ‘장타령場打令이 가진 넋두리와 리듬을 현대 한국의 상황하에서 재생시켜보고 싶었다.’고 후기(『김춘수시전집』<현대문학사, 2004> P253)에서 김 시인이 밝히고 있듯이 시 속의 문맥적 의미보다는 리듬에 의존한 작품이었다. 그 자신 처음의 의도와 달리 기교적 실험이 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50편정도 되지만 9편만 시집에 수록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 기인이 추구하게 되는 무의미시의 징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연작시 외에도 무의미시의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나의 하나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인동잎」 등이 수록되어 있고 「처용 삼장三章」에서는 김 시인 자신의 문학적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는 ‘처용’이 시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한다.
김 시인은 이 시집을 엮기 전인 1969년 4월에 전봉건 시인이 주재하여 창간된 시 월간지 『현대시학』에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 구상, 전봉건 시인과 함께 편집위원 겸 추천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창간호부터 장시 「처용단장·1부」를 연재하고 있었다. 이 시집에 1부만이라도 수록하고 싶은 생각을 김 시인은 가지고 있었으나 앞에 열거한 「처용삼장」과의 이미지 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다음에 완결을 본 뒤에 따로 책을 내겠다고 하고 있다.
이상으로 볼 때 1960년대부터 근 10년 동안 「타령조」 연작시(사실 그 첫 작품은 1959년 12월호 《사상계⟫에 발표됨)에서 김 시인은 그가 말하는 ‘무의미시’를 실험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물이 시집 『타령조·기타』였던 것이며, 1969년에 시작되어 1970년대 초반 『현대시학』에 발표된 장시‘「처용단장 1부와 2부」에서 그 무의미시적 경향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72년에는 <시의 이해>라는 부제가 붙은 『시론』을 역시 대구의 출판사인 송원문화사에서 발간한다. 이 책의 구성은 문덕수 시인이 주재하고 청운출판사 정태진 사장이 발행한 1965년 《시문학⟫(1965.4-1966.12, 통권20호) 창간호부터 「작시강의」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시론 (제 1회에 이미 목차, 1.운율과 장르, 2.이미지, 3.유추, 4,단시와 장시가 제시되어 있었으며 1965년 4월 창간호부터 1966년 4월까지 10회 연재를 마침)을 <제1장 운율·이미지·유추>라는 제목으로 편집하고 제 2장에는 그 동안 각종문예지에 청탁을 받아 쓴 한국현대시의 유파의 통시적 고찰을 <한국의 현대시>라는 제목으로 11항목으로 나누어 편집하고 있다. 즉, 신체시 시기를 딜레땅띠즘,으로 시작하여 당대의 김현승, 신석초, 박태진, 박성룡의 시를 중도파로 규정하고 있다. 제3장에는 <시인론>이라는 제목으로 ‘자유시의 전개’라는 제목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청록파에 대한 글과 이상화론, 김소월론, 박남수론 등이 편집되어 있다. 이 책은 대학 학부의 시론 강의용으로 편집된 탓에 필자가 부산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한 1974년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교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74년에는 민음사가 기획한 오늘의 시인총서에서 작고한 김수영의 시선집 『거대한 뿌리』와 함께 김 시인의 시선집 『처용』이 발간되어 그 당시의 시인 지망생 대학생은 물론 많은 문과 대학생들에게 읽혀 시집으로는 드물게 베스터 셀러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시선집에는 초기작부터 「타령조」 연작 9편 전부와 유년기의 체험이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무의미시가 된 「처용단장 1부」가 편집되어 있다. 이 무렵 많은 대학생들에게 읽히게 된 배경에는 그들이 고등학교 시절 3학년 국어교과서에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배웠기 때문에 친숙하고 생존해 있는 한국의 대표적 시인의 작품집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집 외에 월평과 시에 대한 단평 그리고 그 자신의 무의미시에 대한 견해 등으로 엮어진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1976,문학과지성사), 『시의 표정』(1979,문학과 지성사) 등이 이 시기에 발간되었다. 이 두 시론집은 김 시인께서 필자의 이름을 써서 직접 전해 준 두 권의 저서이다. 그리고 최초의 산문집 『빛 속의 그늘』(1976,예문관)도 이 시기에 엮어졌다.
이러한 왕성한 창작활동과 저서 발간 등에 걸맞게 월간지 《현대문학⟫과 《현대시학⟫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많은 시인들을 시단에 배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우선 《현대문학⟫의 첫 추천 시인으로 박청륭(1974년 4월호, 75년 11월호),다음으로 김정란(76년 3월호,76년 10월호), 강현국(75년11월호,76년 10월호), 박재열(78년 2월호,78년 7월호) 이진흥(78년 2월호, 78년 7월호), 이정주(79년 2월호, 82년 5월) 이구락(1979.7 초회) 등의 시인이 1970년대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3회 천료가 아니고, 2회천료였다.
이 시인들 가운데 경북대 출신의 첫 시인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출신인 강현국 시인이었다. 강 시인은 경북대학교에서 1988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3년부터 2007년까지 대국교육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지냈다. 대구에서 발간되는 시 전문 계간지 《시와 반시⟫ 주간 겸 발행인으로 그곳에다 김 시인의 <나의 예술인 교우 록>이라는 글을 연재할 기회를 제공했다. 2017년에는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시인김춘수의 문학과 삶>(학이사)이라는 김 시인 관련 다양한 글들을 엮은 책을 낸 바 있다. 그 가운데 강 시인과 김춘수 시인의 대담은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진흥 시인의 경우 서강대 독문과와 철학과에서 공부한 서울 토박이인데 김춘수 시인의 시에 매료되어 경북대학교 국문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대구 시인이 된다. 그는 1970년 대구에서 군복무중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대구와 인연을 맺는다. 그는 7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김종길 시인의 심사로 입선하기도 하였으나 78년에 다시 김춘수 시인의 추천을 받는다. 심지어 1978년 김춘수 시인이 영남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자 박사과정은 영남대학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김 시인이 1981년 민정당 창당 주비위원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하자 실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김 시인을 박사학위 논문심사위원으로 모시기도 하면서 방송심의위원장으로 있던 서울 프레스 센터를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진흥 시인은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 김 시인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김 시인이 2004년 11월 29일 작고한 직후 각종 매체에 집중적으로 게재된 김 시인과의 인연을 밝히는 글 「김춘수 소전-내가 본 대구시절 김춘수 시인」(《현대시학⟫2005년 2월호)을 쓰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현대시학⟫을 통하여 추천한 시인은 생각 보다 많지는 않다. 지난 2월호에 언급한 이상규 시인(1978년)과 김기현(1979년) 시인 정도이다. 그러나 그 뒤 《현대시학⟫과 김춘수 시인은 작고하기 직전까지 인연을 맺어 많은 시인들을 배출시켰다.
지금까지 살펴본 70년대의 김춘수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입지는 꽃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로로 탄탄하였다. 그렇다면 대학교수로서의 입지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김춘수 시인의 인사기록 카드에 보면 1972년 9월 1일부터 2년 동안 국어국문학과장을 한 것이 경북대학교에서의 유일한 보직이다. 이 당시에 재학한 72학번 이상규 시인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많이 들었다. 그 외 73학번 김기현 시인(《현대시학⟫1979년 데뷔, 경북대학교 국어국문과 고전시가 교수 지냄, 작고), 역시 같은 과의 74학번 김두한 시인(《현대시학⟫1988년 데뷔,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김춘수시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건동대학교 교수 지냄),74학번 손병희 시인(《심상⟫1986,데뷔, 안동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현재 이육사문학관 관장) 등이다 이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특히 손병희 시인의 경우 현대시 전공으로 1978년 김춘수 시인이 영남대학교로 옮기는 해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 시인은 그 당시의 경북대학교 김영희(1918-1994)총장과 갈등이 심하였다. 김영희 총장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해 졸업하였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김천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대구사범대학(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전신)영문과를 졸업하고 사대부고 교감,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교수를 거쳐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영어학 교수가 되었다. 박사학위는 부산대학교에서 받았다. 1972년 1월1일 제6대 경북대학교 총장에 부임하여, 1977년 제7대 총장으로 연임하였으나 1979년 2월 20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그가 재임한 시기는 공화당 정부에서 유신시대 (1972년10월17일)가 시작한 시기였다. 그로 인하여 유신 반대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이 빈번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학생은 물론 교수 심지어 그 당시 학생처장을 하던 의과대학 이시형 교수와도 의견충돌이 잦았다. 그는 비서를 대동하고 교수들의 수업도 참관한 권위적인 총장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일은 1975년 시작한 교수재임용제도에서 자기가 소속했던 영문과 교수 4명을 포함한 많은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이었다.
김춘수 시이은 그 당시 학과장이었으나 이러한 권위주의에 정면으로 맞섰다. 수업 중 참관을 명분으로 들어서는 총장일행을 고함을 치며 나가라고 하여 일행을 줄행랑치게 하고, 교수회의에서 배레모를 쓰고 있는 김 시인을 향하여 모자를 벗으라고 하자 회의장을 퇴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눈에 가시가 되자 외부에서 의뢰하는 각종 심사위원에서 배제시키고 급기야는 심사위원회를 만들어 연구비 신청을 못하게 만들기도 하였다.(김진경;「우울하던 시절의 김춘수선생」(『김춘수연구』(1982,학문사, p559)
이러다가 1975년 재임용 교수 탈락 사건이 생긴 것이다. 나중에는 당당하게 복직되긴 하였지만 심지어 같은 과 젊은 교수도 탈락되는 사태를 맞았다. 이러한 불합리성이 김춘수 시인 자신이 자술한 연보에 의하면 1979년 영남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어국문과로 옮기게 된 중요 요인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이남호 편『김춘수 문학앨범』<1965,웅진출판사>pp295-296)
이 시기의 고통에 대하여 한 가지 더하기로 한다. 1972년 그는 그 동안의 지병처럼 달고 있던 위궤양이 심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위 절제 수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위궤양 수술 후에는 오히려 외모가 건강해지고 시인다운 구도적 풍모가 살찌고 위풍당당해졌다고 한다(김진경;앞의 글, 앞의 책 P557) 필자가 생각하기도 그러했다. 1976년과 1977년 두 차례 부산대학교에 강연 연사로 초빙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풍모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위를 다쳐 가지고 있던 심하지는 않은 수전증도 사라져 있었다. 김 시인을 같은 과에서 오래 모신 권기호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수술 후에 서서히 수전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50대가 되면서 강연이나 강의 시간의 목소리가 더욱 더 분명해지고 설득력이 있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60년대 초중반 경북대학교 문학동아리 <현대문학연구회>의 3대 명물은 지도교수이신 김 시인의 수전증, 권국명 시인의 말더듬는 습관, 그리고 필자보다 한 해 위인 김등 선배의 약간 아사풍기가 있던 입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점을 오히려 신비로움으로 인식하고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했다. 말하자면 70년대 후반 김 시인의 수전증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60년대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그 시절의 낭만과 신비로움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김 시인의 70년대 대구 생활은 시인으로서는 밝은 나날이었으나 교수로서는 우울한 나날이었다.
*양왕용;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 독교작가회의 한국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