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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8.20 06:39
2-1. 운문사 가는 길
/양선규
청도 운문사(雲門寺)에는 서너 번 갔습니다. 갈 때마다 비가 왔습니다. 주로 부슬비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운문사’ 하면 촉촉이 젖은 대지(大地)와 자욱한 운무(雲霧)가 항상 함께 떠오릅니다. 한 번은 여러 명 부부동반으로 운문사 절 위로 난 산길로도 한참 걸었습니다. 제법 넓고 평탄했습니다. 한담을 나누며 걷기에는 무난한 산길이었습니다. 아마 그런 편안한 산행은 속리산 법주사 길 이후로 처음이었을 겁니다. 운문사는 법주사처럼 산 아래 평지에 편하게 앉아있는 절입니다. 가야산 해인사와는 좀 다릅니다. 젊어서는 해인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절 입구에서 절까지 이어지는 계곡 길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직장이 청주에 있던 시절에는 속리산 법주사를 종종 찾았습니다. 학생들의 단체 행사 때에도 법주사는 단골 장소로 애용되었기 때문에 자의반타의반 자주 들렀습니다. 법주사와 운문사는 모두 연꽃 지세의 꽃심(연심)에 해당하는 곳에 절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절은 절 안에서 절 밖의 경관을 바라보는 운치가 꽤 있습니다. 절 밖이 모두 꽃잎이니까요. 당연히, 절 안에 들면,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게 하는 어떤 지리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운문사와 관련해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나이 들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동창회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고교 시절, 무턱대고 집을 나와 친구들과 함께 절 근처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다가 조리용 칼을 빌리러 운문사 절방 부엌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때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 돌려 애써 외면한 채 칼을 빌려주던 홍안의 비구니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종내 잊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간적인 내외(內外)를 산중유곡(山中幽谷)의 절간에서 그렇게 당돌히 경험했던 것이 그 친구에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곡진한 필체로 이야기를 적었는지 그 이야기를 듣는 제 가슴까지도 아련한 느낌이 찾아들었습니다. 오래된 ‘첫 느낌’에 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아득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친구에게는 절방 부엌에서 만난 어린 누이의 수줍음이 인생의 시편에서 아주 중요한 한 구절이 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그 이야기와 함께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도 아마 그 까닭에서인 것 같습니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후략)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에서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와 이성복 시인의 「정든 유곽에서」를 연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시에 등장하는 ‘누이’들은 하나 없이 다 ‘망매(亡妹)’라고 한다면 지나친 망발일까요? 제 기억 속의 물기들이, 운문사의 촉촉이 젖은 대지와 자욱한 운무들이, 나이 든 자의 그리움 속에서는 비약이든 망발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속삭입니다. 운문사 그 산중유곡의 애틋한 물기가 저의 성마르고 무디어진 상상력에 한 모금어치 부드러운 수분을 제공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네 시가 속의 누이와 산문(山門)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마지막 경계석(境界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을 그리는 친구는 고개 돌려 외면하는 어린 비구니에게서 이 세상 마지막 누이를 보았다고 전합니다. 산문에 기대어 선 시인은 애타게 누이를 부르며 만남과 헤어짐의 그 덧없는 인생행보를 노래합니다. 누이는 그렇게 세속을 초월합니다. 산문(山門)처럼 누이는 이승을 누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