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작성일 : 2020.06.20 10:43
5. 만 화
날 저물어 들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손발을 씻고 있다. 어머니는 저녁 밥상을 차리다가 아버지에게 수건을 드리며 아이들이 다 있는지를 확인한다. 누구 하나가 빠졌으면 집에 있는 아이에게 없는 아이를 찾으러 보낸다. 대개의 경우 골목 끝에 나가, 정자나무나 동네 어귀 넓은 공터를 향해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달려온다. 노는 아이들 무리에 없을 때는 만화방에 가면 십중팔구 녀석은 거기 낄낄거리며 앉아 있다. 만화방 벽면 베니어판에는 만화책들이 고무줄에 의지한 채 발간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다. 만화방에 갔다가 늦은 날은 아버지로부터 혼이 난다.
만화방에 따라 규정이 다르지만, 한 명만 돈을 내고 둘이서 함께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친구와 따로 돈을 내고 들어가서는 딱 붙어 앉아, 각자 선택한 책을 같이 읽으면 결과적으로는 배로 볼 수 있다. 이발소나 미장원 대기석엔 만화책이 많이 쌓여 있다. 손님이 없으면 머리를 다 깎은 후에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다. 부모 세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만화는 성장기 어느 한 시절, 힘겹고 따분한 일상에 웃음을 제공하며, 팍팍한 삶을 달래고 위로한다.
만화는 제9의 예술, 선으로 표현하는 문학이라 한다. 만화 이전에는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영화, 사진’이라는 8개의 예술이 있었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만화를 제9의 예술로 인정했다. 만화는 그림과 글, 다시 말해 말과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결합하는 양식을 취한다. 만화의 그림은 과장과 생략, 변형이 특징이다. 만화 속의 세계는 실제보다 단순하다. 단순성은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미국의 어느 만화 연구가는 “쾌락, 권력, 사랑, 정의, 자기표현, 자기보존, 위신, 부, 권태로부터의 도피, 복수 등이 연재만화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목표”라고 지적했다. 만화와 드라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미생’도 이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만화는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적용 범위와 유연성에서 어떤 장르도 따를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만화가 주는 동기유발을 통해 보다 깊이 있고, 수준 높은 다음 단계의 탐구로 넘어 간다. 부모님 세대는 만화와 무협지를 거쳐 동서양 고전으로 독서의 영역을 넓혀 갔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만화를 거쳐 판타지 소설로 나아간다. 문제는 상당수의 청소년들이 그 다음 단계인 고전 읽기로 가지 않고 성인 만화와 추리 소설, 드라마와 영화를 탐닉하는 쪽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편식이 영양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신체의 정상적인 발육을 방해하듯이, 활자매체를 도외시하고 그림과 영상매체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정신 발달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한다. 만화의 단순성과 재미를 뛰어넘어 상상력과 사고력의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를 통한 지적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무엇보다도 고전을 읽어야 깊이와 창의력을 겸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대구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