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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4.우물

작성일 : 2020.06.02 09:40

4. 우물

 

해질녘 마을 공동 우물가는 늘 활기가 넘쳤다. 동네 아낙네들은 함께 모여 쌀을 씻고, 나물을 다듬어 물에 헹구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쌀을 씻을 때 나오는 하얀 쌀뜨물이 도랑으로 흘러내리면, 마을에서 유명한 술주정뱅이 영감을 둔 할머니가 지나가며 누가 저 아까운 막걸리를 쏟아버리나. 우리 영감더러 마시라 하면 환장할 건데라고 중얼거리면 모두가 까르르 넘어갔다. 우물 근처에는 해당화, 찔레꽃, 앵두나무, 탱자나무, 모과나무 등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제멋대로 서 있었다. 햇살이 사선으로 나무에 걸리면, 여인들의 얼굴은 볼그스름하게 노을에 물들었다.

 

간혹 어두운 표정으로 푸성귀만 씻어 황급히 사라지는 여인도 있었다. 눈치 빠른 이웃이 잠시 후 그 집을 찾아 가서 양식 떨어졌나. 쌀 반 양푼 가져 왔으니 이걸로 아이들 죽이나 끓여 먹여라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아낙네들은 마을 우물가에서 시어머니 흉을 보며 된 시집살이가 주는 스트레스를 해소했고, 농담과 잡담 속에서도 서로의 표정과 몸짓, 눈빛을 살피며 상대의 어려움을 직감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혹독한 보릿고개도 인정 많은 이웃이 있어 함께 손잡고 넘어갈 수 있었다.

 

서너 집 건너 한 집 정도는 집안에 개인 우물이 있었다. 여름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우물가로 갔다. 얼기설기 엮은 망태기에 수박이나 참외, 자두 등을 넣어 우물에 담가 두었기 때문이다. 망태기를 건져 올릴 때, 물이 일렁이며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여름 대낮 누나가 등목을 해줄 때, 차갑다고 소리치면 엄살 부리지 말라며 등을 찰싹 한 대 때리던 그 손길, 국수를 삶아 헹구며 사리를 만들 때 국수를 돌돌 말아 입에 넣어주던 엄마의 그 손길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객지를 떠돌던 사람들이 고향에 와서 제일 먼저 찾는 곳은 주로 초등학교 운동장, 마을 뒷산, 정자나무, 강변 모래사장, 낙조의 강둑, 우물가 등이다. 공동 우물가에 서면 마을에 떠돌던 온갖 소문과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자기 집 우물가에서는 제삿날 분주하게 움직이던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물가 봉숭아를 보며 손톱에 분홍물을 들여 주던 누나를 생각하고, 옆집 아이와 깨진 기왓장을 갈아 그릇을 만들고, 분꽃 씨앗을 빻아 화장을 하던 소꿉놀이를 생각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유년기는 존재의 우물이라고 말했다. 유년의 체험은 단순한 행복의 원형으로, 한 개인으로 하여금 행복한 이미지를 이끌어내게 하고, 불행의 경험을 밀어내게 하는 이미지의 중심이라고 했다. 유년의 우물은 유년의 아름답고 슬픈 모든 추억과 경험을 온전한 원형으로 맑고 투명하게 담은 채 한평생 가슴속에 유지된다. 우리 아이에게, 가족 모두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존재의 우물을 만들어 주자.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걷는 고궁, 풀밭, 호숫가, 해변, 도시 공원, 그 어떤 곳이라도 가슴 뭉클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면, 그 모든 곳은 존재의 우물이 될 수 있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대구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