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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5.31 09:49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5)
배호, 파도
이승주 (시인)

1
비로소 노래가 있었다
―배호에게 바침
그대 만나기 전
세상은 가소로웠다.
가짜였다.
어디에도 슬픔은 없었다.
노래가 없었다.
그대 만나고부터
그대 참은 감전처럼
환장하게
내 가슴 훑어 내릴 때
비로소 노래가 있었다.
진짜 슬픔이 있었다.
그리고 슬픔이 어째서 노래가 되는지
그 역설이
오래오래 멀리 돌아오는 메아리인 줄
차마 깨달았다.
시가 무언지도 등단이 무언지도 모를 때, 마냥 청춘이 허기지고 꽃잎에도 햇살에도 눈물 날 때 무작정 그의 슬픔이 좋아 끄적거렸던 시.
2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파도」
유치환의 「파도」를 처음 본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는 사범대학 어문계열로 입학하였는데, 어느 날 나와 같은 반에 내가 조금쯤 혼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여학생과 마침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때 슬쩍 곁눈질로 훔쳐본 여학생의 노트에 이 시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시가 누구의 시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냥 메모한 한 구절인지는 알지 못했다. 여하튼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조금씩 내 관심이 되는 때이었으므로 그 구절은 금방 내 머릿속에 빨려 들어와 저장되었다. 그것은 그대로 어쩌면 그때까지도 고백하지 못하던 내 마음이었다.
유치환의 「파도」는 전체 다섯 행 중에서 네 행을 반복함으로써 “임”을 향해 일어나는 사랑의 마음을 직접 고백하지 못하고 파도에다 고백하고 투정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생생하게 노래하는 데 반해, 배호의 「파도」는 “가버린 그 사람”에 대한 이별의 미련과 회한을 노래한다.
부딪쳐서 깨여지는 물거품만 남기고
가버린 그 사람을 못 잊어 웁니다.
파도는 영원한데
그런 사랑을 맺을 수도 있으련만
밀리는 파도처럼 내 사랑도 부서지고
물거품만 맴을 도네.
그렇게도 그리운 정 파도 속에 남기고
지울 수 없는 사연 괴로워 웁니다.
추억은 영원한데 그런 이별은 없을 수도 있으련만
울고픈 이 순간에 사무치는 괴로움에
파도만이 울고 가네.
“그렇게도 그리운 정 파도 속에 남기고 지울 수 없는 사연 괴로워 웁니다.” 다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그렇게도 그리운 정”이 가슴을 찢어내는 애상(哀傷)인데, 그 울림의 맥은 절묘한 가정적 화법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파도는 영원한데” 파도처럼 영원한 “그런 사랑을 맺을 수도 있으련만” 또 “그렇게도 그리운 정” “지울 수 없는 사연” 때문에 괴로워 우는 “그런 이별은 없을 수도 있으련만” 이 모든 잘못됨은 나의 탓이라는 회한으로 괴로움은 뼈에 사무친다. 사정이 그러하니 어찌 파도인들 “울고” 가지 않을까.
인간의 삶이란 어찌 보면 참으로 부서진 파도 위에 이는 물거품 같은 것. 여기서 나는 문득 오래 전에 익힌 한 말씀을 기억한다. 언제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고등학교 때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때였던가,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던가, 어쩌다 형편 되면 찾곤 하던 남산동 골목 헌책방에서 일본 작가를 번역한, 짙푸른 파도 빛깔의 표지를 한, 하권은 어디 가고 뽀얗게 먼지를 덮어쓴 채 상권과 중권만 남아 이백 원(?)씩 주고 사서 밤을 새워 읽었던 두툼한 삼국지의 첫 문장.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에 거품마냥 일었다 사라지는 영웅들의 모습―”. 또한 파도는 영원하고 파도 위의 삶은 유한한데 그 옛날의 빅토르 최는 다시 내 귀에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파도에서 내려와야 한다. / 넋두리도 회한도 아니다. / 생각나지? 파도의 한 세월. / 파도의 끝을 잘도 곡예 타던 젊음. / 파도에 등 밀려 파도에 파묻히기 전에 / 파도에서 내려와야 한다. // 사람아, 슬퍼하지 마라. / 슬퍼할 일 아닌 것.”(이승주, 「빅토르 최가 내게 이르는 말」)
나는 지금 배호의 「파도」를 들으며 지난날의 그 바닷가에 섰다. 파도에게 내 첫사랑을 고백하던 그 바닷가에 다시 섰다. 파도가 달려든다. 물거품을 남기고 파도가 밀려간다. 나는 지금 부서지는 내 사랑을 보고 있다. 인생도 유한하고 사랑도 유한한데 파도는 영원하고 “내 사랑”의 추억도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