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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수프/ 작고 외롭고 단단한 것들을 위하여 > 1-15. 여자의 아들

작성일 : 2023.08.13 01:26

1-15. 여자의 아들

/양선규

 

넷플릭스에서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가 주인공인 영화를 봤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중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여성이다. 신약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오는 대목은 세 군데다. 예수 덕분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막달라 마리아,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본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이다. 그녀는 거기까지만 등장한다. 예수 부활 승천 이후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는 베드로와 그녀가 많은 갈등을 빚는다. 느낌적으로 이 영화는 예수의 영성(靈性)은 베드로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더 계승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영화 이전에도,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그녀가 성서 이야기 속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그녀에 대한 오래 된 오해(창녀였다는)가 공식적으로 바로잡힌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부당한 오해가 오래 지속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견해와 의문들이 제시된다. 그 중의 하나가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여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이다. 당시의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할,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 결과가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성 박탈이나 비하였으리라고 추측하는 이가 많다. 그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는 더 이상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주입시킬 필요가, 생각을 거부해도 좋다는 면죄부를 발행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베드로와 같은 '반석주의자'(제자들은 개별적인 수행보다 예수의 교회가 기반할 든든한 반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성을 강조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가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었다. 영화는 대체로 그런 맥락 위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부각하고 있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래된 박대와 비하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아들이 없었던 탓이라 여긴다. 일부에서 추측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만약 예수의 아내였다면 예수의 아들이, 만약 그렇지 않고 다른 결혼에서 생긴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이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를 옹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성서적 지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여긴다. 자신의 어머니를 옹호할 '여자의 아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맹자의 어머니나, 율곡의 어머니나, 한석봉의 어머니는 모두 아들이 있었기에 자식 교육에 성공한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가 될 수 있었다. 더 자세한 예로 영화 <글루미선데이>를 보자. 주인공 일로나는 힘든 세월이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철천지원수 한스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자보레스토랑의 새주인)이 있었다. 영화 <글루미선데이>는 그 아들이 어머니와 세 명의 아버지에 대해서 우리(관객)에게 보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가게를 물려준 아버지 자보, 어머니와 정열적으로 사랑한 예술가 아버지 안드라스,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이 세상에 보내준 몹쓸 아버지 한스, 그 세 아버지와 한 명의 천사 어머니에 대한 보고서가 <글루미선데이>인 것이다. 모두 일로나에게 여자의 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신약성서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라는 여자의 아들이 있었기에 성모 마리아인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다. 작가가 되는 여자의 아들들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위대한 어머니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종교적 이념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전제하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은 일차적으로 그녀에게 여자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 누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가?”이다. ‘이야기의 주인이야기를 전하는 자라는 것을 알면 이야기 속 주인공은 그저 인형극의 인형(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뻔히 알면서 꼭두각시에 대해 동정하고 반발하고 일희일비한다. 누가 인형에 줄을 달아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도통 무감하게 된다. 우정 모른 척하기도 한다. 막달라 마리아를 그동안 모른 척해 온 심리도 그와 비슷하다. 힘센 존재들이 자신들에게 고된 노역이 될 일을 그렇게 막아버린 것이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들과 딸들은 기회만 닿으면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 예로 작가 신경숙이 언젠가 엄마를 부탁해라는 어머니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을 떼 누가 내게 물었다. 대학원 수업 때였다. “왜 어머니를 부탁해라는 제목일까요?”라고. 그래서 답했다. 신경숙 소설은 "아버지를 부탁해" 아니면 어머니를 부탁해인 경우가 많다고. 그 전에는 아버지를 부탁해라는 소설들을 많이 썼으니까 이번에는 "어머니를 부탁해"를 쓴 것이라고 덧붙였다. <풍금이 있던 자리><베트민턴을 치는 여자>, <깊은 방> 같은 소설은 사실은 다 "아버지를 부탁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드러내 놓고 아버지 이야기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나선다고 하니까 그 귀추가 주목된다고 말해주었다.

영화 <글루미선데이>에서 일로나가 일체의 윤리 관념을 뛰어넘어 육화된 천사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은 일로나 이야기의 전달자가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천사를 대신한 위대한 어머니였다. 특히 그는 아버지 없이 (영혼의) 유복자로 자란 순수한 여자의 아들이었기에 어머니를 달리 평가할 세속적인 척도가 전무했다. 그가 세상에 오기 전’(그는 80세 생일날 자보레스토랑을 찾은 한스가 자보를 추억하자 그는 자신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대답한다)에 자보와 안드라스는 이미 세상을 떴고 자신의 생부 한스는 어머니와 공모해 죽여야 할 원수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오직 승천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랑스럽고 전지전능한 위대한 어머니만 있을 뿐이었다. ‘위대한 어머니아들-연인으로서, ‘아버지의 말이 애초에 부재하는 우로보로스적 공간(영화에서도 가운데가 움푹 꺼진 자보 레스토랑의 내부 공간은 모태의 이미지를 지닌다)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는, 아버지들이 정한 윤리나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오로지 위대한 어머니의 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로나의 삶이 보여주는 위대한 어머니의 몸은 세상의 모든 갈등과 균열을 하나로 통합하는 공간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파괴와 재생의 블랙홀이다. 그러므로 유복자로 태어난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는 질문은 맥락적으로 우문(愚問)이다. 그에게는 오직 어머니의 몸’, 그 천상의 에로티즘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고 또 구하는 유일한 천리(天理)일 분이다. 그 천상의 에로티즘을 가로막는 것들은 가차 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독점과 지배의 남성성은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곧 사라져야 한다. 자보든 안드라스든 한스든, 아버지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하해 마지않았던 중세의 종교권력자들처럼, 영화 <글루미선데이>를 보고 기분이 별로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꽤 있다. 주로 윤리적 감각에 민감한 성인 남자들이다. 자보와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공유(共有)하는 것에 대해 격하게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봤다. 그런 이들에게는 나는 이 이야기가 여자의 아들이 부르는 애절한 사모곡이라고 생각하라고 권한다. 그러면 조금은 수그러진다. 아버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는 <써머스비>와 같은 영화가 있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여주인공이 나오는 <글루미선데이> 같은 영화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른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어머니의 몸으로 굴러가야 한다. 그 둘은 이 세상을 실어나르는 수레의 양쪽 바퀴들이다.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온전한 운행(運行)이 어렵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느 한 쪽이 힘을 얻는 수는 있어도 하나가 완전히 소거된 인류 사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