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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평전 > 18. 대구시절<3>- 시와 학문의 멘토 김춘수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

작성일 : 2023.08.13 01:20

<김춘수평전 (18); 대구시절<3>>

 

시와 학문의 멘토 김춘수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

-김춘수 시인의 대구시절(3)

 

양 왕 용

 

 

196412월 대학 2학년 겨울 방학 때에 필자는 고향에서 유례없는 시창작의 열병에 휩싸였다. 10편에 가까운 작품을 완성하여 19653월 개학과 더불어 김춘수 시인의 연구실을 방문하였다. 며칠 있다가 작품을 돌려주셨는데 전보다 진일보했다면서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날은 다른 일로 은사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양군하고 은사님이 필자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나는 하고 돌아섰다. 은사님은 예의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자네 요즈음 시 쓴 것 있는가?“ 하시는 것이었다. 필자는 속으로 의아하면서 며칠 전 보신 10편에 가까운 시에 대해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으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나 생각하면서 다음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도 이제 시단에 나가야겠는데, 마침 서울의 시문학지에 내가 추천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부탁하기는 그렇고 우선 거기로 작품을 보내보세.“ 하시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4학년 선배들도 제법 있는데 대학 3학년 1학기에 추천이 시작되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사님께서 필자를 그 동안 쭉 지켜보시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때에 마침 완성한 신작이 세 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 마침 신작 세 편이 있습니다.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며칠을 첨삭한 뒤에 가져다 드렸다. 그 가운데 필자의 데뷔작이고 그 해의 연말 시단 연평에도 두 군데 언급된 <갈라지는 바다>19657월호 시문학(서울 청운출판사 발행 편집인 문덕수 시인)1회 추천작으로 발표되었다. 은사님께서는 내면을 분석한 작품으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는 요지의 과분한 추천사로 추천해 주셨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661월호에 <아침에>가 그로부터 또 6개월 뒤인 19667월호에 <삼월의 바람>이 추천되면서 필자는 대학 4학년 1학기 필자가 세상에 태어난 지 만 23세도 안 되는 나이에 기성 시인이 되었다.

그 당시의 스크랩북에 필자가 경북대학보(경북대신문)에 발표한 시와 함께 1964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 이탄(1940-2010) 시인의 <바람불다>한국일보당선작인 이근배(1940-)시인의 <북위선> 그리고 서울신문당선작인 박의상(1943-) 시인의 <인상>이 스크랩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은사님 덕분에 신춘문예 투고와 기다림 그리고 낙선, 다시 투고와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학 4학년 때부터 시인이 되어 김춘수 은사님이 경북문협 회장이자 예총회장이셨던 경북문단 혹은 대구문단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필자보다 먼저 등단한 경북대 출신 시인들은 은사님이 서울에서 발간되는 문예지의 추천위원이 되기 전이라 박목월 시인에게 추천을 의뢰하면 현대문학에 은사님의 추천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서 박목월 시인의 이름으로 추천되어 데뷔하였다.

그들은 세 사람이다. 데뷔 순으로 열거해 보면 우선 국어국문학과 출신인 권국명(1942-2012) 시인을 들 수 있다. 그는 현대문학19624월호에 저녁 때의 랩쏘디로 초회, 19634월호에 바람부는 밤으로 2, 19646월호에자정子正으로 3회 추천완료하여 김춘수 시인의 경북대 문하생으로는 맨 처음으로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대구의 효성여자중학교에서 오래 교편을 잡다가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정년퇴임 후 작고하였다.

다음으로는 의과대학 출신의 이창윤(1939-) 시인이다. 그는 현대문학19634월호에 잎새들의 해안으로 초회,196410월호에 지나간 해변으로 2, 19663월호에 내 몸을 먼 해안에 둘 때3회 추천완료하였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 후 공군 군의관으로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제대 후 도미하여 미시간주립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 주임 교수를 하다가 정년 후에는 따님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 산디아고로 이주하여 미국 서부지역의 원로 시인으로 아직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출신 전재수(1940-1986) 시인을 들 수 있다. 그는 현대문학19634월호에동면도冬眠圖로 초회, 196410월호에 음악실에서2, 19663월호에 명동 완구점으로 3회 추천완료하였다. 그는 공군장교로 제대 후 서울의 유한공고, 성남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학 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학원 강사로 전직 후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 재학 중에 과로로 쓰러져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다. 전 시인은 김춘수 시인이 정계로 진출하여 서울로 이주하자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김춘수 시인을 모시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들 세 시인처럼 간접적이기는 하나 김춘수 시인의 추천사로 데뷔한 시인은 아니지만 김춘수 시인의 문하생으로 가장 맏형격인 권기호(1937-) 시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김 시인이 경북대 부임한 이듬해인 1962년 그 당시 현대문학과 쌍벽을 이루고 있던 자유문학신인상 시 부문에 무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데뷔하였고 현대문학196411월호에는 비유의 시도 이유라는 평론을 곽종원 평론가로부터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는 진주교대 전임강사를 거쳐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교수가 되어 김춘수 시인을 한 과에서 모시기도 했다. 김춘수 시인이 1978년 영남대학교 교수로 전직하자 국어국문학과의 유일한 시학교수로 2003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김춘수 시인처럼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의 시론 강의도 계속하였다.

이러한 선배 시인들의 데뷔 경위를 볼 때 필자는 비록 19654월부터 196612월까지 2년이 채 안되어 중단된 시전문지 월간시문학이었지만, 명실상부하게 김춘수 은사님의 이름으로 한국시단에 데뷔한 첫 제자이다. 물론 필자의 후배들은 70년대 초부터 현대문학현대시학추천위원으로 계신 은사님을 통하여 많이 데뷔하였다.

통영이 고향인 김춘수 은사님의 유년기의 바다체험과 남해가 고향인 필자의 유년기의 체험이 공통적이기에 필자의 시 세계에 관심을 가져 주시었다. 은사님은 필자의 제1시집 서문에서 필자의 유년기의 체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관념보다 감각이 승하다. 그 감각은 매우 밝다. 그리고 따스하고 포근하다. 한 말로 그의 감각세계는 전형적으로 남국적이다. 양왕용이 경남 남해 태생인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시적 자질은 이미 그의 유년기에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자질은 뿌리가 있고, 여간해서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을 그런 성질의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필자 제1시집 갈라지는 바다<1975>형설출판사,P13)

 

그리고 더욱 신비로운 것은 호적상의 생일이 1125일 생으로 똑 같다. 은사님은 필자보다 정확하게 21년 전인 19221125일 출생하셨고 나는 21년 뒤인 19431125일 출생하였다. 이렇게 볼 때 대학 재학 중 필자를 시인으로 데뷔시켜주신 은사님과의 만남을 필자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필자는 19672월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과 동시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6명이 지원한 국어국문학과에 국어학 전공인 대학 동기와 둘이서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19673월 김춘수 은사님의 추천으로 대구의 명문사학 대륜중고등학교 시간강사를 하면서 시창작과 학문 그것도 그 당시로는 가장 미개척분야였던 현대문학 전공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물론 지도교수는 당연히 김춘수 은사님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자 필자는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 대학에 가게 되면 은사님의 수업 시간이 아니라도 반드시 은사님의 연구실에 들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다시 되살려볼까 한다.

우선 청마 유치한(1908-1967) 시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소감을 되살려보기로 한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 김춘수 시인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수차례 살펴본 바 있다. 김춘수 시인의 유치원 원아 시절 청마와 유치원 교사였던 권재순(1909-1992) 여사와의 결혼식에 화동으로 선발된 것에서 시작하여 경북대학교 시학교수의 천거 등 평생에 걸친 인연이었다. 이런 깊은 인연의 청마 유치환 시인이 1967213일 하오 930분 부산의 여러 문인들과 만나고 귀가하던 도중 부산시 동구 수정동 봉생병원 앞 대로를 건너다가 명신여객 소속 버스(84)에 치여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 도중 운명하게 된다.

그 당시 청마는 부산문인협회 회장(1967125)과 부산예총 회장(128)에 추대되어 억지 감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196541일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에서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보되어 있었다. 전보된 원인은 5.16후에도 계속된 정부와 권력의 비리를 비판하는 글이 화근이 되었으나 표면적으로는 그 당시 문교부 장학관으로 근무하던 표 모 교장(전직 부산사범학교 교장)이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어 경남여고 교장으로 전입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태를 저지시키기 위한 경남여자고등학교 전교생의 소요가 2일간 계속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던 청마가 부산문협 회장으로 회원들과 모임을 한 후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214일에는 부산남여상 입시가 치러지는 날인데 교장 부재로 입시를 치루기도 했다. 청마의 장례식은 217일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와 부산예총, 부산문인협회 합동장으로 전교생들과 예술가, 문인 그리고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소감을 필자는 19673월 대학원에 입학하자말자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들었다.

김 시인은 청마 장례식에 놀란 것은 길 양쪽으로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따라 가는 것으로 마치 사회장과 같은 분위기였다는 것이었다. 청마의 죽음과 장례식 절차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을 필자는 잊었으나 김 시인의 마지막 말 내가 죽은 장례식은 그렇지는 않을거야.’하는 말은 아직도 필자의 귀에 생생하다. 필자가 1969년 봄 부산에 내려와 부산의 문인들과 같이 지금은 동아대학교 캠퍼스에 편입된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이장되기 전(그 뒤 청마 묘소는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묘지를 거쳐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건주봉 선산에 이장되어 있음)의 청마 묘소를 참배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김 시인이 말한 그 여인들은 부산남여상과 경남여고 문예반 학생들과 많은 여학생들로 누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그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덤에 청마의 유해가 하관되고 봉분을 만들기 위하여 시토할 때에 일부 여학생들은 같이 묻히겠다는 소동이 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청마를 여학생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정도를 짐작하는 사건으로는 앞의 경남여고생들의 부산남여상 전임 반대운동과 196373일 대구의 대구여자고등학교에서 경남여자고등학교로 전임하는 과정에도 3000여명의 대구여고 학생들이 전근을 반대하여 진정서를 올리고 집단행동에 들어 간 것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 시인은 이러한 일연의 사태까지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김 시인과 청마의 지상에서의 인연은 끝난다.

필자는 이 때에 들은 청마의 장례식에 대한 강렬한 인상으로 그 다음 해인 1968년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청마의 작품세계를 다루어 보겠다고 김 시인에게 상의한 바 있다. 그러자 김 시인은 청마는 자네 체질에 맞지 않네. 다른 것으로 해보게라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의 대학 1학년 때인 19636세대창간호에 발표된 김 시인의 청록집의 시 세계를 읽은 것이 생각나 청록집혹은 <청록파>는 어떻겠습니까?’ 여쭈니 그래 그것은 자네 체질에 맞을 것이네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청록집을 통한 삼가시인의 작품연구라는 제목으로, 부제세칭 청록파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라고 표지에 명시하면서 쓸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하나는 1968년 신시 60주년에 즈음하여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던 신동아(19686월호)에서 기념 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때에 참석 소감이라기보다 불편하였던 사실을 필자에게 피력한 것이다. 그곳에서 먼저 김 시인이 신시 60년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후에 그를 두고 서울대 영문과 송욱 교수, 김우창 교수(그 당시에는 서울대 소장 교수였음) 고려대 영문과 김종길 교수, 국문과 조지훈 교수 등이 서로 좌담회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의 행사였다. 김춘수 시인을 포함한 네 사람이 시인이고 김우창 교수가 그 당시로는 젊은 비평가였다. 좌담회에서 송욱 교수가 김춘수 시인의 견해를 비판하는 도가 지나쳐 무례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그를 오히려 조지훈 시인은 옹호해 주어서 고맙게 여겼다면서 송욱 교수는 경기고등학교 후배(39)인데 선배인 김 시인(36)에게 그 태도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동안 김 시인이 이렇게 타인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필자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석사과정 1년 선배인 인천대 총장과 경주대 총장을 지내고 동리·목월문학관 초대 관장이었던 장윤익(1939-2021) 평론가에게도 하였다는 것이 장 평론가의 회고기에도 나와 있다. 아마 김 시인으로서는 크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필자는 19692월 석사학위를 받고 대구를 떠났다. 달리 말하면 6년 동안 같은 도시에서 김 시인 곁에 있었던 시절이 다 지나간 것이다. 대학 학부 시절과 대학원 시절을 포함한 6년 동안의 대구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이 가깝고 친척들이 많이 사는 부산으로 이주한 것이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 독교작가회의 한국측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