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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5.06 09:15 수정일 : 2020.05.17 08:51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투쟁이다.
미국의 엔비시(NBC) 방송은 2016년 9월에 〈좋은 곳The Good Place〉라는 철학 드라마를 시작합니다. “좋은 곳”은 천당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사후에 “좋은 곳”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쁜 곳”을 갑니다. 나쁜 곳은 지옥인 셈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엘레노어Eleano는 노인을 상대로 가짜 약을 팔던 사람이었는데 당국의 심사 오류 덕택에 지옥을 면하고 “좋은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곳”에 남기 위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자신의 소울 메이트인 치디Chidi에게 부탁하여 철학을 공부합니다. 치디는 직업이 도덕 철학 교수였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 타하니Tahani는 살아 있을 때 모두 600억 달러를 모금하여 비영리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후 세계인 ‘좋은 곳’에 와서도 선행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322명이 사는 동네 사람들 중 도덕성 서열이 끝에서 두 번째입니다. 왜 그런지 그녀는 몹시 궁금했고, 그것을 알고 싶어서 치디의 강의에 참여합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al Kant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란 결과만 좋은 것이 아니라 동기도 좋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고 합시다. 만약 그 행동이 옳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서 한다면, 행동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습니다. 타하니는 재능이 뛰어난 언니의 그늘에서 평생 동안 살아오면서 부모로부터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했으나 그 행동들은 세상으로부터 명성과 인기를 얻어 언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기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지 순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일한 행동을 이런 동기에서 할 수도, 저런 동기에서 할 수도 있습니다.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타하니의 행동은 외견상 도덕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덕적 행동이 아닙니다. 타하니는 “좋은 곳”에서도 착한 일을 하지만,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오염된 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하니는 행동의 진짜 동기를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 언니를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자신을 추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동기를 모르는 일은 타하니같은 자기 과시적 유형의 인물에게만 일어나는 드문 일일까요? 정신분석은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정신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내가 모르는 나의 정신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정신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욕망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무의식은 내 정신의 일부이지만 내가 모르는 영역이므로 나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입니다. 프로이트 이전까지는 사람들은 무의식의 존재 조차 몰랐으며, 안다하더라도 흐릿하게나마 감지하는 정도였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를 확실히 인정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는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병의 원인이 무의식의 경험에 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환자를 치료하려면 무의식에서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원래 정신 분석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무의식을 탐구하는 이론과 기술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 분석을 개발했던 것입니다.
새롭게 무언가를 창안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분석을 단지 신경증의 치료법이 아니라, 정신생활에서 무의식 체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폭넓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GW 11, 403-404). 정신분석의 본질은 그것이 다루는 소재가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개원 의사였습니다. 그에게 정신분석은 처음에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이론과 방법이었지만, 정신분석의 본질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라는 점을 그는 나중에 확실하게 깨닫습니다.
정신분석은 초기에 신경증 환자의 치료방법이었고, 나중에는 인류의 정신과 문화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정신분석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환자를 대상으로 삼으면 정신 분석은 의학이지만, 인간 일반이나 사회 문화를 대상으로 삼으면 철학입니다. 정신분석의 본질은 세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정신분석은 이 세 가지 원리를 토대로 삼아 모든 인간의 활동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개별적 인간의 행동이나 질병뿐 아니라 도덕, 종교, 예술 같은 사회현상도 포함됩니다. 3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2. 무의식은 의식으로 출현하고자 돌진한다.
3. 의식은 무의식을 억압하여 무의식에 머물게 한다.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를 때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알고 있는 동기와 진짜 동기는 차이가 납니다. 타하니의 사례에서 행동의 진정한 동기는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이곳은 내 정신의 일부이지만 나에게는 낯선 외국 같은 곳입니다.
정신분석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정신은 모두 내가 의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은 이것은 틀렸다고 선언하며,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제일 원리입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 점을 용어에서부터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을 S(subject/주관)’에 빗금을 그어 ‘$’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주관 ‘S’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으로 갈라진 주관 ‘$’라는 것입니다. .
정신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연설하면서, 학생들에게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충고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은데 타인이 요구하는 일을 하거나 사회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는 삶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면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스티브 잡스는 자신은 어린 나이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서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애플 컴퓨터를 창업한 것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을 까요? 그것이 내면의 목소리였을까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스티브 잡스 자신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의 정신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 자신도 모르는 정신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인들은 자주 사람들에게 “너 자신이 되라!”(Be yourselves!)라고 충고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우리는 흥분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하는 에너지가 솟아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의식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명상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다보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에는 무의식이란 매우 낯선 영역이 있습니다. 그곳은 명상같은 보통의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어떤 미국 사람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원에 다니던 중 출가하여 한국에 수련하려 왔습니다. 그는 출가의 이유를 '참 나'를 찾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수행하기 위해 세계 초일류 대학이 가져다 줄 돈과 명예를 버렸습니다. 그의 결단은 숭고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명상으로 ‘참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만약 진정한 자아라는 것이 무의식에 있다면, 정신분석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진정한 자아라는 것이 내가 정립하고 싶은 희망의 자아상이라면 출가하지 않고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의식은 의식의 방으로 진입하려고 돌진한다.
호텔에는 여러 개의 객실이 있습니다. 정신의 방은 호텔과 다릅니다. 호텔의 방들은 서로 관계하지 않습니다. 반면 의식과 무의식의 방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정신은 무의식과 의식의 방으로 나뉘어 있지만 서로 관계한다는 점에서 호텔의 객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무의식과 의식이 상호작용하는지 봅시다.
먼저, 무의식의 경험은 의식되기 위해 의식의 방으로 돌진합니다. 무의식의 욕망은 무의식의 방에 가만히 머무르려 하지 않고 의식의 방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만약 시도가 성공한다면 의식은 무의식의 사건을 알 수 있고, 그것들이 의식되면 운동기관을 거쳐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부자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것들은 의식의 방으로 진입하면, 즉 내가 분노를 의식하면, 나는 길가에 주차된 고급 자동차를 발로 걷어찹니다. 무의식은 의식되어 행동으로 외화되는 것입니다.
정신
무의식의 욕망들이 의식의 방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이유는 행동으로 자신을 표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반사작용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의식해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나는 음식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대개 이런 의식은 명확하지 않아서 그냥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행동의 동기나 목적을 의식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의 특정한 체험(소망이나 동기)은 그렇게 생각해 내려한다고 의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부류의 무의식의 욕망은 아무리 내가 찾아내려 해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들 들어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의 소망은 의식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근육이나 운동기관을 사용하여 행동하는데 그것을 지시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무의식은 의식의 방을 거쳐야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으므로 의식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의식은 무의식을 억압한다.
의식은 무의식에 거주하는 욕망들이 모두 의식의 방으로 들어오도록 그냥 두지 않습니다. 어떤 것들은 입장을 허용하고 어떤 것들은 불허하는 것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 작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일단 인간이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욕망은 모두 무의식의 방에 체류한다고 가정합니다. 무의식의 욕망들은 의식의 방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그것들 중 일부가 입장이 허용되면서 의식의 방은 점점 확대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와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그런 욕망은 의식의 방으로 들어오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연인과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입장을 불허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욕망은 도덕적 존재이고자 하는 나의 정체성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반사회적 반도덕적 욕망들은 의식의 방으로 진입하려고 하지만 의식이 거부합니다. 그런 욕망들은 의식에게 억압되어 다시 무의식의 방으로 돌아가 거기서 체류합니다.
정신
의식이 억압한다고 무의식의 사건이 가만히 무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의식의 방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어떨 때는 의식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위장을 하고 의식의 방으로 들어옵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는 관객이 알아보지만, 배우가 가면을 쓰고 있다면 누구인지 관객은 모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욕망이 의식의 방에 그냥 들어온다면 의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 중 반사회적 욕망이나 개인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은 동기는 위장을 하고 의식의 방에 진입합니다. 의식이 그런 것들을 알고 싶지 않아서 의식의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때문입니다. 타하니가 선행을 하는 이유는 높은 명성과 지위를 획득하여 언니를 능가하고자 하는 속물적 동기입니다. 이것을 타하니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의식은 그런 속물적 동기가 의식의 방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의식은 무의식에 체류하는 체험이나 욕망이 의식되지 않도록 억누르고, 그래서 무의식의 심리 과정은 의식이 알지 못합니다.
의식의 방에 위장하고 들어온 무의식의 욕망이나 체험을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현물’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의 대표는 말실수, 꿈, 신경증입니다. 꿈은 잠자는 동안 무의식이 가면을 쓰고 의식의 방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무의식의 소망은 개인이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꿈에 나타난다 해도 기억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꿈 자체를 꾸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행히 꿈을 꾼 사람이 꿈을 기억하고 서술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릅니다. 꿈의 존재 자체를 모를 수도 있고, 꿈의 내용을 기억한다하더라도 꿈의 의미는 알기 어렵습니다. 무의식의 발현물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 그것을 분석하여 무의식을 밝혀내는 작업,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입니다.
기원후 2세기 로마의 여행가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 현관에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know thyself)는 문장" 이 새겨져 있다고 보고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의 절도를 알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너무 분노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으라는 식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철학의 중심과제입니다. 진정한 자기 인식은 정신분석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신 분석은 철학의 확장이며 발전입니다.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의 투쟁과정이다.
인간의 정신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무의식과 의식으로 분열되어 있고 그 둘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망을 모두 실현한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먼저 외부 세계가 그것을 방해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회사는 경쟁이 치열하여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내가 매우 탁월한 사람이라면 타인을 이기고 경쟁에서 자주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무적의 영웅도 내부의 적은 이기지 못합니다. 그의 정신도 둘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으며 무의식의 욕망 중 상당수는 의식이 억압하여 의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행동으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소망을 실현하지 못하면 우리는 좌절을 경험합니다. 외부의 적도 강하여 이겨내기 힘들지만, 내부의 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늘 싸움터이며 자주 좌절의 고통을 겪습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좌절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정신의 구조는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누구나 갈구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둘로 분열되어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투쟁에서 생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35-B.C. 475)는 “투쟁은 올바른 길이다”(δίκη ἔρις/ strife is justice)라고 합니다. 만물이 투쟁에서 생겨난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투쟁을 정신의 내적 투쟁,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이라고 해석한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납니다. 과학, 예술, 종교, 정치, 경제, 모든 영역은 정신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법률도 기업도, 모나리자도, 상대성 원리도 정신활동에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과 무의식 투쟁과정이 정신의 본질적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은 정신의 내적 투쟁에서 일어납니다. 무의식의 욕망이 의식으로 진출하려고 하는데, 의식이 그것을 억누르면 무의식의 에너지는 사회가 승인하는 활동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의 과정을 프로이트는 승화라고 부릅니다. 결혼제도뿐만이 아니라 종교, 과학, 예술 같은 고차원적 정신 활동, 그리고 자선사업이나 동물보호활동 같은 아름다운 활동도 승화의 소산입니다. 모든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 그리고 타협, 즉 정신의 내적 투쟁에서 발생합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여기에서 정신의 모든 업적, 문화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Sigmund Freud. GW 11(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 . Gesammelte Werke 11. Imago Publishing Co., LTD, London. First printed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