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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5.06 08:55 수정일 : 2020.05.22 01:11
[인문학수프]-2
칼끝에 맺히는 이치
오행(五行)의 이치는 주로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으로 설명된다. 우주의 5원소,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가 서로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한다는 것이다. 상생(相生)은 금(金)에서 수(水)가, 수(水)에서 목(木)이, 목(木)에서 화(火)가, 화(火)에서 토(土)가, 토(土)에서 금(金)이 생긴다는 것이고, 상극(相剋)은 쇠는 나무를 이기고(金剋木), 나무는 흙을 이기고(木剋土), 흙은 물을 이기고(土剋水), 물은 불을 이기고(水剋火), 불은 쇠를 이긴다(火剋金)는 것이다.
오행의 이치를 소개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剋木)”라는 진리의 말씀에 약간의 어깃장을 놓고 싶어서다. 쇠와 나무를 놓고 보면 당연히 쇠가 더 단단하고 무겁다. 그래서 쇠로 만든 도끼로 나무를 넘어뜨리고 장작을 팬다. 물성(物性)만 놓고 본다면 “쇠가 나무를 이긴다”라는 말은 분명한 진리다. 그런데 그것들이 인간세의 복잡한 사정(事情) 속에 놓이면 사정이 바뀐다. 드물지만 나무가 쇠를 이길 때도 있다. 그것도 거의 치명적으로.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쓴 「칼끝에 맺히는 이치」라는 글을 보면 ‘싸움의 기술’에 관한 한 연구가 등장한다. 본인의 실전 경험과 일본 소설가 오야마 가츠코(1896~1965)의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에 나오는 『오륜서』의 내용을 종합한 탁월한 소견이다.
...나는 싸움이 있은 후에는 늘 그 과정을 돌이켜서 꼼꼼히 ‘연구’하곤 했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상대를 단번에 눕힌 경우는 대체로 그 승인(勝因)이 내 ‘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몸이 눈을 따라줄 수 있는 기본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상대의 움직임을 잘 보고 그 움직임에 민감하게 응대해야만 틈을 얻는다는 단순하고 또 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잘 본다는 뜻은 단순히 시력이 좋다든지 집중도가 뛰어나다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동네 아이들 싸움에서야 그 수준이면 골목대장감이겠지만 몸이나 검의 이치를 느끼고, 마침내 그 이치로 삶과 세상의 이치마저 느낄 수 있는 지경이라면 그 눈은 이미 몸에서 자유로운 눈일 것이다.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그리고 불안(佛眼) 등 다섯 단계를 말하고 있는 불가에서는 ‘눈이 맑다’거나 ‘눈이 바르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다만 그대의 눈이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대의 행실을 말하지 않는다.” 당(唐)의 위산 스님이 제자인 양산에게 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눈만으로도 그 주인공의 품성과 수행의 경지를 읽을 수 있다는 셈이다.[중략]
무사시의 병법 수련이 깊어가며 그가 체달(體達)하는 과정은 실로 문무의 구별에 상관없이 수신(修身)과 성숙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자신의 병법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오륜서』를 보면, 접적(接敵) 시에는 지나친 눈의 노출을 피하고, 관(觀)의 눈으로는 가까운 곳을 강하게 보며 동시에 견(見)의 눈으로는 먼 곳을 약하게 보라는 일반 원칙이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육안의 테크닉을 벗어난 경지를 언급한다.
<칼을 맞대보지 않고도 상대를 아는 것은 완전히 이치 밖의 이치이며 당치 않은 이유, 즉 묘(妙)라는 것이다.>
이 묘안(妙眼)은 범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벨 수 있는 소위 파마(破魔)의 공검(空劍)을 이룬다고 한다. 그의 검법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검을 빼기 전에 이미 상대가 혼절하고, 검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적도 검기(劍氣)로써 벤다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것도 단순히 무협지적 발상이 아니라 눈이 몸을 벗어나듯이 날(刃)이 검을 벗어나는 지경을 형용한 것이리라. [김영민․이왕주, 『소설 속의 철학』]
검도의 경구 중, 일안이족삼담사력(一眼二足三膽四力)이라는 말이 있다. 이기는 방법 중 첫째가 눈이라는 뜻이다. 안법(眼法)의 최고 경지는 단연 『장자(莊子)』에 나오는 ‘후발선지(後發先至)’다. 검력(劍歷)이 어느 정도 쌓인 자들끼리의 대결에서 고수와 하수가 결정되는 것은 오로지 그 후발선지의 묘(妙)에서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발놀림(足法)은 내 몸이 상대와의 거리(間合)를 정하는데(잡는데) 필요한 것이다. 무사시는 실전에서 뼈가 굵은 ‘시골무사’였기에 명문(名門) 도장에서 강조하는 발놀림 공부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싸우는 곳은 도장의 마루처럼 평탄한 바닥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늘 강조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늘 실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두고 검성(劍聖)이라 하지 않고 검호(劍豪)라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무도를 통해 자신을 숙성시키는 일보다는 싸워서 이기는 일에 더 관심이 컸다. 평편(平便)한 도장 마루 위에서의 대결과 비탈이나 자갈밭 위에서의 대결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관계를 보는 듯해서 재미있게 그 부분을 읽은 기억이 난다. 위에서 인용한 김영민 교수의 소론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관과 견’은 지금도 검도 수련에서 많이 강조가 된다. 가까운 곳을 ‘견의 보기’를 강하게 해서 보면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다가 본의 아니게 틈을 내어주게 되는 수가 왕왕 생긴다. 그래서 고수일수록 관견의 배분이 잘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기세(氣勢)도 분명히 있는 것이어서, 그 차이가 분명할 때는 칼을 뽑기 전에 이미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 날 때가 많다. 상대를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린다. 내 칼을 수수깡 같고 상대의 칼은 전봇대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일취월장하는 칼은 자신의 기세가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몇 달, 몇 년 만에 만난 사제 간, 선후배 간, 맞수 간의 대련에서 의외로 상대가 무르게 느껴질 경우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자신의 기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만큼 자신의 칼이 여물어졌다는 증거가 된다.
검도 이야기는 그 정도에서 그친다.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30년밖에 안 되어서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 아직 남 앞에서 칼에 대해서 대놓고 ‘썰’을 풀만한 입장이 아니다. 이제 앞에서 말한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剋木)”라는 진리의 말씀에 약간의 어깃장을 놓을 일만 남았다. 오야마 가츠코의 『미야모토 무사시』에 따르면 미야모도 무사시가 마지막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 것이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郎)와의 간류지마(嚴流島)의 결전(決戰)이다. 사사키 고지로는 당시 최고의 검술가(劍術家)로 인정받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로 하고 미야모토에게 일격을 맞고 쓰러진다. 미야모토가 사사키를 이긴 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핀 ‘싸움의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기는 싸움의 기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대가 자신의 눈을 살피지 못하게 태양을 등지고 섰다. 배를 타고 약속장소에 나타나서는 물 안으로 상대를 끌어들였다. 먼저 도착해 뭍에서 기다리던 사사키는 어쩔 수 없이 ‘안법의 정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발놀림이다. 자기 도장을 갖고 있던 사사키는 마루 위에서의 검술에 능했다. 미야모토는 그래서 우정 물 속에서의 결투를 만든다. 발놀림에서의 부족함을 그렇게 만회한다. 그 다음은 간합(間合, 거리의 문제)이다. 사사키의 장검(長劍)은 시중의 어떤 칼로도 당해낼 수 없는 당대 최고의 ‘무적의 병기’였다. 항상 먼저 상대의 몸에 닿았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미야모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창의력으로 그것을 극복한다. 밤새 나무를 깎아서 사사키의 칼보다 한 척은 더 긴 목검을 만든다. 지금도 그 모양이 전하는 미야모토의 목검은 보통 사람은 들고 두어 번 휘두르기조차 부담스러운 길이와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는 그 목검을 들고 뛰어 들어가 먼저 상대의 머리를 내려친다. 최대한 원간에서 팔을 뻗어서 상대의 칼이 내 몸에 닿기 전에 먼저 상대를 제압한다. 머리를 맞고 비틀거리는 사사키의 늑골을 한 번 더 내리치는 것으로 미야모토의 승리는 확정된다. 결국 무게 중심이 쇠로 된 칼과는 달리 검신 골고루 분산되어 있어서 상대보다 빨리, 멀리 칠 수 있었던 목검이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팔을 마음 놓고 펼수 있었던 것이다.
쇠로 만든 칼은 그 움직임의 마지막을 항상 몸 쪽으로 당겨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 무거운 도신(刀身) 탓에 그 무게 중심의 운용이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에 의존해야 한다. ‘뻗어서 치기’보다는 ‘당겨서 치기’에 능해야 한다. ‘때리는 것’이 아니라 ‘베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무리하게 장검을 팔을 뻗어서 뻗어 치다가는 팔의 인대가 끊어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사사키는 오랜 진검 수련을 해 왔을 터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체득하고 있었다. 칼의 움직임이 항상 원운동을 지향하는 당겨치기 기술이 몸에 배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사키의 칼은 당시에도 장검으로 유명했다. 칼이 남달리 길었다. 더더욱 당겨 치는 검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야모토의 목검은 그렇지 않다. 일부러 도신을 넓적하게 만들었다. 무게 중심의 전방 쏠림이 진검보다 훨씬 덜하다. 미야모토처럼 그 정도의 검력과 타고난 체력, 그리고 순발력을 가진 이라면 어렵지 않게 던지듯이 뻗어서 상대에게 칼(목검)을 내려칠 수 있다. 그런 뻗어 치기에서 최소한 한 뼘 정도의 ‘내게 유리한’ 간합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길이 자체도 사사키의 장검 못지않게 길고, 무게감이 분산되어 뻗어 치기로 칼을 운용할 수 있었으니 미야모토에게는 불리할 게 없는 싸움이었다. 병기의 선택에 다른 간합의 묘(妙)를 터득한 미야모토는 거침없이 몸을 던져 상대에게 뛰어든다(捨身, 현대 검도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몸을 버리고 뛰어들라’는 것이다). 결국 사사키의 칼끝은 미야모토의 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목검을 사용했기 때문에 미야모토가 사사키를 이길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무가 쇠를 이긴 것이다.
미야모토의 승리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몸으로 하는 싸움도 머리가 좋아야 이길 수 있다”라는 것이다. 치밀한 상황 분석과 기술 연구, 거기다 병장기 선택의 묘에 이르기까지 미야모토는 그야말로 ‘이기는 병법(兵法)’에 철저하게 따랐다. 먼저 이겨놓고 싸운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렇지 못했다. 도장(道場)의 병법에 익숙해져서 진짜 무엇이 중한지를 알지 못했다. 코드(검술)에는 강했지만 맥락(실전)에는 약했다. 무엇보다도 상대를 알지 못했다. 문제는 인간 자체라는 것을 간과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코드를 배반해야 할 때도 많다. 오행의 이치를 거슬러 “나무도 쇠를 이길 수 있다”를 실천해야 할 때도 많은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이는 인생의 묘(妙)를 조금은 아는 이고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직 인생의 묘(妙)를 전혀 모르는 이라 할 것이다.
양선규 /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