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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8.06 11:50
<김춘수평전-(17); 대구(2)>
김춘수 시인의 대구에서의 20년 족적을 찾아 나서다
-김춘수 시인의 대구시절(2)
양 왕 용
2022년 1월 5일 새해 벽두이지만 김춘수 시인의 대구에서의 족적을 찾아 부산역에서 아침 9시 6분 KTX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출발하였다. 동대구역에는 앞으로 2년 동안 한국현대시인협회 제27대 이사장을 맡을 필자와 함께 부이사장으로 일할 손수여 시인이 고맙게도 승용차를 가지고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필자의 경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7년 후배인 70학번 박정남 시인도 나와 동행하게 되어 있었다. 점심때에는 경북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72학번으로 필자의 9년 후배가 되는 최근까지 국어국문학과 방언학 전공 교수로 있다가 정년퇴임한 이상규 교수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교수는 국어학 교수이지만 시인이기도 하다. 9시52분 도착하여 박 시인을 만나고 손수여 시인의 승용차에 탑승하니 10시가 제법 넘었다.
우선 동대구역에서 가까운 수성구 만촌동 647-18번지 삼우주택 6호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김 시인은 내당동 국민주택 162호에서 1971년 가을쯤 이곳에 집을 지어 이사를 하여 1981년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사실 언제 이곳으로 이사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같이 간 박 시인의 기억에는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 내당동 국민주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김 시인의 둘째 아들은 경북대 지질과 71학번인데 대학시절 초창기부터 만촌동에서 학교에 다녔다고 기억하고 있다. 필자의 경우 72년 봄에 만촌동 댁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래서 1971년 가을 쯤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검색해 보니 주변이 예전과는 많이 변했으나 근처에 대구동부중학교가 있고 다행스럽게 아파트 부지로 편입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도에 의지하여 찾아 갔으나 쉽사리 찾을 수는 없었다. 여러 차례 물어 드디어 오랜 세월이 흘러 다소 낯선 스테인레스 대문 앞에 서게 되었다. 개편된 도로명 주소판 무열로 29길 46-7로 인하여 이곳이 분명 예전의 삼우주택 6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집과 골목전체가 전혀 낯설었다.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던 박정남 시인도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한참 담 너머로 간이 이층이 있는 것과 집 앞의 테라스 그리고 정원 잔디밭 건너편의 나무 몇 그루가 있는 것이 낯이 익었다. 필자가 방문했던 1972년 봄에는 테라스 위에 등나무가 올라가 있었고 근처에도 나무가 우거져 있고 건너편 담 쪽으로 남천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억된다. 벌써 50년 전의 기억이니 혹시 주인이 있다면 들어가 물어보면 그 동안 집이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몇 차례 초인종을 눌렸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분명 사람은 살고 있는데 주인이 외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대문 앞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섰다. 통영의 김 시인의 생가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마산 중성동의 집은 폐가가 되다시피 방치되어 있어서 만촌동 집에는 꼭 들어가 확인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우리 일행은 경북대학교로 차를 몰았다. 경북대학교에 도착하니 이상규 시인과 약속한 시간이 조금 일러 우선 김춘수 시인의 시비를 찾기로 하고 본관 입구 안내 데스크에 시비가 있는 곳을 물으니 안내를 받으려면 2층 끝에 있는 홍보과로 가라는 것이었다. 대외협력홍보과라는 팻말이 있는 사무실로 가서 찾아온 연유를 말하니 직원 가운데 마침 국어국문학과 출신 이지예 씨가 예전에 동문들과 함께 행사 때문에 생전의 김춘수 시인을 서울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면서 친절하게 본관 밖에까지 나와서 시비의 위치를 설명해주고 박물관에 있는 경북대학교 역사관에도 기념물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마침 이상규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와 함께 합류하였다.
우선 < KNU 센터랄 파크>라고 하는 공원의 시비를 찾았다. 많은 경북대 출신 시인들 가운데 원로인 허만하(의학과 51학번),김윤환(영문과 52학번), 권기호(국문과 56학번) 시인 등 세 분의 시비와 함께 삼각뿔 형태의 화강암에 <꽃>이 새겨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비는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김 시인의 시비는 다행스럽게 글자는 선명하게 보였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박물관 쪽으로 가고 있는 우리 일행에게 한 시민이 다가와 왜 시비를 이렇게 글자도 보이지 않게 했느냐고 항의를 하면서 학교 당국에 건의하여 잘 보이도록 해 주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상규 교수가 져야할 짐이 하나 생겼다’면서 웃었다.
우리가 다닐 때인 1960년대에는 도서관이었던 박물관에 도착하여 4층에 있는 경북대학교 역사관으로 갔다. <연혁과 상징>, <경북대학교의 역사>, <복현골 그 때를 추억하다> 등 여러 공간 가운데 <9. 세상을 비춘 경북대의 별>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에 대한 브러셔의 설명은 ‘우리 대학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수 많은 졸업생, 그리고 인재 양성에 힘써온 교수 중 가장 빛나는 인물로 선정된 40여명을 기념하고 미래의 우수 인물들을 위한 여백이 있는 공간’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공간 정중앙에 김 시인 사진이 <시인, 국어국문학과 교수(1961-1978)> 라는 설명과 함께 게시되어 있었고 아래로 시 「그 순간」의 자필 원고 첫 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 시인 옆에는 경북대총동창회장을 역임하고 효석장학회라는 경북대총동창회의 장학재단의 기틀을 마련한 조운해(대구의대 46학번) 전 삼성병원 원장이자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맏사위가 전시되어 있었다. 40인 가운데 본교 출신이 아닌 교수는 몇 되지 않았다. 필자는 김 시인이 근 20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과 많은 시인들을 배출한 경북대학교에서 1978년 영남대학교로 자리를 옮길 때에는 그 당시 권위주의적인 김영희 총장과의 갈등 속에 억지로 떠나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그 공적을 인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였다.
역사관을 나오니 점심때가 되어 우리 일행은 경북대 북문 근처의 피자집에서 젊은이다운 식사를 한 후 커피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세 사람의 시인이 된 경위를 각자 데뷔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꽃을 피웠다.
박정남(1951-) 시인은 경북 구미에서 출생하였는데 중고등학교는 부산의 명문인 경남여중과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1970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여 필자의 7년 후배가 된 시인이다. 그 동안 막연히 부산에서 공부하고 대구로 유학온 후배 시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중학 시절부터 부모 곁을 떠나 친척들이 있는 부산으로 유학 갔다가 다시 고향 가까운 대구로 올라온 시인이었다. 그런데 박 시인을 추천한 사람은 김춘수 시인이 아니고 왜 전봉건 시인인가 하는 의문도 이번의 만남에서 풀렸다. 박 시인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71년 영남대학교 학보사에서 공모한 전국 대학생 시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 때 심사위원이 김춘수 시인이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시창작 노트를 김춘수 시인의 연구실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로 있어 가져왔다가 다시 놓아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김 시인은 박 시인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고 박 시인의 다른 글에서 밝힌 것을 이번 이 글을 쓰면서 읽었다. 그런데 1973년 2월 대학 3학년 말 문화서점에 가서 《현대시학⟫을 펼치니 박 시인의 시가 《현대시학⟫ 주간이자 실질적인 발행인인 전봉건 시인의 추천으로 2편 실려 있어 맥심다방으로 김 시인은 찾아가니 김 시인은 ‘자네 친구가 보냈겠지’라고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다고 하고는 이튿날 동백 화분 하나를 사서 김 시인 대문간에 놓고 온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참 있다가 ‘내가 좋은 스승을 만나게 했으니 거기서 배우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후 박 시인은 전봉건 시인에 의하여 추천완료 되어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그는 김 시인의 제자임을 잊지 않고 박 시인이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지낼 때 만년의 김 시인을 극진이 모신 바 있다고 이 상규 시인이 귀띔해 주었다. 박 시인은 아마 데뷔 당시 김 시인은 그를 딸처럼 생각하며 여자가 시를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데뷔시키는 것을 주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시절은 그러 했으니 필자 역시 박 시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규 (1953-) 시인은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국어학에 관심이 많아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방언학을 전공하여 그 분야의 대가가 되어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도중에는 제7대 국립국어연원 원장도 지냈다. 그리고 대구광역시 교육위원도 지내고 국어정책학회라는 학회의 회장도 지낸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국어학자이다. 그런 그가 시인이 된 경위가 어떠한지 궁금해 물어 보았다. 대학 4학년 시절 시화전에 시를 출품하였는데 그것을 김 시인이 보고 시 쓴 것을 가져 오라고 했는데 가져다 드렸는데 연구실에 가보면 그것이 오랫동안 그 대로 책상 위에 놓여 있어 실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데 1978년 《현대시학⟫ 9월호에 시가 추천작으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 때의 감격을 이 교수는 사법고시 합격한 기분이었다라고 술회하였다. 그래서 1979년 봄에 추천 완료하여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김 시인은 그냥 묵혀 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쭉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하니 이 교수 역시 공감하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본관 4층 1960-70년 초창기의 김춘수 시인 연구실 자리를 찾아가 보았다. 이상규 교수는 필자보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시설과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본관의 석조 건물과 중앙 원통형의 돔은 변하지 않았으나 내부는 총장실을 비롯한 본부 행정동으로 리모델링되고 카페트까지 깔려 있어 중후하고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 후에 교무과를 방문하여 혹시 김춘수 시인의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가 보관되어 있는지 여부와 그 복사여부를 문의하였다. 물론 이상규 교수 탓에 협조가 잘 되었으나 부산에 있는 둘째 따님인 김 영애 (신라대학교 지라학과 김원경 명예교수 부인) 여사의 정보공개 위임장 덕택에 별 문제 없이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본을 원본대조필이라는 도장을 찍어 전달 받을 수 있었다.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는 1962년 2월 23일 조교수 시절에 작성된 것이었다. 우선 붙어 있는 증명사진에서 김 시인의 40대 초반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아한 정자의 김 시인 자신의 필체로 적혀 있는 인적사항에서 그 동안에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바르게 인식될 수 있었고 몇 가지 의문도 풀렸다.
우선 맨 처음 김 시인이 대구여고 2학년으로 전학 온 큰 따님과 함께 기거한 집이 대봉동이 아니라 봉산동 168번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당시 35평의 대지에 건평 25평의 방 3간의 집을 구입하여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 지도로 검색해보니 봉산동 문화거리로 편입되어 도로가 된 곳이었다. 다음으로는 1965년 5월 21일자로 교수자격 심사위원회 위원장 명의 <교수자격 인정 통지서>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지난 호에 잠시 언급한 「1909-1919년 사이의 한국시의 명칭과 형태」라는 논문으로 신청하여 교수 자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1959년 4월 『한국현대시형태론』(1958.10 해동문화사)으로 교수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한 것은 그냥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는 것이고 그 당시 인정받은 직위는 <부교수>였다고 인사기록 카드에 적혀 있엇다. 그래서 다시 정교수의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 시인은 1961년 4월 25일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아 6월 12일 내각수반 발령의 조교수로 승진한다. 말하자면 경북대학교 오기 전의 경력이 참작되어 불과 2개원도 전에 승진한 것이다. 그러다가 1962년 9월4일 자로 내각수반 발령의 부교수로 승진하고, 1964년 4월 1일 대통령 발령의 부교수가 되어 1965년 7월 31일까지 그 직을 유지한다. 결국 1962년 9월에 해인대학에서 받은 부교수 직위로 복귀된 셈이다. 그러나 교수 승진은 결국 앞의 논문으로 1965년 5월 21일 자격을 인정받은 후인 1965년 8월 1일 대통령 발령을 받아 승진한 것이다. 필자의 학부 시절인 1963-67년 사이에 부교수에서 교수로 승진한 것이다.
이상규 시인과 우리 일행은 경북대학교 본관 앞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필자의 대학원재학 시절인 1967년 김 춘수 시인은 경북예총 회장을 하셨던 관계로 때때로 예총 회장 사무실에서 대학원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그 자리를 찾아갔다, 그 당시 대구역전에 대구방송 공개홀인 KG홀 지하에 예총 사무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대구시 중요 공연장이고 문학강연장이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구 콘서트 하우스가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호텔이나 백화점이 아니고 콘서트 하우스로 진화된 것은 대구 시민들의 문화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대신 경부선 대구역은 동대구역에 밀려 민자역사로 대구롯데백화점에 더부살이하는 격이 되어 있었다.
중앙통에 일제강점기에는 선남산업은행과 조선상업은행 해방 뒤에는 한국산업은행 마지막으로 상업은행에서 우리은행이었던 건물을 재건축하다시피하여 1-2층은 향촌문화관으로 3,4층은 대구문학관으로 되어 있는 대구문학관을 방문하였다. 김춘수 시인의 업적은 상설전시관에 <문학의 활로와 새 지평을 열다>라는 코너에 유치환 ,신동집. 이호우, 이영도, 구상 등의 시인과 함께 사진과 <무의미시로 한국시의 새 경지를 개척한 시인> 이라는 제목으로 다섯줄로 간단한 약력이 적혀 있었다. 다른 분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긴 하였으나 1961년부터 1981년까지 20년 동안 대구에 머물며 수많은 제자와 시인을 길려 내고 대구문단에도 기여한 업적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전시라고 생각되었다.
지하실의 문학관 관장실을 방문하여 관장 이하석(1948-) 시인을 만나 김춘수 시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관장은 경북대 사회학과 재학 시절 국문과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김춘수 시인의 연구실을 출입할 수 있었고 무의미시에 열중하던 김 시인의 시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고 회고 하였다. 금년이 김춘수 시인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니 대구문학관에서 특별전시회 같은 사업을 기획 하라고 하니 임기를 얼마 남겨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금년 분명히 대구 문학관에서 김춘수 시인에 대한 특별 사업이 벌어지지 않겠냐고 하면서 관장실을 나왔다.
벌써 해는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나 내당동 국민주택 자리를 찾아보자고 차를 내당동으로 달렸다. 내당동에는 지하절 내당역과 두류역이 있었다. 지하철 뒤편에는 옛날 집이 더러 보이는 골목길이 있었으나 어디가 어디고 국민주택 162호 자리는 찾기가 불가능했다. 차에서 내릴 엄두도 못내고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동대구역을 들어서기 전에 손수조 시인과 박정남 시인이 저녁을 먹고 가야 한다고 강권하여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순간 뉴스로 KTX 대전-구미 구간에서 KTX-산천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나 경부선이 불통이라고 하였다. 다행스럽게 시외버스 터미널이 동대구역 인근에 있어 자동차로 그곳으로 갔다. 마침 동대구에서 해운대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어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대구를 떠났다. 그리고 기차보다 집이 있는 최근에 그린 시티라고 이름이 바뀐 해운대신시가지 인근으로 가게 되어 탁월한 선택이라 하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1월 5일 하루 두 사람 특히 손수여 시인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앞으로 두고두고 그 신세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구를 떠났다. 이렇게 김춘수 시인의 대구 족적을 찾아 나선 일일여행은 끝났다.
*양왕용;시인, 부산대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 작가회의 한국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