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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8.06 11:44
1-14. 내 복을 다하지 않고
/양선규
평생의 업(業)이 되고 있는 글쓰기가 복(福)인지 화(禍)인지 모르겠다. 인생 말미에 선 지금도 화복이 오리무중이니 내 글쓰기가 여태 미련했었다는 것만은 알겠다. 살아 보니 사람이 아는 경지는 대체로 세 가지 경우인 것 같다. 이미 나면서부터 아는 것, 살면서 (남이나 경험에게) 배워서 아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모르는 것, 그 셋인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공자가 말한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학지(困而學之), 곤이불학(困而不學)의 비교가 생각난다.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오,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오, 막힘이 있으면서도 애써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니라. 그러나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이 된다”라고 그는 말했다(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논어》 계씨]).
언제 어디서든, 식자(識者)들이 가장 모르는 것은 제 분수인 것 같다. 자아도취가 때로 도를 넘는다. 작가도 식자의 일원이니(요즘은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 또한 자기가 무엇을 써야 하는 것을 때로 잘 모를 때가 있다. 날 때부터 아는 것은커녕 남을 보고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한 것 같다. 평생 자기 잘난 맛으로만 글을 쓰는 자들이 많다.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어려운 것이 본디 글쓰기의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글쓰기는 누가 뭐래도 공기(公器)다. 공중들의 공동 소유다. 때로 작가들은 너무 크고 으리으리한 집과 너무 발랄하고 아름다운 여성과 너무 이해 안 되는 주인공의 성공과 너무 전지전능한 악을 그릴 수 있지만 그 모두가 우리가 더 인간다워지기 위한 것이고 몰인정한 세상에 돌을 던지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인 것이다. 또 그들은 같은 이유로, 우리와 같은 시야 안에서 사건과 사물을 보지 않고 현미경을 들고 바로 옆 동네 한 연인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집중해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망원경을 손에 쥐고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 작가의 사명은, 현미경이든 망원경이든, 인류애의 확산과 심화에 기여하는 일이다. 그것 이외의 사명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할 것인가? 그래서 작가는 언필칭, 실존주의자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진중하지 못한 자세로 펜을 들었다. 일례로, 실존주의자로 알려진 장폴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였다.
“장 폴 사르트르도 원래는 인간애를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의 인물들은 그를 실망시켰다. 다만, 『구토』 같은 소설에서는 약간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의미’라는 화두와 열렬히 씨름했고, 우리 인류의 몸부림을 소설이자 산문으로 나타내기 위해 명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초기 에세이에서 언급한 훌륭한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도 있었고 인본주의적이고 미학적인 철학을 구현할 수도 있었다. 대신 그는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진정한 실존주의자와는 멀어지고 말았다.
그는 르네상스를 요리조리 피했다. 그는 가장 고된 일, 즉 자신의 양심을 걸고 글을 쓰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회피와 장기간의 불신을 단번에 나타내는 것은 그가 마지막에 한 부조리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수년 동안이나 아무도 읽지 않을 플로베르의 전기를 쓰느라 모든 정신력과 시간을 쏟아 부었다. 아직까지 실존주의의 원칙에 대해 완전히 표명하지도 않고서 몇 년이나 플로베르의 전기를 쓰는 데 시간을 낭비하다니!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극도의 엘리트주의는 분별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글쓰기는 항상 사회적이고 역사적일 뿐이라는 걸 망각한 망동(妄動)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의 입장과 처지에 적정하다고 해서 공리(公利)에 반하는 글을 쓰는 것은 작가의 도리가 아니다. 그런 글들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어떤 의미에서든 공해(公害)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글을 만났다. 근자에는 노안(老眼) 탓인지 책을 들어도 한 권을 완독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노안 탓만은 아닐 것으로 짐작한다. 오래 보면 눈도 아프고, 관심도 분산된다. 집중하지 못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두루 노안 상태다. 최근에 읽은 『완당평전』(유홍준)도 그런 사정에서 예외가 아니다. 저자가 가르쳐주는 것들이 새로운 것보다는 반복과 강조가 승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눈에 익은 틀에 박힌 설명이 집중을 방해한다. 다만, 서문에 인용한 「유재(留齋)」는 눈에 확 들어왔다. 완당이 제주에 있을 때 써서 현판으로 새긴 것인데 바다를 건너다 떨어뜨려 떠내려간 것을 일본에서 찾아왔다는 이야기까지 전하는 「유재(留齋)」는 완당의 제자 남병길(1820-1869)의 당호를 지어주고 그것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스승이 아들처럼 여기던 제자에게 내리는 방 이름 현판이었던 것이다. 책에 실린 저자의 설명과 유재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유재(留齋)」 현판을 모두 3개 보았는데 대개 같은 서체로 되어 있으나 약간씩 글맛이 달라 복각의 복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중 일암관(日巖館) 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유재(留齋)」 현판이 가장 일품이었다. 예서로 쓴 ‘유재’ 두 글자와 행서로 쓴 풀이글이 참으로 멋지게 어울렸다. 더욱이 그 유재의 뜻풀이를 보면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충언의 일격이 있다.
留齋
留不盡之巧以還造化(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祿以還朝廷(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財以還百姓(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福以還子孫(내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阮堂題(완당 제하다)
워낙 유명한 것이라(이 시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천학비재인 나로서는 이 대목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흥을 말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마지막 구절이 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완당도 아마 그 부분을 적으면서 심사가 크게 요동쳤으리라 짐작한다.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일견 온전히 쓰임을 받지 못한 자의 좌절, 혹은 순명(順命)으로 읽힌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천명(天命)을 복창(復唱)하는 차원을 넘어, 목숨을 얻어 인생살이에 나선 자라면 마땅히 준수해야 될 모종의 규율(規律)을 정하는 제의적 차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남의 복까지 시기하고 탐내는 세간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볼만한 ‘황금의 언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언감생심, 오히려 누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냥 글을 마치기에는 미진함이 남아서 한 마디 덧붙인다. 완당의 ‘내 복을 다하지 않고’가 특별히 내게 좋은 것은, 그 말 속에 자기 복을 아는 자의 늠연함과 그에 부수된 가진 자의 타고난 겸손이 눅진하게 배어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복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의 다함과 남김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정녕 ‘복 받은 자’들만의 재능이 아닐까?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평면적으로 ‘욕망이나 욕심을 절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이 소외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화를 겪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을 때이다. 자기 자신의 이념이나 학문, 능력이나 신념과의 불화를 경험할 때, 아니면 가족이나 친족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상이 소멸될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소외를 경험한다. 완당이 그런 소외를 겪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재(留齋)」에서의 완당은 자신을 남김없이 해체함으로써(내 복을 다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복과 세간의 질시가 빚어내는 불화를 일거에 뛰어넘고(가진 자로서), 자손(역사적 존재 의식일 것이다)과의 유대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한다. 엘리트 글쓰기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내 복을 끝까지 과시하려했던 장 폴 사르트르에 비하면 완당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애의 화신, 진(眞)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