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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7.30 11:29
<김춘수 평전 16-대구시절(1)>
청마를 이은 두 번째 경북대학교 시학 교수 김춘수, 날개를 달다
-김춘수 시인의 대구 시절(1)
양 왕 용
김춘수 시인은 1960년 1956년에 진주에서 마산으로 옮겨온 해인대학(현재의 경남대학교 전신)의 조교수로 발령을 받는다. 이 당시의 해인대학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해인대학이 설립하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946년 12월 해방 전 중국 중경에 머물던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하여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대학을 세우기로 하고 <국민대학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재단의 설립이 대학인가의 선결조건이라 당시의 대한불교중앙회 총무원 총무부장 최범술의 주선으로 해인사 사찰의 재산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인가를 받았다. 초대학장으로는 신익희가 취임하였고, 1950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52년 3월에는 합천 해인사 경내로 이전하고 재단 명칭도 재단법인 국민대학에서 재단법인 해인사로 변경하였다. 교명도 해인대학으로 바뀌었다. 이때의 학과 편재는 종교학과와 문학과로 된 문학부와 법률학과와 정경학과로 된 법정학부의 2개 학부 학생모집 200명이었으며, 1952년 8월에는 다시 진주시 강남동으로 이전하였다. 이런 와중에 재단법인 해인사를 반대하던 측은 6·25전쟁기가 끝나자 서울로 돌아가 오늘날의 국민대학교 전신을 개교하였다. 말하자면 경남대학교와 국민대학교는 그 뿌리가 같은 셈이다. 해인대학은 1956년 8월에는 마산시 완월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61년에는 마산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61년 11월에는 대학 정비령에 의하여 1962학년도 학생모집이 중지되었다가 1964년 1월에 다시 마산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법정학과, 상학과, 종교학과 문학과 등 4개학과에 입학정원 80명이 되었다. 1968년 학교법인 삼양학원이 대학을 인수하면서 불교계는 대학경영에서 떠났다. 1970년 학교법인 경남학원이 인수하면서 오늘날의 경남대학교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교명도 경남대학으로 변경하였다. 1973년 12월 월영동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2년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경남대학교가 되었으며 초대 총장에는 1974년부터 학장을 맡고 있던 윤태림(1908-1991) 학장이 취임하였다 윤태림 총장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와 숙명여자대학교 총장과 연세대 교육대학원원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김춘수 시인은 1953년 8월 31일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1954년 대학 강사를 시작한 때부터 진주에 있는 해인대학에 출강하였으며 해인대학이 1956년 8월 마산으로 이전한 후에도 계속하다가 1959년 저서 『한국현대시형태론』(1958,해동문화사)으로 문교부 대학교수자격인정령 21조에 의거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자격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1960년 봄에 해인대학 조교수로 발령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남대학교에는 이 당시의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김 시인이 보관하고 있던 부교수 발령장이 그 유일한 증거이다. 그 발령장에 의하면 1961년 1월에는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해인대학은 그 당시로는 존폐가 불확실한 열악한 대학이었다.
그래서 김 시인은 해인대학 교수로 임용되기 전부터 당시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유치환 시인에게 경북대학교에 자리가 있는가를 부탁하였다. 김 시인이 보낸 사신(1959년 4월1일자)에 그 구체적 정황이 나타나 있는데 이 편지는 200자 원고지 한 장의 짧은 것으로 마산의 《청포도⟫ 동인 남윤철의 시를 《현대문학⟫에 추천해주기를 부탁하면서 말미에 “慶大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첨가하고 있다. 이 편지의 원본은 통영시의 청마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김 시인이 왜 청마에게 경북대학교의 일을 부탁하였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치환 시인은 1952년 11월 10일 통영여중 교감을 사임하고 경남 함양군 안의면의사립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 당시 이사장이자 교장이던 하기락(1912-1997 ) 교수의 초빙으로 안의 행을 결행했던 것이다. 하기락 교장과는 아나키즘 운동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하기락 교장은 1940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에는 안의중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하 교장은 1953년 봄 경북대학교 고병간 총장에 발탁되어 문리과대학 철학교수로 임용되어 대구로 떠난다. 청마는 1954년 봄까지 약 2년 동안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1954년 4월30일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긴다. 이 자리 역시 철학과 하기락 교수가 주선한 것이었다. 그 당시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는 김종길(1926-2017) 시인이 교수로 있었고, 허만하(1932-) 시인이 의과대학 학생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청마의 경북대학교의 시학교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년이 지난 1955년 3월31일 끝나고 만다. 이 시절의 모습은 앞의 두 시인의 글 특히 허만하 시인의 산문집 『청마풍경』((2001, 솔 출판사)의 여러 글들과 문덕수 시인의 『청마유치환평전』(2004) pp202-213)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경북대학교로서는 당대뿐만 아니라 문학사에 남을 시인 청마를 전임교수로 모신 것이다. 그러나 청마 스스로 경북대학교를 떠난다. 그 경위에 대하여 문덕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청마의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의는 본인이나 학생들에게 신명나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창작에 주력하고 이론과 비평을 멀리했다. 그의 인생론적 시론도 이론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 때의 한 수강생 말에 의하면, 조그마한 보자기를 들고 강단에 선 그의 강의는 시간을 채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시인이었지 학자는 아니었다.”(허만하『靑馬풍경』p217을 각주로 표시하고 있음) 김종길의 「50년 뒤(청마 선생께)」라는 시에는 ‘무슨 이야기할 게 그리 많노/나는 50분도 채우기 힘드는데―“라고 한 말이 지금도 귓전에 울리고 있다 라는 대목이 보인다.(『청마문학』 제7집 2004) (문덕수 『청마유치환평전』p213)
청마는 경북대학교를 그만 두고 1955년 2월 1일 지금도 사립인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59년 9월30일까지 근무한다. 경북대학교 교수사임은 청마가 경주고등학교에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난 3월31일 처리 된다. 이 시절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 특히 경주고등학교는 사립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다. 이렇게 청마가 떠난 경북대학교 시학교수는 1961년 김춘수 시인이 부임할 때까지 비워져 있었다.
김춘수 시인은 1961년 청마 시인의 천거로 그 당시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이던 하기락 교수의 주선으로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1961년 해인대학 부교수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러한 경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전임강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러나 1955년 청마가 사임한 후 6년 동안 공석으로 두었던 그 자리에 두 번째로 시학교수 그것도 경북대학교 유일한 현대문학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김 시인은 1961년 봄 가족들은 대부분 마산 중성동에 남겨둔 채 마산여자고등학교 2학년에 갓 올라간 큰 따님 김영희(1945-)여사를 대구여자고등학교로 전학시키면서 함께 대구로 와서 봉산동 168번지에다 집을 마련하여 일단 대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이 무렵 유치환 시인은 4.19 혁명 이후인 1961년 5월 경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가 1962년 3월부터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대구여고에는 1963년 7월까지 근무하다가 부산의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어 부산으로 떠난다. 말하자면 김영희 여사의 대구여고 2- 3학년 시절에 유치환 시인이 교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김영희 여사는 필자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한 63년 봄에 대구여고를 졸업하고 경북대 문리대 화학과에 입학한다. 김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대학 2학년 때에 대학신문인 《경북대학보⟫에 경북대학교의 교수자녀 가운데 지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다 마산과 대구를 오르내리는 아버지 김춘수 시인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 시인은 해인대학(1961년부터는 마산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음)에도 전임으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북대학교로 옮긴 것이 미안하여 그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꽤 시간이 걸리는 마산을 오르내리면서 강의를 64년 말까지 계속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1963년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1학년 때에는 김 시인을 찾아갈 용기도 없었고 김 시인 역시 연구실을 계속 지키기가 힘들었던 까닭은 마산의 출강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학교 2학년 때인 1964년부터 시만 쓰여지면 가지고 오라는 김 시인의 말씀에 순종하여 연구실을 출입하였다. 그 당시 김 시인의 연구실은 지금도 경북대학교의 본관이 되어 있는 본관 4층으로 기억되는데 비교적 큰 편인 연구실에 책상과 책꽂이 하나만 덜렁 놓여 삭막하다고 느껴졌다. 책꽂이에 책은 많이 꼽혀 있지 않고 사걀을 비롯한 서양화가들의 화집을 김 시인은 즐겨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필자는 학부 때에는 화집을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 구입하지 못하고 대학원 때에 샤갈의 화집 한 권 구입하여 오랫동안 간직하기도 하였다.
김춘수 시인이 부임한 1961년 경북대학교에는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말고 사범대학에도 국문과라는 중등학교 국어교사 양성을 위한 학과가 있었다. 사범대학의 경우 1962년에는 대학정비령에 의하여 모집이 중지되었다가 필자가 입학한 1963년 국어교육과로 명칭을 바꾸어 부활되었다. 요즈음은 대학교육과정이 국어학과 고전문학 그리고 현대문학 삼대 영역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나 경북대학교의 경우 국어국문학과 국어교육과 모두 1970년대 전반까지 국어학 50% 국문학 50%, 현대문학 영역의 경우 국문학 가운데 5분의 1인 1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 시인 혼자서 문리대 국문과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의 강의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필자가 재학했던 1963년부터 1967년까지 2학년 때에 김 시인으로부터 「현대시론」을 사범대학 단독 개설하여 배웠고 「신문학사」는 3학년 때에 문리대 국문과와 합동강의로 배웠으며, 역시 3학년 때에 「현대문학연습」이라는 과목에서 현대소설 작품분석론을 배웠다. 필자가 배운 현대문학 영역 과목으로는 1학년 기초필수 「문학개론」이 있었다. 이 과목은 사범대학 어문계열(국어교육과와 영어교육과) 공동으로 문리대 영문과 민윤기 교수라는 영시 전공 교수에게 배웠다. 선택과목인 「희곡론」은 세익스피어 전공이고 희곡작가였던 역시 문리대 영문과 김홍곤 교수에게서 배웠다. 이렇게 열거한 다섯 과목이 현대문학 영역 전부였으며, 그 가운데 핵심과목인 시론, 현대문학사, 소설분석론 등을 김 시인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현대시론」의 경우 1964년 2학년 1학기 때(『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50년지』 p26 교육과정표 참조)에 앞에서 언급한 대구의 출판사인 문호사에서 출판한 『 詩論』(4×6판 220페이지)을 교재로 하여 배웠다. 김 시인은 그 당시에는 중등학교 교사 시절부터 있었던 수전증이 가시지 않았으나 진지하고 신중한 말투로 학생들을 압도하였다. 김 시인으로서는 1961년과 1962년의 국어교육과 선배에 이어 세 번째 강의(1963년에는 대학정비령 때문에 1962년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해 2학년이 없어 강의가 개설되지 못했음)였다.
「신문학사」의 경우 교재는 이병기(1891-1968) 교수와 백철(1908-1985)가 공저한 『국문학전사』(1965, 신구문화사)의 백철 교수가 지은 제2부<신문학사>였으나 주로 김 시인의 강의노트에 의존한 강의였다. 김 시인의 견해는 말로써 설명하다가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는 경우 책의 이름과 수록 페이지를 부른 후 인용 부분을 읽어 주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래서 충실하게 강의를 받아 적으면 하나의 저서가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강의 노트를 2000년까지 간직하고 있었으나 2003년 이후 네 차례 이사를 하는 과정에 분실하고 말았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으나 다른 사람 주로 백철 교수의 앞의 저서나 조연현(1920-1981) 교수의 『한국현대문학사』(1961,인간사)의 견해와는 다른 부분이 여러 군데 있었다. 김 시인이 이 강의 노우트를 단행본으로 내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일이다. 이 때 강의한 신체시 부분은 경북대학교 논문집에 발표되었다. 그 별쇄본 <1909-19년 사이의 한국시의 명칭과 형태>를 필자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으며 필자의 논문에도 인용하였다. 그리고 김 시인은 이 논문으로 1965년 5월 21일 문교부 ‘교수자격심시위원회’로부터 ‘교수 자격인정서’를 받았다.
다음으로 「현대문학연습」의 경우 일종의 현대소설 분석론이었다. 현재에는 1970년대 초 정음문고 89로 번역되어 있는 에딘 뮤어 『소설의 구조』와 E.M 포스터 『소설의 이해』 등의 이론을 소개하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김동인의 「감자」와 나도향의 「물레방아」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 김동리의 「황토기」 등을 분석하였다. 김 시인은 이 소설을 대상으로 논문을 작성하여 국어국문학과 논문집인 『어문논총』에 발표하였다. 김 시인은 이들 이론서를 원서로도 읽었겠지만 한국보다 먼저 소개된 일본어 번역판도 읽었을 것이다. 이러한 논문 형식의 글들 대부분은 김 시인의 전집에 수록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완벽한 전집 발간을 위해 이 글들은 반드시 수습돼야 할 것이다.
이상의 김 시인의 1961년 경북대학교 부임 초장기의 강의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1960년대 전반기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동기생들은 그 당시 한국 대학교의 어느 현대문학 교수보다 체계적이고 최신 이론을 바탕으로 한 강의를 수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시인의 길과 학자의 길의 직접적인 제자인 필자만 간직하고 있는 자부심이 아니다. 필자의 입학동기인 국어학 전공으로 일찍 작고한 염선모 영남대학교 교수나 부산에 거주하면서 자주 만나고 있는 역시 국어학 전공인 신라대학교 주상대 교수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바이다. 사실 우리 국어교육과에는 그 당시 현대문학 전공 교수가 전무했으나 문리과대학 국문과에 김 시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배운 시와 소설 그리고 현대문학사의 실력 때문에 우리 동기들은 중고등학교 국어교사의 길을 나설 때 현대문학 영역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국어교육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 독교작가회의 한국측 차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