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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성일 : 2020.05.03 10:39 수정일 : 2020.05.17 09:10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승주 (시인)

내가 국민학교 때(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마침 점심을 잡수시던 엄마가 아버지께서 텔레비전을 사러 가셨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그 말씀이 너무 좋아서 내려놓으려던 가방을 휘젓다 가방이 밥상 위에 떨어졌다. 내 어린 생각으로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두 집밖에 없었는데, 그 한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다른 한 집은 가겟집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태현실 장욱제 주연의 케이비에스 일일연속극 여로가 방영될 때면 우리 집 문 앞에는 동네아줌마들의 신발이 넘쳤다. 그때 내가 가진 뿌듯함은 대단한 것이었고, 짧은 그때가 가난과 슬픔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늦은 시간 아버지 옆에서 그 흑백텔레비전을 보다가 처음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었다. 이미자도 아니고 나훈아도 아니고 하얀 양복을 입고 오륙도에 서서 머리카락 휘날리며 멋지게 가락을 뽑아내던 그 낯선 가수. 그가 한국 가요사에 가장 빛나는 성좌가 될 줄 그때는 내가 어찌 알았으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 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의 건배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은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 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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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야망에 찬 도시의 복판에 혼자 버려진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의 고독을 노래한다. 타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인간이 더욱 철저히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을 비판한다. “허전하고 등이 시린삶 속에서 운명을 거는 사랑이야말로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사랑에 운명을 걸지 않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므로 를 통해 21세기의 피와 체온이 흐르지 않는 사이버 시대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삶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잃어도” “후회 않는 것이며,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남고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 줄기 맑은 물소리로남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존재의 이유이며 사랑의 숭고함이므로 는 기꺼이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가 아니라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힌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의 서

 

유치환의 생명의 서또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보여주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독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구체적 성찰, 인생과 사랑에 대한 잠언과도 같은 각성에는 못 미치나, 화자는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나의 생명의 그 원시의 본연의 자태를 배우기 위해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아라비아의 사막”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서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다짐한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흔치 않은 치열한 극한의 자아성찰과 의지를 보여준다.

돌아보면 나도 마음만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었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할 때 나도 저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서 생명의 시원(始原)을 다시 배우고자 하였으나 늘 하루가 번뇌의 하루라서 세상의 하이에나에게 쫓기었고, 내가 짊어진 삶의 애증에 겨워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꼈다. 네가 사랑하는 귀뚜라미를 나도 사랑하고, 네가 사랑하는 라일락을 나도 사랑하고, 네가 사랑하는 밤을 나도 사랑했지만 야망에 찬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져 오래 잊고 살았던 킬리만자로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의 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야말로 철저한 고독으로 빚은 자성(自省)과 그것이 길어 올린 강렬한 의지로 우리 가요의 핏줄에 면면히 흐르는 이별과 비애, 애원과 눈물, 회한과 미련을 일시에 불식하고 그 감상성(感傷性)과 나약성을 일순(一瞬) 부끄럽게 만든 가요로 우리 가요사에 일찍이 이만한 이런 위대한 노래가 없었으니, 이 소소한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이 위대한 노래와 그 가수 앞에 옷을 여민다.


☐ 이승주 :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의 식도』 『위대한 표본책』 『내가 세우는 나라』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이 있으며, 시 창작 이론서로 『현대시창작백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