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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7.30 11:27
1-13. 상징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상징(象徵, symbol)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문화는 상징을 토대로 이룩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상징의 동물, 상징적 동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스스로 상징이 되는 인간들이 우리 인류 집단을 이끌어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기호학에서는 상징을 기호의 세 유형 중의 하나로 이해한다. 상징은 도상(icon), 지표(index)와 함께 기호(sign)를 이루는 한 구성요소다. 기호학에서 말하는 상징은 그야말로 기호적인 개념이다. 단순히 형태와 그 소통적 과정만을 두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내면을 조성하는 그 어떤 심층적 기능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아마 기호학적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상징의 대표가 되는 것은 언어(언어적 기호 일반)가 된다. 기호학자들 중에는 기호보다 언어를 더 큰 범주로 보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언어적 기호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떻든 말이나 글, 숫자나 색채, 음표나 모르스부호 같은 게 상징을 대표하는 게 된다. 상징은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적 기호에 속하기 때문에 그 상징을 사용하는 집단 안에는 반드시 어떤 약속 같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약속 없이 함부로 상징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한 집단의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의 문화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기호학에서는 말한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학이나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시에서는 ‘추상적인 관념(딱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을 환기시키는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복합적인 '의미적 느낌'을 전달하는 유일무이한 표현의 묘(妙)로 간주된다. 상징이 없으면 시도 없는 것처럼 대접 받는다. 비유적 이미지든 서술적 이미지든, 은유든 환유든, 구체적인 어떤 것(사물이나 사건)이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상징(상징적 표현)이다. 시인들은 그런 상징을 만들어내는(발견하는) 타고난 기술자들이다. 좋은 시인일수록 아주 자연스럽게 그 기술을 구사한다. 그래서 시에서 만나는 좋은 상징들은 대개는 자유 연상의 결과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의식적인, 지적인 조작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상징적인 이해와 표현’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문학적 쾌를 선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발견'일 때가 많다.
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상징과 비유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상징주의’라는 말도 나오고, ‘비유어’, ‘상징어’라는 말도 나온다. 무엇이든 다 구별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입시 준비로 문학을 배운 학생들'의 질문이 특히 그렇다. 말들의 책임과 경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그런 질문이 좋아하는 대답은 이런 것이다. “상징은 그 자체의 문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의도하는 다른 관념을 환기하고, 비유는 오로지 보조관념이 지시하는 의미로만 존재한다”와 같은 것이다. "상징은 따로 보조관념을 가지지 않는다"라는 말도 좋아한다. 그런 대답은 마치 법정에서 판사들이 좋아한다는 "절차상의 하자"와 비슷한 것이다. 골머리를 썩일 필요 없이 그 형태만 두고 판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비유어’는 몰라도 ‘상징어’라는 말은 쓰면 안 되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보조관념을 따로 두지 않는’ 상징의 형태적 속성에 비추어 봐도 그게 맞다. '상징어'라는 말은 '논술문'처럼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설명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상징’은 명사적 이해보다는 동사적 이해를 해야 하는 개념이다. 그 과정과 효과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비유는 은유와 환유만 알면 되고, 상징은 그것이 환기해 내는 과정이나 효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문태준, 「가재미」)라는 상징적 표현이 있다. 이 상징적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고 시인과 동병상련하려면 독자들도 자기 안으로 ‘가재미’ 한 마리씩을 데려와야(데려가야) 한다. 자연산(직접체험)이든 양식(독서체험)이든, 한 마리씩은 꼭 가지고 와야 한다. 이 표현에서 "가재미는 비유어이다", "은유법이 사용되고 있다"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문맹의 교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보다는 "모든 텍스트는 내 콘텍스트 안에서 재구성될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된다"라고 가르치는 게 옳을 것이다. ‘가재미’는 병환으로 바짝 마른 어머니(모성적 존재)의 신체를 보고 떠올린 이미지, 생각, 감정(연민의 정, 분노, 안타까움, 후회) 같은 것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만들어낸(떠오른) 상징이다. 시인에게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재미다. 그것 하나로 이 시는 온갖 세속의 부정(不淨)을 깨끗하게 씻어낸다. 순수한 연민과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탐욕들을 일망타진한다. 동시에 하나(가재미)이면서 여러 가지를, 시인 주변의 모든 것(기억과 슬픔들)을, 제 한 몸으로 품어낸다. 이른바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들은 항상 독자들의 수준을 고려한다. 단도직입으로 속내 깊은 상징을 썼을 때 독자들이 겪을 당황과 혼란을 배려해서 앞에서 ‘가재미처럼’이라는 비유법을 먼저 쓴다(“그녀가 가재미처럼 누워있다”). 독자들에게 일종의 ‘도상적 상상력’을 발휘할 시간을 준다. 그러고 나서 ‘가재미 상징’을 통해 감각적으로, 구체적으로, 효과적으로 자신이 의도한 '의미적 느낌'을 전달한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독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불러낸다. 그런 상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두고 “앞에서는 직유법을 쓰고 뒤에서는 은유법을 쓰고 있다”라고 가르치면 얼마나 삭막한 시 수업이 되겠는가? ‘비둘기가 찾아왔다’는 상징(상징법?)이고 ‘비둘기처럼 평화가 찾아왔다’는 비유(직유법)라고 가르치는 책들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무식자들의 세상을 보면서 자나 깨나 문학의 본령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문학교사의 책무가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칼 융의 이론을 접했을 때 그가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척 생소했다. 그는 그것을 ‘원형적 표상’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저 깊은 무의식의 심연에 또아리 틀고 앉아 있는 아키타이프(원형)가 이미지의 형태로 자신을 쏘아올린 것이 심볼(상징)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문학 공부를 하면서 알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상징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효용론적 물음에 바탕하여, 순전히 집단적인 어떤 것이며 개인의 경험이 오염시키지 않은 상태의 그 무엇을 그것이 담아낸다고 말하는 것이 좀 황당하기도 했다. 가히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신비주의 느낌도 들었다.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 되면 ‘상징’이라는 단어가 또 하나의 혼란을 야기할 것 같아서 좀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런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희석되어 갔다. 나중에는 융의 상징론이야말로 그 어떤 문학적 상징론보다도 적극적이고 적절하게 상징의 효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 그 자체가 융이 말하는 ‘상징 작용’에 해당한다는 각성도 들었다.
융학파의 ‘상징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먼저 텍스트부터 소개한다. 여덟 살짜리 소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준 꿈 이야기이다. 이 소녀는 1년 뒤 성홍열로 죽었다. 그녀가 ‘나쁜 동물의 꿈’으로 이름붙인 것인데(그 소녀는 여러 가지 꿈을 기록하고 있었다) 융이 ‘어린이 꿈에 관한 세미나’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 번은 꿈에서 수많은 뿔을 가진 동물을 보았다. 그것은 다른 작은 동물들을 뿔로 마구 들이받았다. 그것은 뱀처럼 꿈틀거렸고 그것이 그 동물의 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푸른 안개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러자 그 동물이 먹이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하느님(하나님)이 내려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방에(네 모서리에) 네 명의 신이 있었다. 그러자 그 동물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이 집어삼켰던 작은 동물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 소녀는 비교적 풍부한 독서 경험(이야기 체험)을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병약한 어린이였던 것 같다. 꿈을 기록하는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부터 남다르다. 그리고 또, 표현이 아주 정교하면서도 정형화 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녀의 꿈 기록에서 ‘교육받은 자들’의 표현 방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만약 ‘수많은 뿔’이 ‘한 개의 큰 뿔’로 묘사되었다면 이 꿈은 전형적으로 만들어진 꿈, 즉 책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고서 만들어낸 ‘원형적 꿈’이 되었을 것이다. 문화적 전승이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떤 식의 ‘상징적인 것’들을 새겨 넣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녀의 꿈은 최종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상징들'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는다. 물론 칼 융에 의해서이다.
융과 그의 제자들은 이 소녀의 꿈을 ‘문화적 전승’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의 ‘원인’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큰꿈(big dream)’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래서 이 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사건, 배경들을 무의식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확장’한다.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꿈속에서의 그 동물은 이름이 없다. 그리고 어떠한 정확성으로도 묘사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많은 뿔’을 가지며 그것으로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해 ‘작은 동물들을 들이받는다’, 그리고 ‘뱀처럼 꿈틀거린다’라는 것만 듣는다.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우선 그 동물 자체가 반대적인 성격체를 결합한 것 같다는 것이다. 꿈틀거리고 뱀처럼 생긴 형체로 보아 그것은 의심 없이 축축하고 찬 요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뿔은 불과 정열, 즉 뚫는 힘이 있는 뜨거운 요소에 연관된다. 그 동물의 몸은 뱀처럼 꿈틀거리지만 능동적인 남성적 양상에 의해 보충을 받는다. 어두운 지하의 여성적 수동성, 게걸스런 땅의 상징이 남성적인 능동성을 겸비한다. 그래서 이 동물은 양성적으로 표현되는 원초적인 우주진화적 괴물, 즉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의 상징으로 보인다. 융에 따르면 최초 물질이 상반적 속성을 내함하고 있는 것은 거의 우주적 관념이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확장’을 꾀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하나하나 연역적으로 얻어낸다. 뿔 달린 뱀의 양성적 속성, 하나와 넷의 상징성, 원과 사각형의 의미, 푸른색과 안개의 상징성, 큰 동물과 작은 동물들의 관계, 죽음과 재생의 문제 등등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기들 방식의 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 이런 분석과 해석을 접했을 때는 상당히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부해 보면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해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세계는 나의 해석과는 전혀 관계없이 홀로(자기 멋대로) 존재한다. 무엇이든 바리바리 ‘확장’해서 ‘아는 것’을 늘리는 데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무엇을 조금 더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꿈 없는’ 잠을 자고 싶다는 것이다). ‘뿔 달린 용’들의 넘치는 무용담(활약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일보다는 가지런히 누운 ‘가재미’ 두 마리를 보고 동병상련하는 게 훨씬 유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상징’을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아키타이프)이 해면 위로 쏘아올리는 자기 이미지로, 마치 어디서부터 오는지는 모르지만 흐물흐물 바다 위를 진창으로 떠다니는 해파리 같은 것으로, '제 한 몸으로 모든 것을 감싸는 것'으로, 다이내믹하게 파악한 융의 생각은 충분히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 개념을 통해 “서로를 불쌍히 여겨라. 자기를 하찮게 보고 모두를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융의 가르침도 충분히 받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도 결국 그것이기 때문이다. 지엽적이긴 하지만 융의 ‘큰꿈(용꿈)’과 ‘작은꿈(개꿈)’의 구별도 유용하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큰꿈’의 존재를 믿는다. 미래와 비전을 보는 인간의 능력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인간이 ‘영원히 이해 못할 어떤 원천’을 안고 사는 존재라고 파악하는 것이 현재까지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 설명 모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을 안다고 떠드는 자들만큼 인간을 모르는 자들도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생각도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