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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평전 > 15-부산시절(3) 헝가리 사태와 3·15 마산의거를 보고 시 두 편을 쓰다

작성일 : 2023.07.24 12:22

<김춘수평전15-부산시절 (3)

 

헝가리 사태와 3·15 마산의거를 보고 시 두 편을 쓰다

-김춘수 시인의 부산 시절(3)

 

양 왕 용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는 이렇게 태어났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1956년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일기 시작하자 동유럽 공산국가에서도 비스탈린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 스탈린이라는 라코시가 개혁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19561023일 작가들과 시민,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 치안 당국과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저항이 완강하여지자 정부는 개혁파 라지를 수상으로 지명하면서 동시에 소련의 군사개입을 요청했다. 그러자 국민은 더욱 흥분하여 저항이 거세어졌다. 결국 정부는 공산당 일당 독재제도를 폐지하고 복수정당에 의한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와 중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결과적으로 114일 소련군의 개입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소련은 탱크 1,000 대와 병사 15만명을 투입해 헝가리 혁명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후 1110일 라지 정권을 퇴진시키고 다시 친소정권이 들어서게 하였다. 이 당시 헝가리 국민 약 2,500명이 사망하고 소련군도 722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태를 세계의 언론들은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며 탱크에 의하여 죽은 소녀의 사진이 한국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이 당시 부산대학교와 연세대 부산분교 강의를 마치고 마산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그 신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진해의 해군사관학교에도 강의를 하였는데 진해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김춘수 시인은 해군사관학교 강의를 마치면 진해의 <흑백다방>에 와서 차 한 잔을 하면서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시인은 이곳에 와 헝가리 의거 사태와 소련군의 총에 맞은 헝가리 소녀의 모습에 비분강개하면서 그 자리에서 펜을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은 이렇게 탄생된 셈이다. (김효경; 경남문학관 소장 김춘수 시집 꽃의 素描관련 글<경남문학관 리뷰2021 상반기 통권 제 59p13> )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19574월호(통권 45) 사상계에 발표된다. 이 시가 김 시인으로서는 사상계의 첫 발표작이다. 김요섭 웃음을 위한 , 김용호非情, 김광섭바람처럼등과 같이 발표되었다. 308-309 양쪽에 2단 세로로 편집된 긴 시이다.

이 시가 시집에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경남문학관에도 소장되어 있는 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꽃의 素描(1959.6, 서울 백자사,B6423편 수록)이다. 이 시집은 5개월 뒤에 오늘의 시인총서로 낸 다섯 번째 시집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1959.11, 서울 춘조사)과 중복 수록된 작품이 많다. 그 까닭은 꽃의 소묘원고를 강상구 시인이 가져가 먼저 내었기 때문이라고 김 시인이 밝히고 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은 이 시집에는 사상계에 발표한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에서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첫 발표작에는 소련군의 총에 맞아 죽은 13세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과 6·25 전쟁 때 한강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주었을 지도 모르는 13세의 한국의 소녀를 대비 시키고 뒷부분에는 김 시인의 동경 감방 체험까지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다섯 번 째 시집에는 감방 체험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 과정은 김 시인 생전에 현대문학사에서 발행한 김춘수시전집(2004.1)pp161-165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시집 발간의 경위도 우여곡절이 많다. 이 시집은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총서 시리즈로 발간한 것인데 1956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자인 김수영 시인의 달 나라 장난, 전봉건 시인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1968년 제3회한국시협상) 김윤성 시인의 바다가 보이는 산길(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등과 함께 발간되었다. 김 시인의 경우 1957년 제2회 한국시협상 수상자로 이 총서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집은 애초에 김춘수 시인은 시집 제목을 비의 리듬이라고 정하였는데 총서 편집인(장만영, 박남구, 김광균)의 한 사람인 박남수 시인이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으로 바꾸어 내었다고 김 시인이 직접 밝히고 있다. 이 시집에는 네 번째 시집 꽃의 素描에 수록된 작품에다 이미 다른 시집에 수록된 바 있는 시들을 <구시첩>이라고 하여 첨가 시키고 있으며 그 외 근작 3편이 추가되어 5부로 나누어진 총 36편의 시가 양장의 B6128쪽 세로로 편집되어 있다.

여기서 그가 시집 제목으로 삼고 싶었던 시 비의 리듬전문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이 시는 비의 리듬이라는 제목은 부제이고 雨季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눈에 봄을 담은 소녀여 뉴우케아여, 너는 죽고

너를 노래한 희랍의 시인도 죽고

지금은 비가 내린다.

젖빛 구름

지중해

거기서 나는 포도의 많은 송이를

흙탕물에 우리들의 발이 짓밟는다.

소녀 뉴우케아여,

우리들의 망막에 곰팡이는 슬고

퀴퀴한 곳에서

벼룩 빈대가 알을 깐다.

습기 있는 눈물은 누가 우는가,

찾아갈 고향도 없는데

도시의 오물은 수채구멍으로 빠져 나갈 것인가,

눈에 봄을 담은 소녀여,

뉴우케아여,

너는 죽고

희망도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지금은 비가 내린다.

비는 내려서

또다시 소녀 뉴우케아여,

봄을 담은 네 눈을 우리들의 추억이 적시고

하꼬방의 판자 위에 무심히 잠들어 있는 유아의 뼛속으로 스민다.

삼백육십 개의 유아의 뼛속에서 흐르는

비의 강물이여,

소녀 뉴우케아는 삼백육십 번을 거기서도 죽고

지금은 마흔 밤을 비가 내린다.

-雨季전문

 

이 시의 부제인 비의 리듬은 앞의 두 시집에만 있고 그 뒤에는 김 시인 스스로 삭제한 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를 전체적으로 볼 때 지극히 감각적이고 내리는 비에 대한 우수의 정서가 담긴 이미지들이 많다. 달리 말하면 김춘수 시인 초기시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남수 시인의 제목 선정은 지극히 김춘수 시인을 현실문제 특히 공산주의라는 정치권력이 어린 아이들을 무참히 죽인 상황을 시적으로 고발한 시인으로 인식시키게 되었다. 사실 1950년대 후반 동유럽의 자유화물결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 붕괴에 전조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김 시인은 주의 깊게 본 것이다.

이 시는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시행된 제3차 교육과정에 의한 국정 인문계고등학교 국어3학년 교과서(1975.2 초판)에 수록되어 지금은 이미 60대가 된 전국의 인문계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졌다. 112쪽부터 115쪽에 걸쳐 수록된 이 시는 시집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에 수록된 작품을 원 텍스트로 하여 몇 군데 수정이 되었으며 다섯 군데의 각주가 있고 각주 첫 번째는 부다페스트지명에 대한 소개로 다음과 같다.

 

헝가리 수도, 19561023, 거국적인 반공 혁명이 일어났으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 때, 밀려드는 소련 탱크와 맨주먹으로 싸우는 시민들 속에는 열 서너 살의 어린 소년 소녀들도 끼어 있었다,(인문계고등학교 국어 3P.112)

 

수정된 것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뒷부분에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라는 행에서 두 달두 주일로 수정된 것이다. 지금도 원 텍스트는 두 달로 되어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헝가리 의거는 19561023일에 시위가 시작되어 1110일 소련군에 의하여 강제 진압된 미완의 혁명이었으며 그 기간은 19일 즉 두 주하고 5일이 많다. 그러나 김 시인은 10월과 11월에 걸친 두 달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김 시인은 실제로 1970년대 이 시가 고등학교에서 가르칠 즈음에 이미 무의미시의 경향으로 돌입한 지도 10년이 넘어 있었다. 무의미시로의 실험을 타령조연작으로 보면 그 첫 번째 작품인 타령조 1사상계195912월호(통권77)에 발표되었고, 그 결산으로 시집 타령조· 기타(1969.11 문화출판사,국판 112)를 낸지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 시인 자신이 다음 교과서에서는 이 작품을 게재하는 것보다 대표작 이 수록되기를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하였다. 전적으로 그 결과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제4차교육과정기(1981-1987)에 발행의 주체가 <문교부>에서 <한국교육개발원>으로 바뀌었지만 역시 국정인 고등학교 국어 3(1986.3 초판 p32))에 오늘날에는 국민애송시 가운데 하나가 된 이 수록되어 인문계뿐만 아니라 실업계 고등학교 전 학생들에게까지 가르쳐졌다. 물론 그 은 김 시인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수정된 것이었다. 즉 마지막 행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에서 시어 의미눈짓으로 바꾼 것이었다.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고등학교<국어>교과서뿐만 아니라 중학교 국정 <국어>교과서에도 다음의 두 작품이 수록되었다.

*4차교육과정기; 분수(중학국어 3-1,1984.3 초판,PP160-161)

*6차교육과정기(1992-1997); 차례(중학국어 1-2,1995.9초판,p38)

 

1960315일 집권당인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조직적이고 유례없이 벌어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하여 맨 먼저 일어난 도시가 마산이다. 그 발단은 마산시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야당인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 당원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져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사전투표지가 발견되어 항의하다가 민주당 참관인 부부가 경찰서로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참관인의 남편 정남규 씨가 경남도의원 신분이라 곧 석방된다. 그러자 정 의원은 오동동의 민주당 당사로 가 민주당 당원들과 논의 끝에 독자적으로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민주당 참관인을 전원 철수시킨다. 그런 후에 가두방송을 통하여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시위에 돌입한다.

오후 3301500여명이 민주당 당사 앞에서 시위를 벌리고 경찰과 충돌하게 된다. 저녁에는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 앞에서 1만여명의 시위대가 몰리게 되면서 시위의 규묘가 커졌다. 마산 중심가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시위진압에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아 정전이 되고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다. 이를 틈 타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자 시위대들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관공서와 경찰서와 파출소 그리고 자유당 당사 등을 습격한다. 이때에 사망한 시위대는 총 9명이었으며 부상자는 80여명이었다. 그 가운데는 고등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462차 시위 411일 마산상고 입학예정자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오르자 또 한 번의 시위를 하였으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끝내는 4·19 혁명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 현장 마산에 김춘수 시인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베꼬니아 꽃잎처럼이나

-마산사건에 희생된 소년들의 영전에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북마산 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1960315

너는 보았는가……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서

또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북마산 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서

이었다 끊어졌다 밀물치던

그 아우성의 노도를……

너는 보았는가……그들의 앳된 얼굴 모습을……

뿌린 핏방울을

배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그런데 이 시를 특종처럼 신문에 보도한 시인이 있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다가 은퇴한 조영서(1932-2022) 시인이 바로 그 분이다. 그는 1960년 당시 국제신보(지금의 국제신문) 편집부 부장이었다. 김 시인이 3·15 직후 쓴 위의 시를 그에게 보내온 것이다. 조 시인은 그 당시의 감회를 국제신문50년사(1997.9)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28일 발간될 석간 2(당시에는 조석간 발행이었음) 마산사태 화보를 전면 특집하는데 마산의 김춘수 시인이 시 한편을 급히 보내왔다. 간밤의 사태를 보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사신과 함께그 시를 전면 화보 속에 실었다. 시 제목이 베꼬니아의 꽃잎 처럼이나……」이다. 화보가 돋보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는 이 시가 4월혁명시 효시인 것으로 안다. 또 이것을 국제신보가 처음 보도하기에 이르렀다.<(국제신문50년사1997.9 p139 34·19 혁명과 특종 )

 

이 글을 쓴 후 조 시인은 시 전문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 후 이 시가 발표되자 김 시인은 당국의 조사를 받을 뻔 했다고 부기하고 있다. 이처럼 김 시인은 3·15마산의거 현장에서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시로 남겼던 것이다. 이 시는 그 동안 시집에 수록되지 않고 있다가 1976년 정음문고 148 로 발간된 김춘수 시선(정음사1976.11문고본 200)에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죽도에서수련별곡등과 같이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현재 국립3·15묘지로 승격되어 공원으로 조성된 3·15 사망자 묘지에 시비로 우뚝 서 있다.

김 시인은 3·15 마산의거의 정황을 산문으로도 남기고 있다. 자전소설 꽃과 여우마지막 부분 238쪽과 239쪽에 더욱 실감나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민극장> 앞으로 나서자 <일신 백화점> 바로 위쪽의 네거리 근방에 사람이 운집해 있고 이따금 고함소리가 들리고 누가 치는지 박수 소리도 들리곤 한다. 우리 세 사람(김춘수 시인, 강신석 화백, 그리고 김 시인 집을 찾아온 다른 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은하수 다방>까지 다다르자 민주당 당원들이 머리에 헝겊을 동여매고 <부정선거 다시 하자!> <대한민국 만세!> 등의 구호를 외쳐대며 네거리를 시장 쪽에서 오동동 쪽으로 건너가는 짬이었다. 사뭇 비장한 낯색들이다. 화구(강신석 화백 호) 선생이 이 광경을 목격하자 어느새 우리를 빠져나가 쏜살같이 군중 속으로 내달린다. 내달리면서 <에이-!>하는 무슨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창자가 다 찢어질 듯이 부르짖는다. 한순간의 일이다. 아까 내 집에서 한 화구 선생의 말이 뇌리에 스친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른다말야……> 드디어 그날 밤 그 찬변이 일어났다. 이것이 내가 목격한 마산의 3·15의 발단이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한국 측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