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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7.02 02:52
<김춘수평전(13); 부산>
김춘수 시인의 부산대학교 강사 시절과 그 때 만난 사람들
양 왕 용
김춘수(1922-2004) 시인은 1953년 9월15일 마산고등학교를 사임하고 1954년부터 3년 동안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시간강사로 출강하였다. 그 무렵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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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무렵부터 나는 부산대학의 강사로 <신문학사>, <시론> 등의 강좌를 맡아 출강하게 되었는데, 2-3년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영도에 있었던 연세대학 분교에는 전임대우로 출강하였다. 이리하여 매주 3일 정도는 부산에 있게 되었다. 마산서 집을 옮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두 군데의 그 얄팍한 강사료로는 여관 생활을 할 수도 없어 이 친구 저 친구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주로 후배들이다. 지금 생각하면 비위도 참 좋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부산시인협회 엔솔로지 ⟪남부의 시 Ⅱ⟫1975.12 pp126-131 김춘수; 「나의 부산 시절」)
그러나 김 시인의 부산대학교 강사 시절의 공식적 기록은 부산대학교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98년 발간한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50년』에 다음과 같이 김춘수 시인의 행적이 남아 있다.
1957년에는 부산대총학생회에 의해 ⟪효원⟫이 창간되었는데, 김정한, 이경선을 비롯한 교수와 황성록(54학번)을 비롯한 국문과 학생들이 필진으로 참가하는 등 국문학과가 중심축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 때 유치환·김현승·송욱·고석규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연구⟫를 창간하기도 하였던 김춘수가 국문학 강사로 초빙되어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이에 힘입어 당시 학생들의 창작열은 고무되었다.(『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50년』,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50년사 편찬위원회 PP5-56)
이 기록은 김 시인 출강 초창기 기록이 아니라 끝 무렵의 기록이다. 이러한 형편이니 그 당시 수강한 제자들의 회고와 김 시인의 자신의 글들에서 그 전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말하는 후배들 집에 머문 이야기 속에서 그 시기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 부산대학교는 구덕운동장 뒤 지금의 대신중학교 자리인 서대신동 3가 96-2번지(현 서구 대신로 109번길 10)에 1948년에 단과대학으로 개교하여 여러 해 동안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53년 3월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직후였다. 1952년 9월 그 동안의 전시연합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대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목조 건물들이 백강당이라 이름한 강당과 더불어 지어져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54년 신학기부터 김춘수 시인은 시간강사로 출강했던 것이다. 1948년 부산대학교가 단과대로 개교한 때부터 국어국문학과가 개설되어 있었으나 1951년까지 입학생은 6,1,4,11 명으로 미미하였다가 1952년 22명, 53년 29명 김 시인이 출강한 54년 46명으로 유난히 많았다. 그러다가 1955년 24명, 56년 23명, 57년 21명으로 20명대로 정착되었다. 김춘수 시인 앞에는 6·25 전쟁기라 서울 서 피난 온 마산 출신 김용호(1912-1973) 시인이 시 분야 강의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 휴전이 되자 그가 상경하여 빈자리에 그 당시 국어국문과 학과장인 김정한(1908-1996)의 주선으로 출강하게 된 것이다.
김 시인이 앞의 글에서 후배들이라 언급한 가운데 맨 처음 사람은 재일교포 시인으로 알려진 강상구(1934-)시인이다. 그는 부산 출신으로 1954년 당시 동아대학교에 다니는 시인 지망생이었다. 부산대학교가 있던 구덕운동장 뒤 지금의 대신중학교 근처에 집이 있었다. 그는 돈 많은 재일교포 형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강 시인은 집에는 자당이 계셨는데도 부산대학교 교사 옆에다 따로 방을 얻어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 방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골방이었는데 강 시인은 김 시인을 낮에 시내에서 만나면 밤이 되어서야 거기로 데리고 가 재워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강 시인은 내성적이라 말이 없고 문학이나 시에 대한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강상구 시인은 ⟪현대문학⟫에 「새」(1958.12), 「둔주」(1959.7), 「포옹」(1960.11) 등이 유치환 시인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그는 1960년대 동아대학교를 졸업하지도 않고 일본에 건너가 사업을 하였다. 필자가 연구과제 수행을 위하여 1997년 12월 일본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 연구원들과 함께 新宿區의 그의 아내가 집에서 운영하는 숙박시설에 머물면서 연구수행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김춘수 시인이 작고한 뒤인 2012년 민음사에서 2001년에 낸 김 시인의 시집『거울 속의 천사』를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일본 동경 思潮社에서 『鏡の中の 天使』라는 일본어 번역시집으로 발간하였는데 시집 뒤에다 해설까지 직접 썼다.
김 시인은 고향 통영의 후배 허창도(1927-2000)의 서면 어딘가의 다락방에도 신세를 졌다. 하창도 후배는 당시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로 영화평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와는 밤을 세워가며 문학과 영화에 대한 관련성을 토론하였다고 한다. 허창도 기자는 허창이라는 필명의 영화평론가로 알려져 있다. 뒷날 부산일보 문화부장이 되었으며 1958년 부산일보사가 전국 최초로 주최한 부일영화상의 산파역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필자도 생전의 허 평론가를 몇 번 만난 적은 있다. 그리고 김 시인과 동향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으나 긴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허창 평론가의 아들 허문영 (1962-)씨 역시 영화평론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는 2021년 3월부터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이 통영초등학교와 경기고보 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허창 영화평론가와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춘수 시인이 이 시기에 신세진 사람으로 부산대학교 국문과 출신으로 요절한 문학평론가 고석규(1932-1958)이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시 출신으로 북에서 반공지하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화원 생활을 하던 중 극적으로 탈출하여 1949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6·25 전쟁 때에는 자원입대하여 전쟁의 참화 속에서 월남하여 군의관이 된 아버지 고원식 씨와 동부전선에서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그는 전쟁 중에 가벼운 부상으로 제대하여 아버지가 제대 후 부산 범일동 자성대 근처에서 내과와 소아과를 진료하는 병원 <고내과>를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 정착하였다. 1952년 부산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입학하였다. 이때의 고석규 평론가의 모습은 동기인 부산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장관진(1930-2009) 교수의 글 「고석규의 편모」(『고석규 문학전집 4』,마을2012 pp 243-247)에 자세히 나와 있다. 두 사람은 군복을 입은 채 그 당시 부산대학교 윤인구(1903-1986)총장의 면접을 직접 봤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3, 4학년(1954-55년) 때에 김 시인의 강의를 들었다.
고석규 평론가와 김 시인과의 인연은 간단하게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고석규 평론가와 동시대에 활동한 송영택(1933-) 시인의 증언에 의하면 고 평론가가 김춘수 시인을 많이 좋아했으며 같이 동인 활동도 많이 했다고 한다. 부산의 대학생 중심 동인지 ⟪신작품⟫ 8호(1954.12.31.)에 기성 시인인 김 시인이 시 「꽃밭에 든 거북」과 산문 「서정적 인간」으로 참여한 것도 고석규 평론가 때문이었고 그 뒤에 발간한 『시연구』(1956.5.31.)의 경우 고 평론가의 열정과 김 시인의 기성시단에서의 위치가 만난 것이라 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은 고석규 평론가와의 관계에 대하여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뉴 크리티시즘의 기수-고석규 3주기를 맞이하여」(⟪부대신문⟫,1961년 4월 17일)
「나의 부산시절-‘시연구’ 출간전후-」(⟪남부의 시· 2⟫1975, 부산시인협회 pp126-131)
「고석규의 평론세계」(『고석규 문학전집·4』pp213-214,1993)
「고석규」(<나의 예술인 교유록>, (강현국 편 『우리 어느 둑길에서 다시 만나리』,2019, 학이재,pp313-319)
이 가운데 두 번째 것은 앞에서 인용한 글이다. 강상구 시인 허창 영화평론가와 함께 언급한 글인데 그 글의 6페이지 가운데 5페이지가 고 평론가와 관련된 글이다. 한 사람에 대하여 네 번이나 글을 쓴 다는 것은 김 시인의 글 가운데 유일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 글 가운데 앞부분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셋째 번으로 내가 신세를 진 사람이 고석규 형이다. 그의 엄친이 경영하시는 병원의 2층엔가 상당히 넓은 방이 그의 서재 겸 거실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꽉 둘러싸인 그의 방에서 이따금 나는 식객노릇을 하게 되었다. 강, 허와 그가 다른 점은 그는 언제나 침상 뿐 아니라 그때 그 때의 식사까지 제공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방은 웬지 만만치가 않아 자주 드나들지는 못했었다. 고 형과는 만나면 떠나는 시각까지 문학과 철학 담으로 지샐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아주 열광적인 문학도였다. ( ⟪남부의 시 Ⅱ⟫p 127, 앞의 글)
고 평론가는 1956년 3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과 석사 1호로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 시절에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한다면서 범일동 아버지 집을 나와 대신동 학교 옆에 방을 얻게 되는데 김 시인도 마산에서 오가는 불편 때문에 같은 집에 하숙을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조석으로 문학을 논하게 되었다. 그 뒤에 두 사람은 고 평론가의 제안으로 ⟪시연구⟫라는 동인지를 기획한다. 그 전말을 김 시인은 앞의 인용 글에서 밝히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 평론가는 편집위원으로 김 시인과, 김현승, 김종길, 김성욱 등을 모시기로 했다면서 동인지 발간의 경비는 자기가 부담하겠지만 표면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창간호 인쇄는 김 시인이 있는 마산에서 하기로 하고 표지는 그 당시 마산에 와 있던 전혁림 화백에게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특집은 ‘모더니즘 비판’으로 하고 권두 에세이는 청마 유치환, 시단비평은 김 시인과 김 시인의 친구이자 고향 후배인 ⟪문예⟫출신 평론가 김성욱, 그리고 고 평론가가 공동집필하기로 하면서 각각 담당 부분은 밝히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 시인의 연락으로 조지훈 시인의 글도 받고 ⟪신작품⟫ 동인들의 시도 받았고, 김현승, 김남조, 신동집, 송욱, 윤일주 등의 작품도 받는 등 그야말로 전국적인 동인지가 탄생한 것이다. 2집 발간 계획까지 수립하였으나 고석규 평론가의 갑작스러운 죽음(1958.4.19.)으로 무산된다.
고 평론가는 1954년 대학 재학 중에 동국대 국문과 출신 김재섭과 함께 2인집『초극』(1954.6 삼협문화사)을 발간하였으며 그 책을 들고 김춘수 시인의 마산 집을 방문하였다고 하며 이때가 고 평론가를 처음 만난 것이라 기억하고 있다.(김춘수;뉴크리티시즘의 기수 고석규전집·4 p210) 이 책은 김재섭의 시와 고석규의 평론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초창기 교내의 모든 문학도들을 중심으로 한 부대문학회(1952.11 결성)를 주도하였고, ⟪부대문학⟫(1953), 동인지 ⟪시조詩潮⟫(1953),⟪산호珊瑚⟫(1954) 발간의 주역이었다. 그는 1954년 ⟪신작품⟫7호부터 동인으로 가담하여 「모더니티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하기도 하여 그야말로 전천후 활동을 벌렸다. 그 결과 그 당시의 부산대 국문과 유일한 현대문학 교수 김정한 작가의 사랑을 받아 1호 국문과 석사학위 수위자가 된 것이다. 대학원 재학 시절인 1957년에는 ⟪문학예술⟫ 2월호부터 7월호까지 「시인의 역설」이라는 평론을 6회 연재하였다. 대학원 입학 직후 교육학과 출신 그 당시 시를 습작하던 추영수(1937-2022)시인과 결혼(1957.4.15.)하였다. 이때에 김 시인은 고 평론가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식에 축시를 낭독하기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강현국 편,앞의 책 p315) 이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10년의 연령 차이를 가진 사제간이라기보다 문학에서의 동지요 친구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김 시인은 고 평론가가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강사로 나가는 1958년 4월부터 부산대학교 강사는 그만 두고 부산 지역에서는 전임대우로 나가던 연세대 부산분교(처음은 연희대 부산분교, 1957년 세브란스의대와 통합하면서 연세대라는 명칭 생김)에만 출강하고 있었다. 연세대 부산분교는 1951년 영도의 피난교사로 개교된 그 자리에 휴전 후인 1953년 8월 연세대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 상경하지 못하는 잔류 학생들의 학업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개교한 대학이었다. 1958년에는 연세대 실업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63년에는 연세대 가정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65년에 가정대학마저 서울로 올라가면서 없어졌다.
김 시인은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이 대학에 전임대우로 출강하였다. 그런데 1958년 4월19일 대학에 강사로 출강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 평론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타계한 것이다. 김 시인이 이 소식을 들은 정황에 대하여 고석규 3주기를 맞이하여 쓴 글(김춘수;뉴크리티시즘의 기수,앞의 책 p210)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장례식이 끝난 시점에 연세대 부산분교 출강하려 부산으로 가서 그 당시 부산과 마산 시외버스 정류소와 가까운 국제신보사에 들려 최계락(1930-1970) 시인으로부터 고 평론가의 작고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김 시인의 고 평론가를 잃은 슬픔은 오래 지속되었다. 김규태(1934-2016) 시인이 쓴 「고석규의 죽음과 보들레르」(『고석규 문학전집 4 pp280-284)에서 고석규 시인의 1주기인 1959년 4월19일 김 시인이 제주에 취해 고 평론가의 묘소에서 엎드려 흐느끼는 모습이 영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다고 적고 있는 부분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고석규 평론가의 국문과 후배로는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하다가 창간된 ⟪스포츠 조선⟫으로 옮겨 전무까지 지낸 조병철(1935-) 시인이 있다. 조 시인은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늦게 1955년에 입학하였다. 조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1학년을 대신동 교사에서 보내고 2학년 때에 금정산 기슭 장전동 캠퍼스에서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시론>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부산대학교는 1954년 장전동 캠퍼스 조성 공사를 하여 1955년 대학본부와 도서관(현쟁의 박물관 건물)이 개관 되고 공과대학이 먼저 이전하고 1956년 3월 20일 문리과 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 등이 옮겨왔다. 2000년대까지 본관으로 사용되던 현재의 인문관 건물은 1955년 공사를 시작했으나 1959년 완공되었기 때문에 조 시인은 캠퍼스가 어수선했다고 회고했다. <시론> 시간의 가장 인상적인 일은 친구들과 어울려 산성에서 막걸리를 먹다가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갔더니 김춘수 시인이 크게 역정을 내셔서 혼이 난 사실이라고 기억했다 .
그러나 조 시인은 김 시인으로부터 시 습작의 능력을 인정받아 작품을 가지고 유치환 시인을 찾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치환 시인을 찾아가 시를 보여주었으나 아직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대학 4학년 때인 1958년에는 부산일보 기자로 미리 취업이 되었는데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는 김정한 교수의 소개로 김 시인이 일 주일에 한번 씩 칼럼을 쓰게 되어 신문사에 자주 들려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윤평원 (1936-) 시조시인이 있다. 윤 시인은 1956년 신입생으로 1학년 때부터 장전동 캠퍼스에서 공부를 했으며 2학년 때인 1957년 <시론>과 <신문학사>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시론> 시간에 시작에서 리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김소월의 시에 대하여 높게 평가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 했다. 그리고 그가 시간강사 마지막 제자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면서 강의가 조용했으나 논리정연한 명강의였다고 기억하였다. 이러한 기억들은 『부산대학교국어국문학과 50년』에 수록된 54학번 정상옥 수필가, 55학번 윤영효 전 양덕여중 교장 등의 회고기(앞의 책pp262-266)에도 나타나 있다.
필자가 1969년 경북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중학교 교사를 몇 년 하다가 1972년에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신설되는 국어교육과에 현대문학 전공 교수가 필요할 것 같아 대구로 김춘수 은사님의 도움을 청하려 간 적이 있었다. 그 때에 김정한 교수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1974년2월)하기 전이었다. 은사님께서는 김정한 교수에게 간단한 소개장을 써주시고는 “나는 부산대학교 교수가 못되었지만 자네는 꼭 되게”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 소개장을 들고 대신동의 김정한 교수 자택을 찾아 가 부산대학교 교수가 될 수 있는 길을 안내 받았다. 그 때에는 필자는 은사님의 말씀을 단순히 필자를 격려하는 말씀으로만 들었다. 그러나 이번의 이 글을 쓰면서 김 시인의 글 특히 자전소설 『꽃과 여우』(1977년 민음사,pp235-236)를 보니 김 시인의 부산대학교 전임이 되기를 기대하고 출강하여 1954년부터 1957년 까지 4년 동안 애쓰시다가 대학중퇴자라 하여 좌절된 데 대한 상처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부터 진주에서 마산으로 옮겨온 해인대학 조교수로 발령 받는 1960년까지 그 당시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서 버스로 여러 시간 시달리면서 진주 해인대학으로, 진해 해군사관학교로 그리고 부산의 부산대학교와 영도에 있었던 연세대 부산분교로 동분서주하셨던 은사님의 모습을 상상하면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양왕용;시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동북아기독교작가회 의 한국측 차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