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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풍류

문학풍류 2019 가을겨울호

작성일 : 2020.04.02 06:22

제8호 가을•겨울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안기태ㅣ시도 아닌 것이 •05
문형렬ㅣ황무지집 외 •05
최서림ㅣ삼천포 외 •05
시가 있는 가요산책 / 이승주 •05
특집1 ▶
인문학스프 ▶ 양선규ㅣ통도사 가는 길 •05
•쟈니리, 뜨거운 안녕
•나훈아, 찻집의 고독
•김현식, 사랑했어요
•송골매, 어쩌다 마주친 그대
•패티김, 이별
•박일남, 갈대의 순정
•이 용, 잊혀진 계절
•은방울 자매, 마포종점
•조성모, 가시나무
•송창식, 고래사냥
특집2 ▶
시대의 풍류, 세상을 담다.
Vol. 8
가을·겨울
제호 : 율산 리홍재
2019
구영도ㅣ000000•109
김서련ㅣ브로도웨이에서 ‘시카고’보다•134
안지숙ㅣ스토커의 문법 •153
정가 10,000원
발행처 문학풍류 발행일 2019년 11월 10일
주소 부산시 중구 대청로 141번길 15-1 대륙빌딩 301호
전화 051-248-4145팩스 051248-0723
이메일 pungryu3366@hanmail.net
발 행 인 : 김원일 양왕용 박명호
편집위원 : 박홍배 박희섭 홍승우 조성래 배재경 구해인 한경화
문학풍류 : 시대의 풍류, 세상을 담다. 제7호 / 저자명: 양선규 외.
-- 부산 : 작가마을, 2019
p.;cm
ISSN 2671-5341 : ₩10000
문집[文集]
한국 현대 문학[韓國現代文學]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
신작시 ▶
다시 읽는 ▶
소설
소설 ▶
<시> 이태수ㅣ팽나무가 있는 풍경 외 1편 •05
정순영ㅣ가시 외 2편 •05
이철희ㅣ엽글 3 외 2편 •05
김형술ㅣ노래꾼 외 1편 •05
이정모ㅣ들꽃, 거기 외 1편 •05
김경수ㅣ메디슨카운티의 다리 외 1편 •05
강문출ㅣ아직은 외 1편 •05
전 진ㅣ장천 뻐꾹제 외 1편 •05
이영옥ㅣ언밸런스 외 1편 •05
<작가노트> 어느 소설가의 초상ㅣ정영희 •05
※ 본 도서는 2019년도 부산광역시,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예술특성화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광고
특집Ⅰ
안기태 문형렬 최서림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안기태 화백 ㅣ
詩도 아닌 것이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7
詩도 아닌 것이
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詩도 아닌 것이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9
1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문 형 렬 ㅣ
황무지의 집
오래 쓸쓸하였네
황무지는 집을 만들고
거대한 슬픔은 아주 작아서
집 속에서 등불을 밝혔지
황무지의 이름으로 꽃이 피고
새벽 벌판으로 달려나가는
늑대와 은여우와 순록을 따라
외로운 날짜는 유황 연기처럼 떠나갔다
그곳은 안식, 드넓은 집
공중으로 차오르는 새떼들의 행로,
수천 개의 해와 달이
눈먼 등불을 창문마다 매달고
길없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외로운 날짜는 없다
거대한 슬픔은 아주 작아서
그리운 소금 기둥으로 녹아나거나
집을 품어 안는 강물로 차오르니
황무지는 집 속에서 스스로 잠드네
그곳은 긴긴 노래의 집,
기다리는 얼굴이 환한 등불로 내어걸리는,
등불마다 이정표가 새겨진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11
그러나, 그곳은 황무지에 불과한 곳,
언제나 쓸쓸했네, 오래 알 수 없네
황무지의 이름으로 꽃이 피고
떠나는 꽃잎이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1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패랭이꽃 1985년
- 누이에게
바람이 부딪치는 곳에 패랭이꽃이 많단다
어머니 말씀 따라
바람 부는 언덕에서 패랭이꽃을 캐었다
뿌리까지 캐어서 말려야 네 기침에 효험이 있다고,
첫직장 교사시절, 첫 소풍 따라가서
학생들이 싸온 김밥 몇 개 얻어먹고
비탈진 숲에 패랭이꽃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교사가 된 것을 정말 자랑스러워했다
해 지는 줄 모르고, 학생들이 돌아간 줄도 모르고
말린 패랭이꽃을 네 손에 전해주던
그때가 언제일까?
늦홍역 끝에 얻은 기침이 도지기만 하면
혈관이 터져 두 손으로 받쳐 들던 붉은 피처럼
네 그리움처럼 쏟아지던 날짜들,
약도 소용없고 수술도 할 수 없어 속으로 품어 안기만 했던
너는 추억처럼 원망처럼
아버지만 살아계셨어도, 하고 말하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기다림에 젖은 눈빛뿐,
기침소리 솟구칠 때마다
약값이 없어 제때 치료 못했다고 어머니는 애태우시고
긴 시간 건너고 건너서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13
시골집 맏며느리 노릇에다 두 아들 다 키워놓고
너는 애닯게 잠들었구나
막내 누이와 누나는 소리 내어 울고
나는 슬픔으로 견고해진 네 얼굴을 쓰다듬는데
바람 속에서도 연붉게 피어나는 저 패랭이꽃들처럼
환한 네 목소리들이 주르르 쏟아지는구나
작은 오빠...!
큰 오빠도 먼저 떠나버렸는데
우리, 꼭 오래 살아야 해요,
요양병원에 누운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서서
손가락 내밀며 해맑게 약속하던
지난 봄날처럼,
우리가 시집, 장가를 가고 푸른 꿈도 늙어갔지만
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기침은 멈출 줄 몰랐던 것처럼,
나는 다 알고 있고, 나는 잊은 적이 없다
네가 낮에는 양초공장 일하고 밤에 청옥공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 죽고 없는데 공부해서 뭐하냐며
책가방을 빼앗아 와르르 쏟아버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찢어 던져도
너는 가만히 쪼그려앉아
한 장씩, 찢어진 책을 풀로 붙여 책가방에 넣어 들고
고입검정고시 공부하러 공민학교 가는 뒷모습을,
어둠 속, 그날부터 40년이 더 지나가도
네 얼굴 볼 때마다 겹쳐보였다
교사 월급 받고, 소설 원고료 받아서
1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냉장고 사고, 세탁기 사고, TV 사고 너를 시집 보낸 뒤에도
어디서나 손이 시렸다
이제 어디에서도 너를 만날 수 없지만
네가 가버린 아득한 그곳은 기침도 없고
숨도 차지 않고
그리움마저 아프지 않는 곳이니,
어머니에게 나는 또 뭐라고 네 소식을 전해야 하는지
네가 가르쳐다오
나는 오래오래 피는 패랭이꽃처럼
시린 손 비비며 네 대답을 기다리고 있구나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15
4월 편지
- 1974. 4. 27
네가 가진 봄을 따라가면
언제나 나는 계절 밖
머나먼 벌판에 서 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흩날리는 목소리마다 네 얼굴 새겨져 있는데
차라리 없어도 좋은 4월에
낯선 바람이 등뼈를 지우고
눈이 아파온다
바람 부는 4월을 비우고
내가 비워지고
남은 모든 날짜들은
꽃잎 떠나듯 무너지는 하늘 그리움
우리 오래 지나서, 서른 해쯤 지나서
물방울로,
달려가는 강물로 지나서
마침내 바다에서 만나면
낡은 보석처럼 빠르게 스쳐가도
금방 알아보고 가슴이 또 주저앉을까
1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문형렬
경북 고령 출신으로 영남대 사회학과,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꿈에
보는 폭설』 , 『해가 지면 울고 싶다』, 장편소설 『바다로 가는 자전거』, 『눈먼 사
랑』, 『연적』, 『어느 이등병의 편지』 등이 있다.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17
ㅣ최 서 림 ㅣ
삼천포
몸에 항구를 지닌 여인들은 사월이면
엉덩이가 삼천포 앞바다 만해지곤 했었다.
쫓기는 남자들이 살그머니 들어와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다가곤 했었다.
무언가를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듯,
죽어서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갈치처럼 날을 세워 잠들 곤 했었다.
NL도 PD도 몰라서 더 큰 여자들,
여자가 아닌 여인들의 바다가 있었다.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는 바다.
1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특집1 /그림 그리는 시인, 시를 쓰는 화가┃ 19
돌아가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흑백사진을 통과해야 한다.
LP판으로 배호, 남진, 나훈아를 돌려야 한다.
까까머리 동무들과 학교 땡땡이 치고
송사리랑 도시락 나눠먹던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슬레이트와 콘크리트가 점령하기 전 봉인된 시간 속으로 돌아
가려면
두꺼비랑 헌집 주고 새집 받는 모래사장을 건너야 한다.
시간이 개울물처럼 돌고 돌다가
낡은 영화 필름처럼 멈추어서기도 하는 그곳으로 돌아가려면
풀무치와 나란히 낮잠을 즐기는 원두막에 들러야 한다.
참외 서리쯤 슬쩍 눈감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명함 내놓기 머쓱해지는 그곳에 끼어들려면,
살구나무 성벽을 지키고 있는
깐깐한 참게와 가재가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2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최서림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
다』,『물금』,『버들치』,『시인의 재산』등이 있다.
인문학 스프
양선규
소설가 / 대구교대 교수
통도사 가는 길
양 선 규
소설가, 대구교육대 교수
「통도사 가는 길」(조성기)을 다시 읽었다. 재독再讀은 보통 ‘특별한 내면의
요구’에 부응할 때가 많다. 의식은 포착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조회照會할 필요가 있을 때 재독이 이루어진다. 무의식이 자
주 사용하는 고전적인 자기표현 방법 중의 하나다. 무의식이 본능에 친
화적이고 당연히 야만적이고 반문화적인 충동일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
해다. 무의식은 종종 최상층의 문화를 이용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
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먼 곳으로의 여행이나 ‘손에 잡히는
독서’ 같은, 순수한 교양 욕구의 표피를 쓰고 오래된 억압들의 게릴라들
을 풀어놓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일
반적으로 널리 회자되는 예술의 효용도 “예술은 전적으로 무의식의 활
동 영역이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독은 그러므
로 ‘무의식의 여행’, ‘무의식으로의 여행’, ‘무의식을 위한 여행’이다. 재
독 리스트를 작성해 보면 자신의 내면에 그려진, 마치 심해深海지도와
같은, 트라우마의 여러 얼굴들과 대면할 수 있다.
2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인문학 스프ㅣ
재독이 무의식의 소관이라는 말을 해 놓고 보니, “움직이는 정신의 항
구에 한 번 정박했던 배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말이 생각난
다. 어딘가에서 한 번 썼던 말인데, 창작인지 인용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인문학 하는 이들이 늘 그러하듯, 보통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언제
가 어디선가 한 번 본 것들을 옮길 때가 많은데, 그 출전이 모호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떻든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다시 찾은 정신(영혼)의 항구’에서
발견될 때가 많다. 재독再讀일 때 그 책이 왜 내 것인지가 판명된다. 달리
말하면 결혼 대상자를 만나는 이치와 같다. 초대면만으로는 내게 맞는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초독初讀은 그저 상대의 얼굴만 보고 헤어진
경우다. 첫인상이 좋다고 꼭 좋은 반려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살아 봐
야 좋고 나쁘고를 알 수 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이 내 안에
들어와 내 과거와 현재를 두루 겪어봐야 내 책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내 콘텍스트, 내 삶의 맥락 안에 독서 텍스트가 들어와야 비로소 진정한
읽기가 성사된다. 그래서 한 번 읽어서는 늘 부족하다. 우연한 재회再會
때 인연이 맺어지는 경우가 많듯이, 독서도 재독 때 의미가 만발한다.
재독은 겉보기에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다. “우연히 손에 잡혔다.”라
는 말이 재독의 독후감 앞에 잘 붙는다. 그러나 재독이란, 성공적인 연
애에 있어서의 모든 재회再會들이 다 그러하듯,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날
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초독 때 앞으로의 향후 계획이, 그 책과
나의 미래의 일정이, 잡힌 일이다. 물론 그런 스케줄 잡기는 무의식의
관할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무의식의 행사
는 인내를 요구할 때가 많다. 무의식은 참을성 있게 움직이는 정신의 항
구가 열리는 때를 기다린다. 항로가 열리고 배가 돌아올 때는 보통 밤이
다. 주위는 캄캄하고 오직 항구의 불빛만 찬란하다. 불 밝힌 부두의 화
려찬란華麗燦爛속으로 배가 들어오는 광경이 꽤 볼만하다. 거듭 말하지만
인문학 스프┃ 23
이 세상에 우연한 재독이라는 것은 없다. 오래 기다린 첫사랑의 귀환만
있을 뿐이다.
우연을 가장하고, 내 정신의 항구에 다시 돌아온 「통도사 가는 길」은
큰 배는 아니었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많이 단련된, 작고 단단하고 단
아한 배였다. 선수船首에 새겨진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선명했다. 생로병사
의 괴로움苦과 그것의 원인이 되는 번뇌의 모임集, 번뇌를 없앤 깨달음의
경계滅와 그 깨달음의 경계에 도달한 수행道이 자신의 선적지라는 것을
따박따박 적고 있었다.
고집멸도, 해탈을 꿈꾸는 자들의 성전인 통도사 대웅전 불단에는 부처
가 없다. 뒤편의 금강계단 석종부도에 불골佛骨과 불가사佛袈裟가 모셔져
있어 따로 부처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취지다.
...그것은 허공이었습니다. 허공으로 인한 충격이 나를 내려앉게 만들
었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에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불단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3
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그 허공은 막연한 형태로
가 아니라 가로 누운 긴 직사각형으로 반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
다. 어떻게 보면 단아한 허공이었습니다. [중략]
한 순간, 5층 석탑의 무게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던 그녀의 존재가 시
선이 머물고 있는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나마저도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녀도 없고 나도 없었습니
다. 다만 텅 빈 삼랑진역 플랫홈에 어머니만 홀로 서 있었습니다. 허공
속에서도 법당 뒤편 금강계단의 석종부도 꼭대기가 마치 선덕여왕의 한
쪽 유방처럼 봉긋이 떠 있었습니다. 그 유방의 젖을 먹고 자라는 듯 금
강계단 너머로는 신선한 녹색의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석종
부도 속에 모셔져 있다는 싯달타의 사리마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기를
2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바랐습니다.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중에서]
「통도사 가는 길」의 주인공이 통도사의 ‘통도’가 통도通道가 아니라 통
도通度라는 것을 아는 순간의 묘사다. 도道는 내 안의 것이고 도度는 우리
안의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 이동’이 왜 있고
왜 필요한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재독이 내게 찾아온 듯했다. 「통도사
가는 길」을 다시 읽고 내가 한 일은, 엉뚱하게도, 통도사가 아니라 삼랑
진역을 다시 찾는 노고勞苦였다. 삼랑진역은 몇 개의 각각 분리된 이미지
들이 모호하게 하나의 틀 안에 모여 있는 내 무의식의 저장고 중의 하나
였다. 그 이름이 처음 내게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버지
는 또 한 번의 불운을 겪으며 그동안의 고苦와 집集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형식은 야반도주夜半逃走였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
어져 집을 나와 대구역에서 만났다. 남행열차를 탔다. 부산행 열차를 타
고 가다 삼랑진에서 내렸다. 역사 앞의 중국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부산과 마산을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행선지를 의논했다. 마산으로 결
정되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증조부의 늦둥이)가 법원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때 처음 우리 가족의 미래가 결정되는 방식을 보게 되
었다. 피난지 제주도에서 올라와 목포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을 때도 아
마 그랬을 것이다. 형이 언젠가 말했다. 기차가 한강 철교를 지날 때였
다. 오랜 여정으로 모두 지친 표정으로 맥을 놓고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와, 한강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거였다. 형은 그때 아버지의 얼
굴이 참 낯설었다고 했다. 형은 그때 이미 아버지와 결별했던 것이다.
어쨌든 삼랑진은 그런 식으로, 억울하게도, 내게는 최초의 디아스포라
로, 이산의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몇 년 뒤, 내가 전혀 다른 두 세
계를 오고갈 때마다 마주치는 관문關門이 되었다. 삼랑진역은 때로 출구
로, 때로 입구로 내 고苦와 집集의 대명사가 되었다. 경전선을 벗어나 경
인문학 스프┃ 25
부선으로 진입할 때마다 나는 해방의 쾌를 느꼈다. 나이가 들고, 경부선
축에 놓여 살고 있는 지금도 역시 삼랑진은 그때의 관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다만, 이제 경전선과 경부선이 서로의 역할을 맞바꾸고 있다
는 것만이 다르다. 언제부턴가 나는 마산을 안식의 근거지로 삼고 있다.
퇴직 후에는 그쪽에다 작은 집필실을 하나 마련할 생각도 하고 있다.
다시 찾은 삼랑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역사 앞의 중국집도, 경전선
과 경부선을 오고가던 내 비굴과 남루도, 덜컹거리는 두 칸짜리 전동차
안에서 헤어진 첫사랑도, 그곳에는 없었다. 그저 지루하고 초라한 한 장
의 시골 풍경화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섰다가 역
앞 철물점에서 고무호스를 3m 샀다. 요즘 들어 창가로 떼 지어 몰려드
는 비둘기들이 골치였다. 오전 내내 창틀에 앉아서 구구거리며 양광陽光
을 즐겼다. 창틀에 덕지덕지 앉은 비둘기똥을 물로 씻어내려면 그 정도
의 길이는 필요했다. 수십 년 전, 그 역사 앞 중국집에서 나는, 부산으로
갈 것인지 마산으로 갈 것인지를 어머니에게 묻던 젊은 아버지의 그 끝
모를 무력감에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일찍이
아버지 곁을 떠났다. 요령부득, 그저 삼랑진을 경유해 경전선에서 경부
선으로 내 몸을 옮겨 실어야 했다. 그 와중에 첫사랑과의 마지막 이별도
거기서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깨끗하
게 리모델링한 삼랑진 역사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통도사의 불단처럼
그곳에는 내가 기대했던 그 어떤 그림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불단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3
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복층의 현대식 역사는
시원한 유리창으로 통째로 덮여있었다. <계속>
양선규 ㅣ 소설가이자 무사인 양선규는 1983년 제7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대표작으로 「난세일기」,
「칼과 그림자」, 「고양이 키우기」, 「나비 꿈」 등이 있으며 인문교양저서로 『소가 진설』, 『감언이설』 등이 있다. 대
구교육대 교수.
2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시가 있는 가요산책



쟈니리, 뜨거운 안녕
나훈아, 찻집의 고독
김현식, 사랑했어요
송골매, 어쩌다 마주친 그대
패티김, 이별
박일남, 갈대의 순정
이 용, 잊혀진 계절
은방울 자매, 마포종점
조성모, 가시나무
송창식, 고래사냥
2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情 둔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고려가요, 「만전춘滿殿春」중에서
고려가요 「만전춘滿殿春」은 겨울밤 얼음 위에, 거기 덧보태어 서늘한 댓
잎자리까지 깔아서 그 위에서 밤을 지새워 얼어 죽는다 하더라도 사랑
하는 님과 함께 보내는 정情둔 이 밤이 더디 새라고 새지 말라고 노래한
다. 이만큼 진솔하고도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담은 노래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야말로 한겨울밤 얼음 한기寒氣를 이기는 사랑의 뜨거움이다.
또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비둘기 나란히 구구대는데
시가 있는 가요산책 6
자리 리
뜨거운 안녕
기어이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너무도 깊이 맺힌 그날 밤 입술
긴긴 날 그리워 몸부림쳐도
남자답게 말하리다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또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다정히 손을 잡는 밤
기어이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너무도 깊이 맺힌 그날 밤 입술
긴긴 날 그리워 몸부림쳐도
남자답게 말하리다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은 그대가 기어이 떠나신다면 그를 보내드리
리라 다짐한다. 뜨겁게 사랑하였으므로, 오늘밤, 별들은 더욱 ‘다정히’
손을 잡고 비둘기들도 더더욱 ‘아프게’ 나란히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데, 그날 밤 너무도 깊이 맺힌 뜨거운 입술을 두고 그대 이제 기어이 떠
나고 나면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말도 더는 들을 수 없을 것인데, 그리하
여 홀로 남은 긴긴 날들을 뼈에 새긴 그 말과 가슴에 맺힌 그 입술 때문
에 그리움으로 몸부림칠지라도 그대가 “기어이 떠난다면” 그래도 나는
“남자”이니까 남자답게 보내드리고, 남자답게, 목이 메는 울음의 뜨거운
눈물을 참고 뜨겁게 안녕이라고 말하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래,
세상에 “사랑이 식었다.”는 말보다 더 슬픈 말도 많지 않겠다. 이 말은
‘사랑은 본디 뜨거운 것이다.’라는 전제를 내포한다. 사랑이 본디 뜨거운
것일진대, 사랑이 뜨겁지 않고 그저 미적지근하다면 우리 사랑이 애틋
하고 절절할까.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춥고 쓸쓸할지 모르겠다.
시가 있는 가요산책┃ 29
그래서, 제대로 사랑도 해보지 않고 사랑이 그저 미지근한 것인 줄 믿
는 사람들아. 제대로 한번 사랑해 보시라. 사랑의 온도는 체온보다 높아
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왜 ‘뜨거운 눈물’이 되고, 안녕이 왜 ‘뜨거운 안녕’
이 되는지 이 생이 가기 전에 알아보시라. 그런 다음에 왜 쟈니 리의 이
노래가 그토록 ‘뜨겁게’ 가슴을 울리는지 그 사람에게도 말해 주시라.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 때문에 기꺼이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어도 좋을 당신, 오늘밤 기도문 대신에 이 노래를 외어라.
남산南山에 자리 보아 옥산玉山을 베어 누워
금수산錦繡山이불 안에 사향麝香각시를 안아 누워
남산南山에 자리 보아 옥산玉山을 베어 누워
금수산錦繡山이불 안에 사향麝香각시를 안아 누워
약藥든 가슴을 맞추옵사이다 맞추옵사이다
―고려가요, 「만전춘滿殿春」 중에서
3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시가 있는 가요산책┃ 31
시가 있는 가요산책 7
나훈아
찻집의 고독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 일어나는 미묘
한 심리를 난해한 시적 기교나 수사적 표현 없이 잘 보여준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일 분 일 초 기다리는 순간은 물리적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주
먼 데서” “천천히 오고 있는” 것 같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오고 있
는 것처럼 아주 ‘오래’이게 느껴진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다음에는 아마도 틀림없이 “너일 것이
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힐 때,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내 마음은 그
사람에게로 간다.
지금은 레스토랑이지만, 그때는 다방이었다.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
하던 해 삼 월 바로 나는 울산의 남고에 초임발령을 받았다. 학교 앞에
방을 얻어놓고 식사는 인근 식당에서 해결했다. 학교에는 나 말고도 총
각이 서넛 더 있어 자주 같이 어울렸다. 내가 제일 막내였다. 더러 저녁
을 같은 식당에서 먹게 될 때면 식당 건너편에 새로 지은 다방에 가서 커
피를 마셨다. 새로 온 다방아가씨는 그다지 커지 않은 몸매가 맵시가 있
었고 예뻤다. 이름을 연화라고 했다. 우리가 서로 조금 친해졌을 때 아
3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가씨는 전에 배구선수를 조금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생활을 아주 잠
깐만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어쩌다가도 쓸쓸해 보인 적은 없었다. 눈매
가 깊고 선했으며 상냥했다. 타향객지에서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 그냥
어쩌다가는 나 혼자 가서 잠깐씩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 일
도 없이 친해졌고 손님이 없는 저녁때면 아가씨가 끓여준 삼계탕을 얻
어먹기도 했다. 그녀는 밤 열두 시쯤 일을 마쳤다.
어느 날 그녀가 그 다방이 아니고 시내의 다른 다방에서 만나자고 하
였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하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하였다. 자
기는 일 마치는 대로 바로 거기로 가겠다고 하였다. 밤 열두 시쯤 태화
교를 건널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손님들이 다 돌아간 텅 빈 다
방에서 기다렸다. 괜히 설레었다. 열두 시,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났
다. 「찻집의 고독」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십 분이 지나고 석 달 같은 삼
십 분이 지났다.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약속 시간 흘러갔어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
아 ~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요
시가 있는 가요산책┃ 33
아 ~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요
모름지기 세상사가 그러하듯 사랑에도 빛과 그늘이 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 님을 만난다는 설렘과 기쁨으로 이층의 다
방 계단을 오를 때 내 발걸음이 마구 뛰고 내 발걸음보다 앞서 내 가슴
이 더욱 쿵쿵 뛰어 다방을 들어설 때, 내가 먼저 도착했으면 그 기다림
의 시간이야말로 비단보다 진주보다 꿈결보다 더 귀한 나만 아는 감미
로움일 때, 그때가 사랑의 빛. 그러다가 그것도 잠시 그 설렘과 기쁨이
“찻잔”처럼 싸늘히 식으면 그때는 사랑의 그늘. 사랑의 고독과 슬픔. 그
때 사랑의 그늘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이렇게도 애
가 타도록” 괴로움으로 우리의 가슴 속을 파고든다.
맑은 찻물 속에
어떤 봄기운 하나가 건네준
꽃잎 연서 한 장 비치네.
바람의 미향(微香)과
새순 위의 햇살의 재잘거림
깊은 눈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말씀
따뜻하게 우러난 차를 마시며
천천히
꽃잎 연서를 읽는 동안
몸속으로
따뜻한 꽃 한 송이
3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꽃창(窓)이 열리네.
― 이승주, 「따뜻한 꽃」
나는 지금 커피 대신 녹차를 마시며 지금까지 사연도 모른 채 헤어졌
던 그 아가씨를 기다린다. 지금은 헐리고 없는 그 옛날의 다방에서 「찻
집의 고독」을 들으며.
시가 있는 가요산책┃ 35
88올림픽이 지난 그 해, 동성로 네거리엔 겨울 밤바람이 매서웠다. 인
적이 뜸해가던 그 거리에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에서는 김현식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걸음은 종종 쫓기는데 노래는 호
객꾼처럼 귀를 이끌었다. 동성로를 다 빠져나와 지하도를 내려설 때야
비로소 노래는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놓아주었다. 지금도 우
리들은 잃어버린 사랑과 그때 동성로의 겨울 차가운 밤바람을 이 노래
로 더불어 기억한다.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 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이제 와 생각하면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나에게 심어 주었죠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3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시가 있는 가요산책 8
김현식
사랑했어요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 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 ♬~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 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지금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당신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혼자서 걷
는다.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그래도 잊을 수 없는데, 지금 나를 두
고 ‘저만치’ 떠나가는 “정든 님”. 나만 혼자 남겨두고 떠나가면 나는 어이
하나. “떠나가면”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가정이 아니다. 지금 정든 그
님이 나를 떠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님을 향한 나의 하소연에도 어쩔 수
없이 돌아설 때, 발걸음마다 맺혀지는 “사랑의 추억”이여.
그 해, 동성로 네거리의 겨울 밤바람이 매서울 때, 또 한 사람 사랑을
잃고 이 노래를 들으며 아마도 눈발 휘몰아치는 종로 네거리를 지나갔
으리라. 1989년 3월, 스물아홉으로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기형도. 그가 죽은 뒤 일 주일 후에 문예지에 실린 그가 남긴 마
지막 유작,
시가 있는 가요산책┃ 37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사랑을 잃은 “나”는 사랑과 함께 했던 것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눈
다. 나의 사랑으로 하여 “짧았던 밤들”, 임의 창窓가와 내 집의 창밖을 쓸
쓸한 나의 마음으로 떠돌던 “겨울안개들”, 사랑으로 인해 타오르고 흔들
리던 불면의 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저 “촛불들”, 아무 말도 이제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흰 종이들”, 작별의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사랑
을 잃었으므로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 없는 “열망들”. 아, 이제는 내 것인
‘절망’을 안고 “나”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내 사랑이 떠나
간 추억의 “빈집”에 갇힌다. 사랑을 잃었으므로 에이고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세상과 작별하고 사랑의 영원한 추억의 빈집에 든 기형도.
나는 기형도의 시집을 세 권이나 샀다. 처음에 사서 읽고 교무실 책상
위에 꽂아두었는데 누군가 와서 들고 갔다. 두 번째 사서 읽고 교무실에
두었는데 또 누군가 들고 갔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서 집에 두고 있다.
우리네 사랑도 삶도 완성은 마침내 이별인가? 거리에 한파가 몰아치
는 지금 “사랑이 무언지” 그것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라는 노랫말이
되울림이 되어 자꾸 마른 가슴을 헤집고 파고든다.
3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앗겨 버렸네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두 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왜 이리
용기가 없을까 음!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내 가슴만 두근두근
답답한 이 내 마음 바람 속에 날려 보내리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네
이슬처럼 영롱한 그대 고운 두 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네
시가 있는 가요산책┃ 39
시가 있는 가요산책 9
송골매
어쩌다 마주친 그대
그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왜 이리
용기가 없을까 음!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내 가슴만 두근두근
바보 바보 나는 바보인가 봐
사랑은 오래 공들여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쩌다’ 오게 된
다는 것. 우연히, 어쩌다 마주쳐 오게 된다는 것. ‘우연’이야말로 진정 우
리가 숭배해야 할 신神? “어쩌다 마주친”, “이슬처럼 영롱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두 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청년의 노래다. ‘마음’은
‘주는 것’이기도 하고 ‘빼앗기는’ 것이기도 한데, 가슴이 두근두근 훨씬
치명적인 것은 ‘주는’ 것이기보다 어쩌다 마주친 눈길에 ‘빼앗기는’ 것이
다. 단 한 번의 눈길이야말로 한 순간에 마음을 포획하는 완벽한 포충망
이 아니던가.
겨자씨보다 작은 사랑의 홀씨 하나가 두 눈을 통해 우리 가슴으로 들
어오고 그것이 싹트고 꽃피려고 “두근두근”하는 마음은 이내 내 가슴에
서 큰 산처럼 자라지만 대개는 누구나 그렇듯 그것을 고백하는 일은 “용
기”가 있지 않고서야 쉬운 일이 아니다. “바보” 같이 용기가 없다면, 그
래서 끝내 고백하지 못한다면 사랑은 꽃피지 못하고 시들고 만다.
가슴속에 묻어 둔 말을 화롯불에 구워
그대 만나게 되면
얼굴이 붉어질까, 더듬거리게 될까.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
그대 만나게 되면
가슴이 천둥칠까, 바닷물에 씻겨질까.
4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대 만나게 되면
멍청이가 되네, 한 줌의 먼지가 되네.
― 홍승우, 「그대 만나게 되면」
여백이 많은 시다. 나직이 소리 내어 읽을수록 가락의 맛도 우러난다.
여백이 많은 시가 대개는 울림의 여운이 길고,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
는 시가 대개는 울림의 여운이 오래 지속된다.
홍승우의 「그대 만나게 되면」도 ‘마음을 빼앗겨 버린’ 청년의 내적인 사
랑의 고백이다. 내 가슴에 은근한 화롯불이 피워지고 내 안에 간직한,
점점 뜨거워지는 마음을 그대에게 건네려고 잠 아니 오는 밤마다 가슴
속에 묻어 둔 말을 화롯불에 익힌다. 그리하였다가 그대 만나게 되면 내
얼굴이 붉어질까, 더듬거리게 될까…. 내 안에서, 그대를 향한 연모의
마음이 뭍을 향해 달려가는 파도처럼 일어설 때, 그대 만나게 되면 가슴
이 천둥칠까, 화롯불 같은 마음이 바닷물에 씻겨질까…. 아아, 좋은 일
이 생길지도 몰라. 그러나 그대 만나게 되면 얼굴은 붉어지고 자꾸만 더
듬거리게 되어 ‘바보’ 같이 “멍청이”가 되겠네, 그대 눈부심 앞에 서면 나
는 한없이 작아지고 보잘 것 없는 “먼지”가 되겠네.
첫눈에 좋은 시보다 읽을수록 좋은 시가 좋은 시다. 홍승우의 「그대 만
나게 되면」은 그냥 읽으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몇 번 읽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크게 가슴에 닿아 온다.
모니터 앞에 앉아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재생해 놓고 홍승
우 시인의 「그대 만나게 되면」을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쓰는 이 아침, 한
평생 나를 따라온 사랑이여, 그늘 속에 들거나 사람들 속에 숨어도 피할
수 없는 사랑이여, 그대여, 어쩌다 마주친 그대 두 눈이 첫눈에 눈이 부
시가 있는 가요산책┃ 41
셔 긴 날들을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대여, 옛 그날이 다시 온다면 당신
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면 오래 괴로울 줄 이제 난 알기
때문이지요.
4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스위치를 누른다. 시디에서 패티김의 「이별」이 흐른다. 퇴근길 나의 애
마는 차 안 가득 선율을 담고 밀양강변을 달린다. 시종 풀었다 휘감으며
졸였다 놓았다 가락을 압도하는 패티김의 자재롭고도 애틋한 음색. 귀
와 마음은 금방 노래의 선율을 따라 노을 진 잔물결이 된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달을 쳐다 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 ~♬ ~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시가 있는 가요산책┃ 43
시가 있는 가요산책 10
피티김
이별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의 주체는 냉정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노래의
화자인가. 여기서 그렇게 잊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사랑한 그 사람을 “냉
정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정말로 냉정한 사람이라서가 아니
라 아마도 틀림없이 그에게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
던, 어떤 더 큰 운명이나 시대가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소식조차 전
하게 할 수 없는, 그 사람도 틀림없이 둥근달을 쳐다보면서도 나를 생각
하고 자다가 깨어서도 나를 잊지 못하고 생각하고 있을 (행여 이 글을 읽
을 J도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에 대한 투정이다. 주체가 냉정한 그 사
람이라면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는 화자로서는 그렇게 믿고 싶은 추측
과 바람이요, 주체가 노래의 화자라면 그것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대한
상황의 가정이다.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는 주체는 일
차적으로는 “냉정한 사람”이겠으나, 그 어느 한편이 아니라 쌍방 모두라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헤어짐에는 그 사람의 잘못뿐만 아니
라 나의 잘못도 전적으로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후회하게 될
“지난날”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과거시점이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나
의 반성과 자책으로 아파올 ‘미래시점에서의 지난날’로도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부르면 부를수
록 애틋함 속에 스며든 또 다른 겹의 애틋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서로는 그렇게도 사랑했으면서도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이별은,
“둥근달”―둥근달이야말로 “그날 밤 그 언약을” 기억 속에서 재생시키는
플레이어―을 쳐다보며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 그 헤어짐이 곧
“후회”로 가슴을 적셔올 것이므로, 비록 몸은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
졌”다 할지라도 “바다 건너 두 마음”만은 ‘멀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떨
어진’ 것일 뿐이므로 나도 냉정한 그 사람도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
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월만큼 야속하고 무정한 것도
없어 그 세월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거두어간다 하여도, 세월 앞에 우
4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리가 ‘그리움’으로 살아 견딤으로써 세월에 굴복하지 않은 한 그 세월조
차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마저는 거두진 못하지 않았던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 윤동주, 「편지」
언외유의言外有意라. 아프다.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 진정 못 잊는
다는 말을 말고 /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아프고 또 아프다. 표현된 의미 너머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
는 사람들에게는 “그립다”는 말보다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란 말이
더 사무치리라.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 진정 못 잊는다는 말”보다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란 말이,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 행여 울었
다는 말”보다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사무
치리라.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란 말,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
란 말은 이제는 지나간 추억일 뿐이라는 말이 아니다. 기억의 심층에 이
시가 있는 가요산책┃ 45
미 화석으로 굳은 추억일 뿐이란 말이 아니다.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란 말은 여전히 그리워서 흰 편지지에 “그립다고 써보니” 더
욱 그리움이 눈물로 북받쳐 말을 이을 수 없다는 말. 언외유의를 아는 사
람은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란 말이 진정 잊지 못하고 긴 밤을
울음으로 지샌다는 말보다 더 아프다는 걸 알리라.
패티김에 젖고 윤동주에 젖고 내 지나온 푸른 봄날에 젖는 동안 나의
애마는 어느새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오늘 하루도 나는 이 노
래만으로도 애틋하면서도 행복하였다 하겠다.
4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내 어릴 적 어느 날 아버지가 전축을 사 오셨다. 쌀가마만한 스피커가
양쪽에 달리고 턴테이블 안쪽 벽면마다 거울이 끼워진 커다란 전축이었
다. 지금 희미한 기억으로 아마 미8군에서 나온 것을 어떻게 구하셨다
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그것을 대단히 애지중지하시고 늘 집안이 텅텅
울리도록 커다랗게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시곤 하셨다. 구비 구비마다
꺾어지고 늘어지고 감정이 실린 아버지의 노래솜씨는 가수 못잖았다. 그
때 나는 전축에서 울려나오고 아버지가 부르시는 노래를 수도 없이 많
이 들어서 웬만한 노래는 2절, 3절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 중에 이
「갈대의 순정」은 그 시절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로, 내 철없던 그
시절에 나도 모르게 나도 사랑을 잃고 우는 사나이의 비감한 심정이 되
어 듣기도 하고 속으로 따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내가 노래방에
라도 가면 몇 곡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중의 한 곡이기도 하다.
시가 있는 가요산책┃ 47
시가 있는 가요산책 11
박일남
갈대의 순정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어라
아 ― 아 ― 갈대의 순정
말없이 보낸 여인이 눈물을 아랴
가슴을 파고드는 갈대의 순정
못 잊어 우는 것은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어라
아 ― 아 ― 갈대의 순정
“사랑에 약한” 사나이는 나처럼 눈물이 많았다. 이별 앞에서는 “갈대”
처럼 흔들렸다. 이별 앞에 흔들리며 우는 사나이에게, 사랑을 못 잊어
우는 사나이에게 노래의 화자도 따라 흐느끼며 떠나가는 여인이 어찌 눈
물을 알까 하고 “울지를 말아라.”고 사나이를 껴안는다. 그 비통한 상심
의 장면 앞에 나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내 어릴 적 그때나
젊은 날에. 젊은 날 나도 말없이 떠나보낸 이별 앞에 지푸라기조차 잡고
싶은 갈대였다. 이별 앞에 지푸라기조차 잡고 싶은 갈대였던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여기서 “갈대의 순정”이 그냥 이리저리 지조 없이 흔들리
는 뜨내기사랑을 말하는 게 아닌 줄 알기에 이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더
욱 내 가슴을 파고든다. 순정이 어찌 이리저리 지조 없이 흔들리는 순정
이 있을까. 갈대에게 물어보아도 어느 갈대가 순정이 그렇다 할까. 지조
없고 연약하고 우유부단하다 할까. 다음의 시를 보라. 몸은 비록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갈대가 얼마나 의지가 강한지.
꿈만은 절대, 휘이면 안 된다
4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갈대는,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거침없이 여름 강 한복판으로 쭉쭉 生
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꿈만은 절대, 휘이면 안 된다
그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한낮의 물 바닥 위를 푸들거리며 갈대는 겁
도 없이, 곧장 물살을 향해 머리를 내뻗고 있었다
― 김동원, 「갈대」
한여름 땡볕 아래 갈대들이 거센 물살을 건너고 있다. 반쯤 물에 잠긴
갈대의 허리가 물살에 떠밀려 휘고, 물 밖으로 드러난 갈대의 상반신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갈대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
지 않고 어떤 의지로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거침없이” “쭉쭉” “강 한복
판으로” 발을 내뻗고 있다. 그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에. 그 확고한 꿈
이 “폭염”이나 “물살”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고 있다. 힘을 내. 절대 꿈
만은 휘면 안돼. 갈대를 보며 시의 화자는 자신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
고 있잖은가. 그래서 “갈대의 순정”은, 사랑을 잃고 못 잊어 우는 사나이
의 마음은, 이리저리 지조 없이 흔들리는 뜨내기사랑이 아니라 갈대의
절대 휠 수 없는 꿈처럼 절대 변할 줄 모르는 “갈대의 순정”이 된다. 아,
그래서 나도 사랑 앞엔 약하고, 말없이 보낸 그 여인을 잊지는 않을란
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갈대의 순정”이다.
시가 있는 가요산책┃ 49
복현동 캠퍼스엔 꽃바람이 불어왔다. 학도호국단 군사훈련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책을 좀 보다가 저녁때쯤 도서관을 나왔다. 돌아갈 곳도 그
저 막막해 도서관 옆 야외박물관 언덕에 비스듬히 앉았다가 가방을 베
고 그 잔디밭에 누웠다. 아득히 멀리 서산 너머로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
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물기 어린 망막에 얼비치어 왠지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애틋함이었
다. 이미 그때 나는 아름다운 것은 애틋하고 슬픈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철학적 인식을 터득하고 있었던 터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런 연유로
가슴이 자꾸 비워지고 있었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한때이거나 서산 너
머로 붉게 사그라지는 또 하루의 일몰 등 이 세상 아름다운 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룰 수 없는 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
다. 스무 살 때 벌써 늙은 베르테르였던 내게 약혼자가 있는 샤를 로테
5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시가 있는 가요산책 12
이 용
잊혀진 계절
를 사랑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때는 얼마나 애틋하고 아름답게 가
슴을 적시던지….
우우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우우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슬픔을 안고 “이룰 수 없는 꿈”의 좌절 앞에 모든 형상과 색채가 증발
시가 있는 가요산책┃ 51
되고 사라져 버린 하얀 길을 밤을 새워 나 혼자 걷던 ‘캠퍼스의 그 계절
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캠퍼스의 은행나무 잎새에 노란 물이
들고 계절이 깊어 가면 동류同類의 고뇌와 방황으로 우리들은 이 노래
를 다시 부르기 위해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다렸고, 그 날이 되면 어떤
결연한 의식을 치르듯 비감에 젖어 이 노래를 부르고 불렀다. 이 노래로
우리의 젊음은 하나가 되었고, 이 노래로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꿈
의 상처를 달랬다.
비가 내리고 시월의 마지막 밤, 불빛에 젖은 노래가 전자오르간을 타
고 흐른다. 우산도 없이 소녀들은 늦도록 노란 은행잎을 밟고 어렵사리
이별의식을 치른 처녀들은 오래 전에 잊은 옛사랑의 전화번호를 기억
해낸다. 불혹의 어떤 주부들도 긴 스타킹을 신고 남편의 귀가 전으로 젊
은 애인을 만나러 떠났다. 거리마다 술집마다 젊은이들은 상처를 덧내
며 고함을 지르고 더러는 아무렇지도 않는 일들로 멱살을 잡는다. 잠적
에서 돌아온 선배들은 젊음은 무한정한 낭비라고 가르치고, 빗줄기 속
에서 맨주먹으로 어둠을 감당하는 후배들의 주정 전자오르간에 실려 한
번 더 높았다가 잦아진다.
― 이승주, 「시월의 마지막 밤」
해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돌아오면 가게와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들의 잊혀진 계절을 기억해내고 그 계절을 추억한다.
참으로 낭만이 흐르던, 잊을 수 없는 「잊혀진 계절」 그 시절이었다.
5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기다리는 새벽은 기어이 온다.”는 말. 그렇다. 기다리면 기어이 새벽
은 왔다. 그러나 기다리지 않아도 새벽은 왔다. 안 왔으면 하고 바라던
새벽도 왔다. 그래, 새벽은 기다린다고 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더 이상 그런 믿음에 기만당하
지 말자. 끝내 오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은 기다리지 말고, 필연코 오게 되
어 있는 것만을 기다리자. 새벽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나
는 불혹의 중반에 이르러서야 간밤을 눈물로 새우고 맞이한 새벽에 뼈
아프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시가 있는 가요산책┃ 53
시가 있는 가요산책 13
은마울 자매
마포종점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의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 둘씩 불을 끄고 깊어 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의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하면 무엇하나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첫’이란 말은 ‘설레다’란 말과 같다. ‘첫날’, ‘첫 시작’, ‘첫 만남’은 늘
설렘을 동반한다. 설렘은 곧 어떤 기대감이다. 새로이 변화된 환경, 새
로운 경험, 새로이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는 마음을 부풀게 한
다. 사랑도 ‘첫사랑’은 더욱 그렇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 첫사랑을
더욱 잊지 못하지 않은가.
‘‘첫사랑’. 첫사랑이란 말은 혀끝이 아리다. 첫사랑이 모두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면 굳이 첫사랑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돌아오
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첫사랑 못 잊어 “첫
사랑 떠나간 종점” “밤 깊은 마포종점”에 다시 찾아왔다. “강 건너 영등
포의 불빛 아련”하고 “여의도 비행장의 불빛만 쓸쓸한”, 첫사랑 떠나간
서글픈 마포 종점. 비에 젖은 “갈 곳 없는 밤 전차”, 갈 곳 잃은 내 마음.
천등산 끝자락에서
가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린다
박하 향기 아득한 시간의 터널 지나
푸른 기적 달고 숨 가삐 달려 와서
내 생의 한복판 관통해 간
5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스무 살의 아름다운 기차여!
― 장하빈, 「첫사랑」
‘처음’이란 말보다 ‘첫’이란 말은 어쩐지 떨림의 여운과 강도가 다르다.
‘첫사랑’, ‘첫 입맞춤’, ‘첫눈’ 등 ‘첫’이란 말 속에는 아련하고 가슴 떨리는
추억과 눈물이 거기 있다. 그래서 <첫눈이 오는 날> <내 고향 언덕에 /
눈물로 서 보면> <차마 / 잊지 못할 女人이> (김동원, 「첫눈이 오는 날엔」 中) 아
직도 시간의 눈시울에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첫사랑’, 이 말은 누구에게나 현재형이라기보다는 “박하 향기 아득한”
회상의 어휘이다. 인생이 그러하듯, “푸른 기적 달고 숨 가삐 달려 와서
/ 내 생의 한복판 관통해 간” ‘첫사랑’ 도 순환열차가 아니다. “스무 살의
아름다운 기차”는 한번 떠나가면 다시는 이승의 마지막 역 “천등산 끝자
락”에 닿지 못한다. 그러나 오게 되어 있는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오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줄을, 그래서 한
번 떠나간 첫사랑도 가서는 끝내 오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우리 마음은
또다시 우리도 모르게 어느새 “첫사랑 떠나간 종점” “천등산 끝자락에서
/ 가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시가 있는 가요산책┃ 55
그대와 나 사이를 강이라고 한다
나와 나 사이를 비루함이라고 한다
그대에게 이르는 길을 노래라고 한다
나에게 이르는 길을 눈물이라고 한다
- 이승주
노래는 오감으로 들어야 한다. 귀로는 가사와 가락을 따르며, 눈으로
는 노래의 덩굴이 가슴 안으로 들어와 감기는 것 보며, 입과 코로는 노
래의 맛과 향을 음미한다. 그러면 마음은 절로 선율에 실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흘러간다. 노래에는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마력이 있다.
창밖으로 비가 바람에 날리며 비스듬히 몸을 누인다. 이런 날은 조성
모의 「가시나무」가 어울린다. 방에 불을 끈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있으
면 오감이 눈을 뜨고 깨어난다. 재생을 누른다. 어둔 방안은 이윽고 허
밍과 피아노 단음들에 이어 피아노 반주에 실은 첼로의 선율로 가득 찬
다. 가사의 의미를 음미하기 이전에 촉촉이 젖은 가성기假聲氣의 목소
리와 멜로디가 가사의 내용처럼 먼저 삶의 쓸쓸함과 괴로움, 외로움과
슬픔 같은 것을 불러내어 일깨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5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시가 있는 가요산책 14
조성모
가시나무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안 그런 적이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 나도 언제나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과 그늘,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이 “무
성한 가시나무 숲” 같아 “가시에 찔려” 아파하며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
운 날들이었다.
아들아, 빈 몸뚱이 하나로
단칸집 지키며
나는 일생 못을 박으며 살아왔다.
바람 불어 흔들릴 때
기둥과 문짝에 쿵 쿵
불타는 말로
내가 박은 못.
꿈꾸는 집의 마디마다.
아들아, 해가 지면
꿈들이 아프다.
시가 있는 가요산책┃ 57
기둥과 문짝은 낡아
녹슨 못은 푸른 가시 되고
뼛속까지 아파
내 집은 잠들지 못한다.
붉은 녹물 어혈들.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여.
― 이승주, 「집 1」
내가 언제 이 “푸른 가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인가. “푸른 가시”를 뽑
아낸다면 내 삶은 행복할까. 정말로 마냥 행복하여 내가 나와 타인의 인
생을 사랑하고 껴안을 수 있을까. 이럴 때, 내가 노래 가사 속의 “나”와
같을 때 노래는 상처에 바르는 약이었다. 내 안의 고독과 번민을 불러내
어 관절이 굳은 슬픔을 감싸며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의 약손이고 묘
약이었다.
늦여름의 백일홍이 비를 맞으며 흔들린다. 노래가 빗소리 속으로 스미
고, 바람소리 빗소리가 노래 속으로 녹아들어 아득하고 깊고 고요한 자
리를 이룩한다. 볼륨을 약간만 더 높인다. 두세 번 반복해서 더 듣고, 다
음은 들으면서 따라 부른다. 이때 난 조성모보다 더 노래의 정서에 감정
을 몰입해서 조성모보다 열 배 더 잘 부른다.
5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시가 있는 가요산책┃ 59
시가 있는 가요산책 11
송창식
고래 사냥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모두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다. 우리 청
춘의 날들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꿈마다 “예쁜 고래”를 만났다. 그것은
청춘의 가슴 속에 뚜렷이 숨쉬고 있는 것으로 너무나도 간절했으나 억
압된 염원이었으므로 그때 우리들은 누구나 동해바다로 떠나는 푸른 날
들의 삼등 완행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동해바다야말로 푸른 날들이
한꺼번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과 깨진 사랑을 “신화”처럼 그대로 다시 가
슴 속에 복원시켜주는 공간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꿈속의 그 예쁜 고래
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날이 저물면 우리는 다시 공주식당에 모여
막걸리 잔을 높이 부딪치며 밤새 목청껏 고래를 불러야 했다.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휴가로 친구가 울산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둘
이는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동해의 밤바다를 보기 위해 장생포로 갔다.
썰렁한 방파제 옆 포장마차 몇 채의 불빛이 흐릿했다. 찬 바닷바람에 실
린 파도소리만이 검은 하늘에 닿고 멀리 집어등 불빛 몇 개만이 부표처
럼 시커먼 밤바다에 떠 있었다. 우리는 캄캄하게 한정 없이 깊어진 동해
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고래 고기 수육 몇 점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마침내 한두 방울 빗발이 포장을 때릴 때 이미 우리는 많이 뜨거워져 있
었다. 그날 밤 우리가 나누었던 그 많은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6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그때 내가 그 즉석에서 휘갈겨 써서 그 친구에게 건네준 「장생포에서」란
시를 지금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그때 그 장생포 방파제 옆의 그 포장마차에서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
는다는 것을 / 알면서도” 우리는 밤이 깊어가도록 고래의 신화를 이야기
했던가. 우리 먼저 장생포에 와서 고래를 기다리다 늙은 사람이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
고”, 삶 그 자체가 바로 살아 있는 우리의 바다이고, 우리가 기다리는 고
래야말로 삶의 바다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꿈이라고 말할 때 우리도 포
장마차의 불빛처럼 아득히 서러워졌던가.
시가 있는 가요산책┃ 61
6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산 너머 산 너머
그 집에는
흐리고 비 오는 날의
내 왕년이 거기에 있다.
바람 불고 낙엽 지는 날의
내 왕년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 집으로 간다.
아직도 낡지 않는 깃발이
그대로 펄럭이며 반기는
지금 나는
그 집으로 간다.
초라한 왕년이든
아름답지 않는 왕년이랴.
마음 먼저 산 너머 가는 길
해 돋는 집도 아니고
언덕 위의 집도 아닌
저녁 가슴에 등불이 걸리는
그리운
고래의 집.
― 이승주, 「고래의 집」
내게도 고래는 비록 초라했을지언정 아름다웠던 왕년의 꿈이었으며,
지금도 “저녁 가슴에 등불이 걸리는 / 그리운 / 고래의 집”은 내 꿈이 아
직도 거기 살고 있는 동해바닷가 추억의 집이다.
이승주
1995년《시와시학》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의 식도』 『위대한 표본책』 『내가 세우는 나라』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이 있으며, 시 창작 이론서로 『현대시창작백과』가 있다. 현재 밀양시립도서관·밀양문화원·경남
문학관에서 현대시 창작 지도 강사로 있다.
이태수
정순영
이철희
김형술
이정모
김경수
강문출
전 진
이영옥
신작시
팽나무 있는 풍경 외 1편
포구에 서 있는 팽나무
불콰한 황색 열매들 사이에
희미한 반쪽 낮달이 걸려 있다
고기잡이배들은 만선 꿈을 꾸는지
먼 바다 여기저기 가물거린다
팽나무 익은 열매 같은 얼굴빛의
악동들이 모여들어
깔깔대며 팽나무열매놀이를 한다
팽팽 나는 그 열매들과는 달리
갯바위 아래 붙박인 거룻배 한 척
어느새 낮달도 제 길 가버리고
포구의 팽나무를 바라보는
나만 우두커니 서 있다
6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이 태 수 ㅣ
그이는 오늘도
그이는 오늘도 시를 쓴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눈여겨보아 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밥과 빵과 명예가 되지 않을지라도
쓰다가 지우다 다시 쓴다
즐겁고 기뻐도 그러지만
괴로우나 외로우면 더 그런다
띄울 곳이 막막한 편지를 쓰듯이,
빈 메아리로 돌아오기만 할지라도
오늘도 그이는 시를 쓴다
누가 좋아하든 않든, 뭐라 하든
그이는 오늘도 한갓
말을 불러 그러안는 길을 간다
(나도 그 길을 따라 나선다)
이태수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가 나에게』, 『거울이 나를 본다』, 『따뜻
한 적막』, 『침묵의 결』, 『침묵의 푸른 이랑』, 『회화나무 그늘』,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내 마음의 풍란』, 『그의 집은 둥글다』 등 15권과 시선집 『먼 불빛』, 육필시집 『유등 연
지』, 시론집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 『여성시의 표정』, 『성찰과 동경』, 『응시와 관조』 등
이 있다. 대구시문화상, 동서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작시┃ 65
가시 외 1편
나잇값 한답시고
이 옷 저 옷 다 벗어던지고
삼베적삼 걸치고 산에 들어서
주렴을 내려놓고
한적하게 풍요로운 여유를 즐기는데
주렴 살 사이에 내비치는 파란 하늘의 햇살이
너무 고와
깊은 산속 옹달샘에 이는 잔 여울처럼
욕망의 가시가 돋네.
주렴을 거둘까
아니, 돌아앉아 속 깊은 산 계곡의 속내나 들여다볼까.
6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정 순 영 ㅣ
고향집에 가면
고향집에 가면 이른 아침 여명처럼
어머니보다 십년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와 댓돌마루에 잠시 앉았다가
빈 마당으로 나서신다.
밤하늘에 유난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는 아버지는
달이 되어 고향동네 돌담길을 밝히는 어머니 곁에 떠 계신다.
고향집 대청마루 사랑방 문기둥에는
회초리가 걸려 있고
길나서는 댓돌위엔 흰 고무신 한 짝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황혼을 짊어지고 고향집에 가면
사립문에 눈을 두신 어머니가
밤마다 달빛 정성으로 장독대를 닦아
연붉은 석류꽃 해맑게 피고
차를 끓이는 추억이 집안에 그윽하다.
정순영
경남 하동 출생으로 1974년 《풀과 별》로 추천 등단했다. 동명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
며. 세종대 석좌교수로 있다. 여산문학상, 한국시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는 『조선의 징소리』, 『잡은 손을 놓으며』 외 여러 권이 있다.
신작시┃ 67
엽글 3 외 1편
어둠 속에 가만히 불러본다 보이지 않는다
저만치 휙 지나가는 차량불빛 목소리는 그 넓이 만큼이다
엽글 10
녹기 위해 내리는 눈 같은 그대
바람에 쓸리기 위해 떨어진 은행잎 같은 사랑
어디쯤 힘들게 교차할까
엽글 14
보이지 않는 건 마음으로 보지 못하는 거다
말하지 못하는 것은 가슴으로 나누지 못하는 거다
허공에 하염없이 손짓만 하는 건 눈물이 다 말라버린 거다
엽글 21
이별연습을 많이 한 것 같아서 더 이상 슬픔이 잠복하지 않기를
몇 번이고 다짐하고 앙다물었건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터져 나오
는 울음
이 싱싱한 봄날 속절없이 빈손으로 훌훌 내던지고 결연히 떠난 그
6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이 철 희 ㅣ
대, 덧없네!
엽글 29
늦게 피거나 홀로 피거나 바위틈에 숨어서 있어도 꽃은 지 때에 맞
춰 핀다
따뜻하게 맞잡은 두 손에 온기만 남아 있으면 그 사랑은 조용히 다
가온다
엽글 37
흘러가는 건 물만 아니다 흘러가는 것은 시간만 아니다
아픈 건 눈물이 나서 아픈 것이 아니다 그저 시든 꽃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더 아프다
신작시┃ 69
봉산 후일담
- 소설가 K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방울소리가 명사산 모래를 깨운다
화염산의 불길이 혀를 내밀며 태울 듯이 울부짓는다
파초선아 파초선아 미친 듯이 부쳐도 부쳐도 꺼지지 않는 심연
우수수 떨어지는 별들의 무덤 달 하나가 월아천에 빠졌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달아나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진 ‘서블 발기 다래1)’ 고향
떠돌이 병이 깊어 이미 골수에 가득 찼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망망사해 유해로 목표를 삼는2)’ 서역길
어디를 둘러봐도 악귀의 소리가 귀를 후벼 파는데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붙잡고 천불동 미륵불에 백팔 배를 하고 또 해
보건만
자꾸만 비워져가는 허허로움 그저 모래를 건너오는 바람 바람뿐
뭔가 채워보려고 캔퍼스에 색색 물감을 칠해
한껏 그렸지만 파란 목도리를 맨 얼굴 하나가 너무 낯설어
꺼억꺼억 입안에 터져 나온 울음이 돈황의 밤을 찟어놓는다
호선무 추던 호녀는 이제 막고굴 벽화 속 갇혀 있고
낙타 위에 재주 부리던 호인은 시간의 뒤안길에 사라졌지만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이 이방의 대지에서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올
결코 오지 않을 마지막 사랑을 기다린다
1) 향가 ‘처용가’ 중에. 2) 법현 ‘대당서역기’ 중에
시인 겸 소설가로 필명을 날린 소설가 M은 지금 돈황에서 그림을 그리며 있다
7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봉산 후일담
- 소설가 K
술이 깨는 아침은 울고 싶었던 날이 있었네 그래서 슬픔에 겨워 또
한잔 걸치고
그러다 친구가 군에 입대한다고 ‘입영전야’ 부르며 소리 내어 껴안고
마시고
풀잎 같은 여자와 헤어져 글라스에 소주잔을 들이키곤 하다가
시인은 술 고픈 인생이어야 한다고 또 염매시장에 정구지전에 막걸
리로
취하다 그러다 가짜 대학생 노릇 한 친구 대명동 자취방에서 아침을
맞이한
아! 우울하고 우중충한 회색시대여
그댄 시퍼런 언어의 칼날로 문학의 속살을 헤집고 피가 뚝뚝 떨어지

말들의 향연을 맛나게 먹어치우는 이야기꾼 재능 보여줘 놀라게 하
곤 했지
술은 또 얼마나 맛나게 먹었던지 화제는 늘 샘솟듯 솟아 맛깔난 대
화로
얼마나 재미있게 했던지 아직도 기억의 그때가 생생히 남아 있네
시간은 우릴 기다리지 않고 혼자 돌고 돌아 저만치 가버려
머리숱은 듬성듬성 마른 국화처럼 시들고 열기와 광기 내품던 눈은
깊숙이 가라앉아
신작시┃ 71
한층 짙어져 갔건만 그런데 그 술이 그 맛나게 먹던 향기로운 첫 키
스 같았던 술이
그대의 감수성을 갉아먹어 그대 선홍색 언어의 별들을 흐리게 해 잠
시 다른 별로 도망갔지
바다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바다의 으르렁이
말과 글이 뱉어놓은 무늬처럼 그립다 한 그대여
이제 포항 앞바다에 떠오르는 별이 되어
그만 그리워하지 말고 치열한 방파제로 늠름히 지켜주게나
탁월한 이야기꾼인 시인이며 소설가인 K은 포항 오천에서 요양 중이다.
이철희
197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학에 발을 들이 밀었다. 그러나 문학을
배신하고 광고계에 입문, 광고회사에 근무하며 문학과 담을 쌓고 살다 43년 만에 문학
풍류에 다시 작품을 발표하였다.
7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사진
에러
신작시┃ 73
ㅣ김 형 술 ㅣ
노래꾼 외 1편
거위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겨울저녁은 들일 나간 부모보다 늘 한
발 앞질러 온다. 암소는 외양간에, 염소는 헛간 처마 밑에. 허술한 저
녁을 뜨자마자 칼바람 흐르는 골목길을 숨차게 달려왔지만 느티나무
집 아랫 채 댓돌 위엔 벌써 검은 고무신 가득 흩어져 있고 호롱불 매캐
한 연기 방안에 가득 차 있고,
느티나무 마른 가지에 걸린 어린별들 후드득 몸을 떨 때 느티나무집
누이의 이야기는 벌써 마을을 떠났다. 뒷산 저수지의 천년 묵은 이무
기 여전히 장화홍련의 치마폭을 노리고 황금봉황은 선녀들 거느려 구
름 헤치고 마을로 내려온다. 엉덩이 뿔난 아이들을 노리는 눈썹 흰 늙
은 호랑이, 구미호 아홉 꼬리엔 여의봉이 달렸는데
붉은 눈, 붉은 눈. 집채만 한 능구렁이의 원한으로 피맺힌 눈. 솔 장
작 지핀 구들장은 솜이불을 태워도 동네 아이들 검푸른 눈 화등잔만해
져서 온몸이 사시나무다. 바지춤에 오줌을 지린다. 천지를 뒤흔드는 인
당수의 폭풍, 거울 속에서 뛰쳐나오는 전우치의 소매자락. 월하의 공
동묘지에 안개 여즉 자욱하고 춘향 끝내 이몽룡의 가슴팍에 안길 때쯤
거두절미, 누이는 두 손을 쑥 내민다. 이야기 값을 내놓아라. 세상
공짜는 아이들 머리카락을 뺏는단다. 눈깔사탕 반 알어치 동전도 없는
아이들 손바닥 빨개지도록 박수를 친다. 추녀 속 잠든 참새들 포르르
불러내고 굴뚝 속의 굴뚝새 잠꼬대를 흔들며 쏟아지는 천진한 박수소
리 장단삼아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에 찬 자리, 임방울이며 김초향, 옥중
가며 심청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월만정秋月滿庭의 이화중선, 굴리
다가 흘러내리는 목, 끌어올리다 내던지는 목, 끊는 목, 감는 목, 다루
치는 목, 폭깍질 목. 세상 모든 노래를 다 아는 누이의 목청이 온 마을
을 깨울 때 쯤 어김없이 방문을 후려치는 노 할매 노한 목소리. 휘휘
굽은 박달지팡이
요망한 년, 잔망스런 년, 전생에 무슨 죄 많은 짐승이었기에 저리 많
은 신명과 눈물 저 작은 몸뗑이에 담았단 말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앞
도 못 보는 저런 물건을......
박수도 없이 황급히 노래는 끝났다. 찬 별빛 와르르 댓돌 위로 쏟아
져 내리고 골목마다 버석버석 살얼음 꽃 피었다. 삼삼오오 흩어지는
아이들과 헤어져 돌담길을 돌고 고샅길 접어들어도 여전히 그림자를
밟는 노래 소리. *무덤 근처 선 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으란 말, 어깨를 짚는 누이의 청맹, 가슴
에 서걱이는 서늘한 귀곡성.
7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나는 비행기다
비행기다
동가숙 서가식 늘 떠났다가
자석에 끌린 듯 다시 돌아와야 하는
나는 슬픈 비행기다
떠날 때도 큰 소리로 울고
돌아올 때도 목 놓아 울어야한다
찢겨진 날개로나마 천리만리
바람을 읽고 비바람과 싸우고
새들의 적, 구름의 벗으로 날아올랐다
허망하게 다시 지상으로 귀환하지만
나는 흉기다 나는 위험하다
단 한번의 공중폭파로 흔적 없는 재가 되어
구름 위에 묘비명을 새기거나
느닷없는 불시착으로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나는 비행기다
남극의 오로라, 인도양의 쓰나미
칼라하리 사막의 모래폭풍을 꿈꾸며
신작시┃ 75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춤을 추듯 가볍게
날마다 인간의 마을을 떠났다가
아무 그리움도 세상 끝엔 없더라
뻔뻔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우울한 후회의 하루를 못견딘 채
다시 날고 싶어 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벌렁거리는
나는 구름의 사생아 바람의 쌍생아
가벼우면서 무겁고
너무 무거워서 마침내 가벼워지는
후안무치, 이상한 날것.
김형술
1992년 《현대문학》 등단했다. 시집으로 『타르초, 터르초』 외 여러 권이 있으며, 산문집
으로 『영화 속의 詩』 등 다수가 있다.
7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들꽃, 거기 외 1편
수레가 덜컹거리며 마음을 지나간다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보이는 손
어린 시절이 향수병 뚜껑을 열려나보다
실려가는 사람들 모두가 삼촌이고 고모다
이름은 몰라도 되고 인사는 웃으면 되니
햇볕 등에 태우고 꽃등 타는 나비도 기억이 불러온 바퀴다
누군가를 풀어놓고 또 쫓아가던 나는 지금도 술레
함부로 아름다운 너는 만지면 흩어질 것 같아
밥 먹고 사는 일에 골똘한 손 하나를 그냥 둔다
이 식탁은 몰라도 좋을 기억을 차려내고 있군
우리는 늘 잊어버린만큼 그 만큼만 사랑해서
이별을 증명 하는 일은 밥처럼 질리지도 않는다
그래, 이런 손길도 있어야 생이라 하겠지만
마음에는 버려두면 쌓이는, 먼지가 먼저 아는 책이 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그 퀴퀴한 책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신작시┃ 77
ㅣ이 정 모 ㅣ
그냥 서재에 있어도 좋은 한 페이지가 환상통으로 운다
저 소리를, 저 깊고 아픈 소리를
나는 감히 나비의 비행이라 부를 수 없어
수레에서 내려 내 삶이나 챙겨서 간다
고향 같은 건 몰라도 마음, 그것은 기억의 도서관 같은 것
나는 향수를 누릴 권리를 반출한다
그래, 오늘은 오늘을 위로할 책을 펼치고
들꽃 낭자한 들판을 늘어놓는 손길을 받으며
나는 거기 오래 앉아 사랑을 읽을 것이다
7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신작시┃ 79
희망
여태 보지 못한 얼굴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시름이다
하늘이 본적이지만
주소는 지상이다
붉은 우체통처럼 속이 아궁이다
그래서 들어오는 것은 모두 다 살운다
불꽃처럼 타오르다 끝내 사라질 것이다
다 타고나면 지상에 재로 버려져
본적으로 돌아가려고 풀석일 것이다
이정모
2007년 《심상》 등단. 시집 『기억의 귀』, 외. 제1회 심상시인상 수상.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외 1편
1928년 미국 캔자스주 어느 마을 10대 여고생 디니와 10대 남고생
버드가 서로 사랑을 한다. 디니는 결혼 전 순결을 지키라는 엄마의 충
고를 성실히 따랐고 디니를 사랑했으나 욕망의 유혹을 이지기 못한 버
드는 디니와 같은 반 여학생 주아니타의 유혹에 넘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고 우울했던 디니에게 어느 날 학교
수업시간에 여선생님이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을 소리 내어
읽어라고 한다. 여기 적힌 이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이 희미해진다면 이 먹빛이 마름하는 날 나는 비로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시간이 돌아오
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러워 말 지어다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빛날 때 그대 영광 빛을 얻으소서. 선생님이
초원의 빛과 꽃의 영광의 뜻을 묻자 디니는 짧게 대답하고 울면서 교
실 밖으로 뛰어나가다 정신을 잃는다. 집에서 요양하며 버드에게 순결
을 주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몇날 며칠을 울고 지내던 디니는 얼
마 후 고등학생 댄스파티에 참석한다. 모두들 오래간만에 온 그녀를
반기지만 디니는 버드를 찾아 바쁘게 움직인다. 디니는 버드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순결을 가지라고 한
다. 디니를 아끼고 디니의 순결을 소중히 여기던 버드가 이를 거부하
자 디니는 울부짖으며 차 밖으로 뛰어나가고 인근의 폭포가 있는 강으
로 뛰어든다. 사람들이 그를 구하지만 디니는 실성失性한다. 죄책감과
사랑으로 버드는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지만 결혼보다는 명문대학에
우선 입학해야 된다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접는다. 신경쇠약
8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김 경 수 ㅣ
에 빠진 디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버드는 원치 않는 명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 보다는 놀음에 빠지다 결국 퇴학을 당한다. 디니는
정신과 병원에서 분노 장애를 겪는 의대생 환자 찰스와 친하게 지내다
새로운 사랑의 감정에 눈뜨게 된다. 2년 반 동안 입원 치료 후 마음의
상처가 나은 디니가 퇴원하기 전 이미 오래전에 퇴원하여 이제 의사가
된 찰스로부터 청혼을 받고 한 달 뒤에 결혼을 약속한다. 퇴원 후 고향
집으로 온 디니는 첫사랑으로 가슴 떨리던 추억에 잠겨 혹시 아직도
버드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의사 찰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결혼을 해
야겠다는 들뜬 마음으로 버드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이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버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하고 싶었던 농장 일을
하고 있었지만 방황하던 대학생 시절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이태
리 여자와 이미 결혼해 있었다. 실망감과 놀라움의 표정을 감추고 디
니는 버드에게 “행복해?” 라고 묻는다. 버드와 작별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여자 친구들이 디니에게 “아직도 그를 사랑하니?” 라고 묻는
다. 디니는 말없이 아쉽고 쓸쓸한 표정만 짓는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러워 말지어
다.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영화가 끝나고 디니를
대신해서 관객들이 엉엉 운다. 영화관이 눈물바다가 되어 관객들이 눈
물바다 속에 빠져서도 계속 운다. 첫사랑 순수한 감정을 잊지 못하는
가여운 디니. 일생에 한 번 뿐인 청춘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사람
들의 가슴을 예리하게 베는 디니의 쓸쓸한 미소가 노란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진정한 첫사랑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고 연인
들은 상처를 쓰다듬으며 상처를 잊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 간직한 채 세상을 뜬다.
초원의 빛: 미국 여배우 나탈리 우드 Natalie Wood가 주연했던 엘리아 카잔 Elia Kazan 감독 영화, 1961년
개봉작
신작시┃ 81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 안의
빨간 나무 지붕이 있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극중의 한 기혼 중년 여인과 한 중년 독신 남자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네.
그리고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헤어졌다네.
불륜의 사랑이었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생生의 첫 번째 진정한 사랑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
네.
일생 중에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 남자는 늙어 죽기 전에 그 여인에게
일생 중에 진정한 첫 사랑이었노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품에 고이 안던, 이젠 백발이 성성해진 그 여인도
죽고 나서야 남겨둔 편지로 자녀들에게 고백했다네.
아름다운 불륜을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진실한 사랑을 위해
죽기 전까지 가슴 깊숙이에 간직하고만 살았던 그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내가 서 있네.
일생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을 위해
우리 사랑을 방해하던 검은 운명과 대결하러 가네.
하지만 거대한 힘의 운명에 형편없이 매만 맞고서
8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내 사랑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헤어지고
함께한 시간들만 추억하며 한없이 쪼그라드네.
그런 사랑은 끄기 위해 켜둔 촛불
밝지만 서러운 그 빛 안에서 피었다 지는 수선화였네.
사랑했던 마음들이 땅으로 추락한 여름 과육처럼 멍이 드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일생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기 위해 서 있네.
그러나 단지 나무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 때문에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아프고 그 남자와 여자가 아프고
내가 아프고 내 애인이 아프고
그 사랑이 범인이고 세월이 공범이고 삶이 방관자였네.
영화 안에서나 영화 밖의 세계 속에서도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나와 내 애인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숨겨진 투명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네.
그러나 나는 아직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가 본적이 없네.
김경수
1993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 『다른 시각에서 보
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달리의 추억』,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편지와
물고기』가 있으며 문학ㆍ문예사조 이론서 『알기 쉬운 문예사조와 현대시』가 있다. 현
재 계간 《시와 사상》 발행인이다.
신작시┃ 83
언젠가 외 1편
늦도록 함께 했으나
더 이상 자리를 좁히지는 못했다
너는 등불
나는 등잔 밑 그림자로 앉아
너는 나를 가까이 앉혀두었으나
거기까지, 가장 먼 거리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명암이나 온기가
사랑의 척도라 느껴질 때 나는 일어서야 했으나
등불이 환해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언젠가 알 것이다
등잔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
등불도 사라진다는 것을
제 몸을 태우는 빛보다
그 빛을 떠받드는 그림자가 더 아프다는 것을
8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강 문 출 ㅣ
신작시┃ 85
아직은
내 생각의 방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다 그 중 오래된 하나를 정리
하다 검붉은 장미 한 송이를 보았다 모든 꽃들이 그
꽃을 중심으로 꽃병에 꽂혀있었다 생각의 감옥인 그곳에서는 모든
풍경이 간수의 뜻대로 늙어갔다
저 정물화를 걸기 위해 스스로 내 가슴에다 대못을 박았다니!
꽂을 수 없는 꽃을 꽃병에 꽂아놓고 오랫동안 바라본다는 건 슬픈 일
이지만 꽃병의 꽃이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더 슬프다
젖은 휴지를 돌돌 말아 못 자국을 감추는 내 수법을 벽은 어떻게 이
해할까 서랍 속의 꽃병과 그 속에서 장미를 꺼내보는 이런 철없는 생
각이나 하는 이가
아직은 나라는 게 나는 좋다
강문출
2011년 『시사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부산시울림낭송회 회장으로 있다. 시집으
로는 『타래가 놀고 있다』, 『낮은 무게중심의 말』이 있다.
성산포에서 외 1편
왜 그런지를 모르겠다
성산 포구로 가는 사람들마다
갯바위에 걸친 달빛을
억지로 바다에 끌어내리고 있다는 거
참 웃기게도
일출봉 꼭대기에서 밤하늘을 보며
컹컹대는 늑대 한 마리를
아무도 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나는 취했고
바다는 나보다도 더 취했고
여자가 바다에 빠졌고
나는 바다를 건져 올렸고
술이 좋은지
여자가 좋은지
반쯤 남은 소주병도 파도 소리에 취했고
빈 포구에는
밤마다 그리운 사람들이 바다로 빠지고 있었다
8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ㅣ전 진 ㅣ
장천 뻐꾹제
뻐꾸기 니는 뭐할라꼬 자꾸 울어샀노
오월의 마지막 날
봄날은 가고
장천 교회당 옆집 마당을 기웃거리는
할 일 없는 뻐꾸기
뭐할라꼬 왔노
닭장 속에서 꼬꼬대는 암탉이
병아리 한번 쳐다보고
물 한 모금 먹고
뻐꾸기 니는 뭐할라꼬 왔노
간혹 우리는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바람 소린지
울음소린지
삼겹살 지글거리는 소리가 술병을 두드린다
고해산방을 뒹굴던 사내들이
바람난 색소폰의 사랑타령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고
누구는 기침을 토吐하다가 목이 아파 울었고
누구는 술독을 빠져 가쁜 숨을 쉬면서도
안주를 찾았다
신작시┃ 87
연사가 된 털보 소설가의 무용담에
문둥아 문둥아
휘파람 소리도 들린다
두더지 굴속을 뒤집으면서
불쑥불쑥 소주잔 속으로 빠져드는
그대 먼 곳에 있는가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뻐꾸기 니는 뭐할라고 자꾸 울어샀노
설리설리 가는 봄
전 진
본명 전진식.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2018년 《문학시선》으로 등단했다. 해인건축사 대
표로 있다.
8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언밸런스 외 1편
단추는 당신이 가장 겸손해 진 저녁의 높이로 풀고
구두는 한 칸 더 아래 매달고
생각을 조금씩 떼어 군데군데 놓아두면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돌아와야 하니까요
흔들흔들
걸음과 춤이 동의어란 걸 보여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신비한 만화경에 살게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준비되지 않았던 시간들이 몸을 일으키고
털실 뭉치는 헨델과 그레텔을 찾으러 굴러가요
빨간 사과를 혀끝에 올린 뱀이 고양이를 유혹해요
여기에서는 길고양이를 길들일 생각은 금물입니다
길은 고양이가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고양이의 도도함을 지켜주죠
낭만 고양이는 아무 고양이 하고는 다르죠
나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모든 것
하루가 밤이면 엿새 동안 낮을 켜둘 수 있죠
당신의 숨 막히는 어둠속에서
나의 아름다운 대낮이 보일리가 있나요
나를 찾지 마세요
원래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요
조금 희한하고 삐딱하게
신작시┃ 89
ㅣ이 영 옥 ㅣ
중국식당에서
빙글 빙글 돌아가는 원탁사장부터 어린?계약직까지?함께 앉아있다
기름진 음식이 나오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중국술이 나오고다들 술이
과해지고
술이 데려온 간 큰 사람이 가끔 나타나는 시간
평소에는 말도 없이 고분고분하던 말단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부장을 향해
“야? 이 씨발놈아!”
“너?왜 그래? 술 됐냐?”
모서리 없는 원탁 위에?던진 모서리?
객기는 식탁 위 음식 찌꺼기처럼 버려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탁은 돌아간다수직은 원을 이길 수 없다
자정이 말단직원의 취기를 헤치며 오고 있다
둥근 것이 깨져 틈을 보여 줄 때
숨 한번 크게 들이킬 수 있다는 것을빙빙 잘도 돌아가는 원탁은 알
리가 없다
이영옥
경북 경주 출생이며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었으며 시집으로 『사라진
입들』과 『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가 있다.
9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작가노트●
어느 소설가의 초상



어느 소설가는 K다. 이름을 밝힐 수도 있지만 그냥 이니셜 K라고
하기로 했다. K를 안지 40년이 된다. 그를 못 본지는 36년이나 된
다. 다시 말해 K를 대학 때 보고 못 봤다는 말이다. 그는 내가 대학
일학년 때 ‘천마 문학상’에 120매짜리 단편소설 ‘코스모스’를 응모했
을 때 심사를 했다. 물론 그도 학생이다. 겨우 나보다 한 살 많은.
뭘 썼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필시, 짝사랑에 관한 얘기였을 것
이다. 그즈음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게 짝사랑이었으므로. 쓰지 않
으면 미칠 것 같았으니 썼을 것이다. 그렇게 토해내곤 한동안 잊고
지냈다. ‘유쾌한 배설물’을 오래 기억하지는 않는다. 대개 글쟁이들
은.
어느 늦은 가을이었다. 실기실 앞 잔디가 누렇게 변해 있었고, 남
학생들이 따스한 양지에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던 계
절이었다. 밖에 누가 찾아왔다고 했다. 나를? 누가 날 찾아온단 말
인가. 실기실 밖에는 전혀 안면이 없는 남학생 두 명이 서 있었다.
K와 H였다. 기억이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혹은
스스로 재구성해서 기억하므로 혹여 사실과 다르더라도 어쩔 수 없
다. 특히 나 같은 소설가들이 그러하다. 내 기억에 K는 연극하는 H
와 같이 나를 찾아왔다.
K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H는 K보다 조금 더 왜소하고 작
았다. K는 우뚝한 코에 눈까지 내려오는 ‘테리우스’ 머리를 하고 있
었다. 눈은 삽화 속의 눈처럼 정지된 눈빛이었다. 어딘가를 응시하
고 있는 눈빛인데 굳이 돌아보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코스모스’라는 단편소설을 잘 읽었다고 했다. 물론 천마문
9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학상에 당선되지는 않았다. 미대생이 소설을 써서 너무 궁금해서 찾
아왔다고 했다. 곧바로 막걸리를 마시러 갔던가. 그랬을 것이다. 커
피 마실 돈이면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
얼굴은 제법 살도 있고 턱도 로마제국 장군 ‘아그리파’처럼 튼실하
게 생겼다. 그러나 몸은 형편없이 말라있었고, 손가락은 가늘고 하
얬다. 저 손으로 노동은 못하겠구나 싶었다. K는 철학과에 다닌다
고 했다. 나중에는 국문과로 전과해서 졸업한 걸로 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술꾼들이 많았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혹은 연극을 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었다. 어쩐지 퇴폐적이고, 염세적이고, 종말론 자들이고, 말세주의
자들이고, 세상과 불화하는 자들이고, 상처받은 자들이며, 영원히
표류하는 섬 같은 자들이며 그리고 그들은 가난했다. 안주는 파전
하나 시켜놓고 막걸리는 몇 주전자 째 마시는지 모른다. 아무도 안
주를 덥석덥석 집어먹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K가 술 이외에 음식을
먹는 걸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담배연기와 술만 먹었다.
그러나 분명 나는 그런 그들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가
령 도덕주의자들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떠돌이들의 비애 같은 거
말이다. 가는 곳마다 슬픔만이 그들의 잔을 채우고, 그 슬픔을 마시
고 한 순간 반짝이다 스러지는 이슬 같은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
는, 상처 받은 자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11시 반에는 일어나
서 택시를 타야 했다. 술값을 참 많이도 내 준거 같다. 그냥 자연스
러웠다. 난 언제나 돈이 있었고 그들은 언제나 돈이 없었다. 차비까
지 챙겨주고는 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삶과 문
작가노트┃ 93
학과 사랑과 철학과 예술과 인생과 노래와 연극에 관해 얘기했을 것
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신동에 있는데 차비가 없어 대구 집으로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칠곡군에 있는 신동은 완행열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면이었다. 나는 아버지 카메라 캐논을 어깨에 걸치고, 흰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흩날리며 동대구역에서 신동 가
는 완행열차를 탔다. 여름이었다. 들판은 한창 자라는 벼들로 푸르
렀다. 어쩜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행열차를 타 본 것 같다.
이미 새마을호 열차가 있던 시절이었다.
신동역에는 K와 연극하는 H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의 양손에
는 ‘환희’ 담배 껍질을 나무젓가락에 붙여 만든 환영 깃발이 들려 있
었다. 그들은 ‘환희’를 흔들며 나를 환영했다. 만원만 있으면 통닭
한 마리에 막걸리 여러 병을 먹을 수 있었다. 신동의 어느 정자에서
통닭과 막걸리를 사와 실컷 먹고 마셨다. 그러고도 대구 갈 기차표
값이 해결되었다. 그들은 나를 ‘구세주’라고 했다.
신동면은 서너 명의 술꾼 중에 누군가의 고향이었다. 고향인 친구
가 신동면에 왔다고 못인지 저수지인지 모를 물을 구경시켜 주었다.
물은 언덕을 올라가야 있었다. K는 나를 언덕에 앉아 있게 하고 내
가 가져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멀리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살짝 역광이었고 바람이 불어 내 긴 머리칼
이 흩날리는 모습이었다. 한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그 흑백사진을
참 좋아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직도 대구 집 어느
앨범에서 누렇게 변색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9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30년 전 쯤 K가 현대문학에 근무할 때, 말죽거리 어디에서 만나
기로 했는데 어긋나서 못 만났다. 그와의 통화는 그게 다였다. 그
통화도 그가 나를 찾아내어 전화를 한 거였다. 나는 그 때 이미 중
앙문단에 등단을 했었고, 그는 나보다 삼 년 후 현대문학으로 등단
했다.
K에 대해 아는 건 그게 다였다. 그에 대한 기억이란 늘 술에 취해
있었고, 늘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 남아 있
다. 가끔 어떤 얘기를 심각하게 하다가 히죽 웃곤 했다. 마치 이 세
상 모든 일이 한갓 허망한 꿈인데 우리가 이렇게 찧고 까불고 광분
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K는 내가 가고자하는 세계에, 내가 그리
워하는 세계에 이미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 페이스 북을 하게 되었다. 페이스 북은 외로운 사
람들이 찾아낸 천국이다. 사람마다 페이스 북을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말이다. 내 눈에는 그랬다.
- 난 페이스 북 안 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외롭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 밤 홀로
깨어 있을 때도 페이스북 친구들 중 누군가는 깨어 있다. 그들은 긴
글 혹은 짧은 글로 ‘모르스부호’를 허공에 날리듯 문장을 찍어 날린
다. 나, 여기 살이 있어!, 하고.
온 라인 세계에 갇혀, 아니 이 망망한 우주 속에 갇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누군가에게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긴 글이나 짧은 문장으로. 혹은 ‘좋아요’로 응답한다.
나는 페이스 북을 한다. 고로 존재한다.
작가노트┃ 95
그러다 어느 날 K가 나타났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튀어나오
듯 나타났다. K가 페북을 시작한 5월 하순이었다.
- 영희씨 오랜만... 어떻게 이곳은 세월이 거꾸로 가는지 발랄한
꽃향기 정말 좋네요.
세상에 K가 살아 있었다. 그즈음 내 페북에는 난꽃이 만발한 사
진을 몇 점 올렸었다.
- 참 나, 도대체 뭡니까? 어느 돌 밑에 숨어 있다 나타난 겁니까?
살아는 있었군요.
- 나는 좀 긴 꿈을 꾸고 깨었다 싶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이
젠 좀 다르게 부지런히 살아보려고...
36년 만에 주고받은 대화다. 이번에도 그가 나를 찾아냈다. 나는
K에 대해 몇 컷의 이미지로만 기억할 뿐,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
도 없었다. 페북에 올라오는 글들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손톱만큼
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K는 은근히 ‘스토커’처럼 내 소설책들을 챙
겨보고 있다고 했다. 무섭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중학교 일학년 때 K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의 눈에 비친 짧
았던 아버지의 삶은 ‘바람이요 구름’이었다. 늘 어디론가 떠돌아다
녔고, 언제나 떠나갈 채비를 하는 손님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전
쟁 중에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K의 아버지는 얼마 전 국방부에서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의 대상자가 되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
다.
난 그 글을 읽으며 그 무공훈장이 아버지의 부재로 자란 K의 청
소년기와 맞바꾼 대가구나 싶었다. K의 아버지는 이기와 탐욕과 투
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롭게 자란 K는 고
등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다고 했다. 8월 15일 새벽 3시 22분에 올
9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린 그의 시 한편이 K를 아는데 도움이 되었다.
장마가 시작되면
입원하셔야죠
의사는 내 병상을
비워 두겠단다
술 끊었다니까요
나는 쓸쓸하게 웃는다
- 강석하의 시 ‘아직도 비가 내리면’ 중에서
K는 15년 전 급성 알코올중독 발작으로 입원했다. 대부분 환자들
이 겪는 섬망증과 함께 수시로 죽은 이들이 말을 걸고 그의 방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그는 자의로 병원에 입원을 했
다. 그는 폐쇄병동에서 수감자처럼 생활했다. 입원과 퇴원을 세 번
이나 반복했단다. 그러나 지금은 13년 째 단주 중이라고 시 아래 긴
주석을 달았다. 좋아요 254개. 댓글139개.
- 강석하씨! 이렇게 부르고나니 더욱 아득하네요. 그대를 만난 지
도 40년. 아득한 세월이군요. 못 본지는 36년. 어느 돌 밑에 숨었다
나왔냐고 했더니, 잠시 긴 꿈을 꾸고 나왔다고 했던가요? ‘매트릭
스’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걸 환영합니다.
나도 댓글을 달았다.
- 글쎄요... 후유증이 너무 커서 아직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할 수
는 없겠습니다. 내가 영희씨 앞에 모습 보인다면 그때는 그리 생각
해도 될 테지요.
K의 답글이다.
작가노트┃ 97
- 아, 만나고 싶네요. 그날을 기다려 볼게요.
내가 댓글을 남겼다.
K에 대해 다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매일 한 편씩의 시詩를
올렸다. 그동안의 시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내는 오래전에 떠
나갔고, 노모와 단 둘이 살며, 미국에 이쁜 손녀가 있었다. 무엇보
다 그의 외로움이 시 전편에 깔려 있어 매일 매일 올리는 시가 절창
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아득하여 가슴이 아리다. 그냥 시가
너무 좋다, 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바람에도 베일 듯이 여
린 영혼의 소유자를 마주하면, 너무 더럽혀진 듯한 내 영혼이 보여
울고 싶어진다.
예술가는 고독해질 권리가 있다. 그나마 의무가 아니니 다행 아닌
가. ‘작가는 영원히 자신의 섬에 유배당한 자’, 이다. 그 말이 K에게
만큼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건강이 안 좋아 페북
을 쉬라고 의사가 처방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러다 얼마 안지나 K는
다시 매일 시 한 편씩을 올렸다.
- 이렇게 문장 주고받으며 이 행성을 잘 지나갑시다. 아프지 말
기.
K가 페북을 다시 시작했을 때 올린 내 댓글이다.
외로우니 참 좋다
찾아갈 이도
찾아올 이도 없이
내 그림자 벗 삼아
9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묵묵히 선문답 주고받는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하품
산수화의 여백 같은 삶이다
- 강석하의 시 ‘행복’ 전문
그의 시를 보는 즐거움과 동시에 촛불처럼 그의 생이 조금씩 타들
어가고 있는듯해, 나는 한동안 그의 시를 읽지 못했다. 어쩜 이 생
에서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갈 지도 모른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두 행성처럼 말이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이가 들었을지 궁금하
지 않다. 그의 시가, 그의 소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언젠가 페북에서, 영희씨에게 술빚이 많은데 언제 갚을지 모르겠
다고 하길래, 술은 영원히 내가 살테니 아프지만 마시라고 댓글을
남겼다. 나는 그 때만 해도 그가 몹시 아픈 줄 알았다. 아, 나야 말
로 말빚을 지고 말았다. 술은 ‘평생’ 내가 살게요, 라고 했어야 하는
데. 술은 ‘영원히’ 내가 살게요, 라고 한 것이다.
K와의 환생주기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백년 혹은 천년 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술을 사야한다. 어쩜 이미 알 수 없는 생에서, 내가
K에게 한 말빚을 이 생生에서 조금 갚은 건지도 모른다.
K는 피안을 그리워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피안의
세계에 들앉아 있는 것 같다. 혹은 적어도 지금, 여기는 아닌 어떤
공간에 말이다.
이십대 초반, 청춘의 푸른 꿈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꾸었던
작가노트┃ 99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에 K는 귀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건필하길 신神에게 빌어본다.
당신의 청춘에도 이런 귀한 사람이 있나요?
정영희
《시문학》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生」을 발표하고, 1986년 중편소설 「무무당의 새」로 『동서문학』 신
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왔다. 그 동안 장편소설로 『그리운 것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무소새의 눈
물』, 『슬픈 잠』, 『아프로디테의 숲』, 『아키코』 등과 소설집 『그리운 눈 나라』, 『낮술』 등을 출간했다. 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현재 [영희역학연구원]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다.
10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단편
소설
브로드웨이에서 ‘시카고’ 보다
김서련
스토커의 문법
안지숙
브로드웨이에서 ‘시카고’ 보다
김 서 련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그대로 널브러졌던 나는 벌떡 자리
에서 일어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일어나, 시카고
보러 가야지. 옆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아이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 아이의 어깨에다 손을 갖
다 대는데, 치마레깅스와 스판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몸이 눈으로
들어온다. 침대의 삼분의 이를 차지한 아이의 몸은 기이할 정도로
상체보다 하체가 비대하다. 아이가 몸매를 감추기 위해 검은색의
헐렁한 옷만 입고 오다가다 그런 옷들이 있으면 사주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대하다니. 문득 아이의 모습에서 사우루스 공룡을 떠
올린다. 아이의 몸이 비대하긴 해도 공룡과 비교할 정도는 아닌데
왜? 오늘 낮에 자연사 박물관에서 본 공룡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
아 있는 것일까. 마음 한 구석에서 애잔한 감정이 밀려온다.
저녁을 먹으려면 지금 가야 해. 나는 아이를 재촉한다. 딱 오 분
만 누워 있다가 일어날게. 아이가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하
10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긴 고단하겠지. 새벽부터 일어나 브로드웨이의 극장 앞에서 한 시
간 넘게 기다려 할인 티켓을 사고, 종일 걸어다니면서 메트로폴리
탄 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쇼핑까지 했으니. 나는 아
이가 더 자게 두고 여행용 가방에서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 손거울
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친다.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을 기미와 주
근깨를 감추기 위해 화운데이션을 덧바르고 평소에 거의 하지 않
는 눈 화장도 한다. 갈색 아이섀도를 바르고 마스카라로 눈썹을 올
린다. 아이에게 얻은 붉은색 립스틱을 바르고 담이 들어간 바지 대
신 검은색 치마로 갈아입는다. 뮤지컬을 보는데 특별히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니겠지만 그래도 단정한 차림으로 공연을 보
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살펴보고 있는
데, 아이가 부스스 일어나 나를 바라본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라
는 호기심과 의아심이 담겨져 있는 눈빛이다.
뭐 먹을래?
현관문을 나서면서 아이에게 묻는다. 종일 걸어 다닌 탓에 다리
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저녁은 간단하게 먹지 뭐. 아이가 말한다.
점심을 먹을 때 그램 무게 당 요금을 내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접시
에다 이것저것 가득 담아 먹은 것을 두고 말한다. 하루 식비를 초
과하는 바람에 저녁은 간단하게 먹기로 이미 합의를 본 상태였다.
나는 일일이 가게마다 기웃거린다. 몇 개의 햄버거 식당을 지나친
다. 햄버거 말고 다른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다. 술집인
지 레스토랑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식당 안을 기웃거린다. 은은
한 조명이 흐르고 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들어가고 싶어진다. 특별히 음식을 먹기보다는 분위기를 즐
소설·김서련┃ 103
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멈추어 서서 창 너머 사람들을 바
라본다. 들어가고 싶어? 내 옆에서 선 아이가 묻는다. 그래, 하지
만 저런 데선 느긋하게 먹어야하는데. 시간도 없는데 그냥 가자. 나
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이 길이 맞아? 어젯
밤에 타임스퀘어 광장을 오가면서 숙소에서 제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숙지했는데도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아이에게 묻는
다. 응. 맞아. 어제 저녁에도 갔었잖아. 어떻게 잘 알아? 저 편의점
도 봤고 저 호텔도 봤고 저 상점도 봤고. 그리고 구글 앱을 보면 지
금 우리가 가는 방향까지 다 나와.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한
다. 그래? 그것, 참 좋네. 아이가 생각보다 길을 잘 찾아서 다행이
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사실 나로선 꽤 무리수를 둔 뉴욕 여행이었다. 몇 달 전부터 참석
하고 있던 영어회화 모임의 영어 선생님이 가족들을 보기 위하여
한 달 예정으로 워싱턴에 있는 본가에 간다는 말을 듣고 회원들 중
누군가 선생님과 함께 미국 여행을 가자는 의견을 냈고 몇몇이 구
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하나 둘, 이런저런 핑계를 댔고 결
국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여행을 간다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
를 보내고 있던 나는 고민해야 했다. 여행은 갈 기회가 생겼을 때
가야 한다는 것은 몇 년 전의 경험으로 절감하고 있었다. 중국 여
행이었다. 굳이 가려면 갈 수 있었으나 주변 상황을 고려해서 뒤로
미루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
만 그 트래킹 코스는 개발로 인해 없어졌다.
뉴욕 여행도 그러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뉴욕이 갑자기 사라지
10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거나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고심 끝에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를 끌어들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지난 몇 개
월 동안 회사 일과 별도로 밤이고 주말이고 쉴 틈도 없이 아르바이
트 해서 모은 돈을 전부 경비로 사용해야 했다. 몇십만원의 이자를
내고 있는 보험회사 대출금의 일부를 갚을 돈이었다.
뉴욕 여행을 결정한 뒤 왕복 비행기와 숙소와 메가버스를 예약했
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예약하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뮤지컬은 꼭 봐야 해.
아이 생각도 나와 똑같았다. 맘마미아는 영화로 봤고 라이언킹과
오페라 유령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레미
제라블은 지겨울 것 같고 위키드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뮤
지컬 티켓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우리는 뮤지
컬은 브로드웨이에 가서 보고 싶은 것을 고르기로 하고 티켓은 당
일 아침 극장 앞에서 사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젯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가방만 갖
다 놓고 바로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갔다. 지도를 보니 브로드웨이
와 7번 애비뉴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타임스퀘어였다. 그 주변에
극장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라이언킹, 오페라유령
등의 대형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가 아파서 돌아다니는 것도
그러니 그냥 오페라유령을 보자는 아이를 설득해 구석구석을 살폈
다. 특별히 보고 싶은 뮤지컬이 없어서 약간 실망을 하던 중 ‘시카
고’란 간판을 보게 됐다. CHCACO. 붉고 노란빛의 글자 위에는 여
자배우가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저거 보자. 나는 흥분한
소설·김서련┃ 105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거야? 아이가 물었다. 그래. 나
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바로 시카
고,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영어
회화 모임에 들어간 것도 한 달 가량 워싱턴에 있는 본가에 체류하
는 영어 선생님을 따라 누군가 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 냉큼 찬성한
것도 하나 둘, 이유를 대며 빠져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 포기하지 않
았던 것도 워싱턴이 아닌 뉴욕으로 바꾸고 비행기 표를 예약한 것
도 ‘시카고’란 뮤지컬 때문인 것 같았다. ‘시카고’란 뮤지컬이 날 끌
어당긴 것 같았다. 나는 특별히 뮤지컬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굳이 비싼 입장료를 내 가며 뮤지컬을 보니 차라
리 그 돈으로 영화나 몇 편 보자는 주의였다. 그런 내가 무리하게
뉴욕여행을 감행한 것은 오로지 이 ‘시카고’ 때문이 아닐까하는 느
낌이었다.
시카고를 보기로 결정을 하고 우리는 타임스퀘어 광장의 붉은 계
단에 앉아서 지친 다리를쉬게 했다. 아이가 근처 맥도날드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면서 휴대폰으로 시카고를 검색했다. 분명히 시카
고를 본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카고의 ‘쿡 카운터 교도소’를 무대로 실제 살인 사건을 모티브
로 모런 댈러스 왓킨스가 1927년 ‘Chicago’라는 연극으로 처음 선
보였던 작품으로 주인공은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 빌리 프린이다.
록시 하트는 화려한 재즈싱어를 꿈꿨지만 코러만 전전하다 자동차
수리공인 에이머스 하트와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된다. 그러던 중
프레드 케이슬리라는 가구외판원과 바람을 피우고, 그가 일방적으
10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로 이별을 통보하자 권총으로 살해했고 벨마 켈리는 재즈 퍼포먼
스 공연을 하는 인기스타였지만 여동생과 남편이 방에서 활짝 펼
친 독수리 자세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격분해 두 사람을 쏴
죽였다. 빌리 프린은 화려한 언변과 능숙한 언론플레이로 특히 여
성 재소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도가 튼 변호사로 록시와 벨마 사이
를 이간질하면서도 결국 둘을 무죄방면으로 이끌어준다.
내용만 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실제로 내가
시카코를 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면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정
말 보고 싶은 뮤지컬이므로 지금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의 모든 것을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뉴욕에 온 목적을 달성한
듯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 저기 맥도날드 있다.
아이가 손을 들어 가리킨다.
뭐, 어디?
나는 아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던진다.
저기, M이란 글자 보이잖아.
그제야 하나 둘 불이 켜진 크고 작은 건물 사이에서 붉은 바탕에
황금색으로 쓴 ‘M’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주위에 있는 다른 불
빛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선명하다.
정말, 맥도날드네.
약 3초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또박또박 말한다. 목소리에 힘까
소설·김서련┃ 107
지 들어가 있다. 그 3초 동안 내 머릿속에 스쳐간 생각들을 숨기기
위해서다. 왜냐고? ‘M’이란 글자를 봤지만 순간적으로 맥도날도와
일치 시키지 못했다. 집 앞 맥도날드를 종종 이용하면서 분명 M이
란 글자를 봤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다니는지,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 맥도날도에 가다니, 갈 데가
맥도날드밖에 없다니, 그래도 맥도날드 음식이 제일 입에 맞겠지,
평소에 늘 먹던 거니까 라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맥도날드로 향한
다. 아마도 맥도날드를 선택한 이유는 이거겠지. 만만하다는 것.
. 여긴 제대로 먹을 게 있네.
아이가 메뉴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는다.
난 햄버거 세트.
나는 아이를 힐끗 쳐다본다. 방 안 구석구석 처박아 놓은 햄버거
종이를 떠올린다. 그동안 아이를 단식원에 세 번이나 보내고 개인
트레이너도 붙이고 한약도 달여 먹이는 등 아이의 체중을 줄이기
위해 나름 애를 썼다. 그럼에도 아이가 왜 다이어트에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야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음식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햄버거와 콜라, 통
닭이었구나.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새삼스러
웠다. 방안에 뒹구는 햄버거 봉투와 닭 뼈다귀를 보면서 그런 생각
을 했고 아이에게 야단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
고 있다니. 감자튀김과 햄버거를 번갈아가면서 우걱우걱 입안에 넣
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묻는다. 햄버거가 맛
있어? 응. 정말 맛있어. 여기 오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있네. 아
이가 헤실헤실 웃는다. 그렇게 햄버거나 먹으니까 살이 찌지,라고
10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도로 집어 삼킨다. 괜히 여기 와서 아이에게
타박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그래, 먹
고 싶은 게 많아서 좋겠다. 기어이 한 마디 내뱉고 나는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어서 차선책으로 주문한 스프를 숟가락으로 떠서 입안
에 넣는다. 밍밍하다. 맛없어? 아이가 묻는다. 생각보다 맛이 없
네. 나는 숟가락으로 스프를 휘휘 젓는다. 맥도날드 스프가 원래 그
렇지 뭐. 아이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원래 그런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어느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성향이긴 하지
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아이의 방에서 햄버거 봉투를 발
견하면서도 아이가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아
이의 체형이 비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도 그렇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무관심인가. 아니면 보면서도 보
지 못하는 건가. 흑인 여자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옆 테이블
에 앉는다. 학교에서 모임이라도 한 것일까. 아이들은 아이대로 어
른들은 어른대로 앉아서 햄버거를 먹는다. 다른 테이블엔 중동 사
람인 듯한 노인이 혼자 앉아 있고 다른 테이블엔 백인 가족이 앉아
있다. 경쾌한 노래가 흐르는 홀 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로 복
닥거린다. 그들이 맥도날드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을 하자 홀 안에 있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가출했는데도 모르더라.
아이가 햄버거를 베어 먹다 말고 불쑥 말한다.
언제?
소설·김서련┃ 109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집을 나갔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적
이 있었던가. 난 또, 그냥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가 했지. 나는 일
부러 아는 척한다. 하긴 가출했는데, 잘 데가 없어서 친구 집에서
지냈어. 친구 누구? 미수. 미수? 그 미수 집에서 잤단 말이야? 그
래. 근데 미수 엄마는 왜 그랬을까. 아이가 내 얼굴을 바라본다. 중
학교 영어 교사였던 미수 엄마가 베란다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사
건을 두고 말한다.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영어연수와 학교의 과중
한 업무 때문에 그랬니 어쩌니 추측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 아이 문제로 미수 엄마와 커피를 마신 적이 있
었다. 그때 내가 안 것은 제주도 고향이라는 것. 웃으면 보조개가
예쁘게 들어가고 차분하고 약간 차가운 듯한 이미지와는 달리 심
성은 곱고 여리다는 것. 그때 아마 미수 아빠가 실직해서 무슨 공
부가 한다고 했는데, 그게 힘들었나. 나는 말꼬리를 흐린다. 그것
때문에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을 리는 없을 테고 대체 무엇이 그녀
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미수와는 요즘도 연락해? 아니. 그 일
이 있고 난 뒤 아예 연락이 안 돼. 아이의 얼굴에 언뜻 어둔 기색이
스쳐간다.
네온사인 불빛 아래선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수백 개의 전광판이 쏟아내는 화려한 네온사인에 나도 모르
게 하이쿠를 읊는다. 잇사의 하이쿠 한 구절인데 꽃그늘이란 단어
를 네온사인 불빛으로 슬쩍 바꾸었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뉴욕에 오네.
나는 내친 김에 한 구절 더 읊조린다. 거대한 전광판의 광고들은
11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소리 없이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빌딩은 보이지 않고 현란한
광고만 존재하는 것 같다. 광고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생명력을 지
니고 있는 것 같다. 내면을 활짝 열고 마음껏 욕망을 분출하라고 광
장에 몰려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부추기는 것 같다. 감추지 않
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적당히 감출 줄도 알아야지.
가끔 그는 내게 조언하고 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거였다. 인간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건 또한 업
무하고도 연관이 됐다. 광고 시안을 만들 때 나는 원색적으로 그대
로 드러내는 것을 선호했다.
대학 동창의 장례식장에서 몇 십 년 만에 만난 그는 전공을 살려
서 꽤 큰 광고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에 우리는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게 됐다. 그는 직원이
조마간 그만 둘 예정이라서 어딜 그쪽 계통으로 아는 사람이 없는
가 하고 넌지시 던지는 말을 나는 은근 슬쩍 말했다. 나도 요즘 일
자리를 찾고 있는 중인데, 어딜 마땅한 데가 없을까. 결혼한 이후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지만 대학 다닐 때도 꽤 실력이 있었고 졸업
후에도 광고디자인으로 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나는 거리의 전광
판이나 잡지와 신문에 난 광고를 보면서 감을 잃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써 왔다. 그리고 시나리오 주인공의 직업도 광고인인 때가 많
았다. 그럼, 우리 회사에 들어올래? 그렇게 해서 나는 그의 회사에
서 일하게 됐다. 다시 일을 하게 된 나는 신이 났다. 광고주가 몇
번이나 시안을 수정해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한 달 월급은 노
동 시간에 비해 적었지만 그 돈이라도 버는 게 다행이라 싶었다.
소설·김서련┃ 111
그즈음 나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남편 월급으
로 딱 한 달 살면 맞았다. 물론 아이는 평범한 학원에 다녀야 하고
대폭 할인된 옷을 사고 외식 한 달에 한 번쯤만 하는 등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경우에만 적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유치원
에 들어갈 무렵 미술학원을 운영했던 나는 돈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썼다. 그것은 내가 미술학원을 그만두고 시나리오를 쓸 때도
적용되었다. 아이의 고액과외비와 시간이 없다고 사 먹는 외식비
는 고스란히 적자로 남았다. 한 달에 몇 십 만원의 적자는 일 년이
되자 몇 백 만원으로 불어났고 몇 년이 지나자 몇 천 만원으로 눈
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나는 올해 한 해만 한 해만 하면서 그것
을 무시했다. 시나리오가 채택돼 영화로 만들어지면 대박이 날 거
고 그때 빚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를 무지무지하게 좋아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나
리오를 써서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래서 대박을 내겠다는 열
망에 차 있었다. 열망뿐이었다. 내겐 상상력이라니 감수성이라니
집중력이라니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 내가 쓴 시
나리오가 독립영화로 만들진 적이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그 뒤로
나는 제대로 시나리오를 써내지 못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스토
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점점 퇴보되어 갔다. 점점 무디어 갔
고 마침내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글을 쓸 에너지가 고갈되어 헤
매고 있을 때 동창 부고를 들었던 거였다. 사실 그 동창은 학교 다
닐 때 그리 친하지 않았던 터라 예전 같으면 문상을 가지 않았을 것
이다. 하지만 나는 환기가 필요했다. 동창들을 만나서 살아가는 모
11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습도 보고 싶었다.
나는 광고 만드는 일에 전력했다. 젊은 아이들의 감각을 잡기 위
해 밤늦게까지 공부하기도 했다. 일은 내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미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났고 몸의 갈피갈피
숨어 있던 무력감이 말끔하게 사라진 듯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분
노와 증오감도 사라졌다.싱싱하고 달콤한 향기로 일상이 채워졌
다. 마치 광고에서 알 수 없는 생물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기이한 느
낌마저 들었다. 하나의 생명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충만한 에너
지가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랬는데.
시카고, 마침내 보는구나. 들뜬 마음으로 들어온 극장은 상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웅장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무대가 만들어
졌을 거라는 애초의 생각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무대는 상상
한 것보다는 규모가 작고 바로 눈앞에서 배우의 몸짓 하나하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이 큰 극장보다 훨씬 좋은 것 같
았다. 공연을 세세히 볼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행동이 바로 손에 잡
힐 듯 가까이서 보인다. 할인 티켓이라 그런지 우리 자리는 앞에서
3번째, 왼쪽 통로의 끄트머리에서 3번째였다. 무대의 측면만 보이
지만 그나마 그것도 맨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싶었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본다. 검고 희고 누렇고 피부 색
깔도 다양하고 머리카락 색깔도 다양하고 얼굴 생김새도 다양하다.
다들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여행객일 수도 있고 뉴욕 시민일 수도 있
지만 한 가지 비슷한 것은 얼굴이 기대와 열망으로 들떠 있다는 거
소설·김서련┃ 113
였다. 활기가 넘치는 음악 속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알
아들을 수 없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비록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
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의 줄을 타고 그들과 서
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생각이 달라
도 바로 이 순간만은 서로 하나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
도 ‘시카고’란 뮤지컬 때문이리라.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공연 2분 전이다. 안내원이 다가오더니 맨 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을 무대가 더 잘 보이는 빈자리로 데리고 간다. 안내원에게 우리도
가도 되냐고 묻는다. 좋다는 손짓을 하자 잽싸게 그들 틈에 끼여서
자리를 옮긴다. 정중앙에서 약간 비켜 선 자리라 무대가 한 눈에 들
어온다. 휴, 다행이다. 이제 제대로 보겠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
며 아이에게 말한다.
드디어 막이 오른다. 온몸으로 열연하는 배우들. 나는 그들의 춤
과 노래를 따라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노래 가사에 집중한다.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충 이야기는 엮어진다. 낮고
높게 중간 톤으로 부르는 노래와 몸짓에는 기쁨과 분노, 슬픔 등 감
정이 녹아 있다. 나는 록시가 정부에게 총 쏘는 장면을 기다린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끌고 가는 축이 될 장면이다. 그로 인해 록시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말이 교도소이지 그곳은 어떤 곳인가. 깊은 절
망과 분노와 고독과 외로움과 슬픔이 존재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
교도소에 수감된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이 어떤 심정일
지 알 수 있다. 록시를 생각해 본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접고 평범
한 생활을 하던 중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
이다. 그러기에 배신을 당하자 쏴 죽이겠지. 만만한 스토리다. 그
11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것에다 배우들은 스스로 감정이입을 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표현
하고 있다. 만만한 스토리는 이제 만만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스
토리를 만들어낸다.
내겐 영화가 그랬다.
나는 영화를 구상하고 쓸 때가 가장 행복했다. 스토리를 만들고
주인공들에게 색깔을 입히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잊었고 온몸
의 감각을 활짝 열고 편하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다. 오로지 내
감정에만 몰입하고 충실하게 표현했다. 외로움과 슬픔, 절망과 기
쁨이 공존했다. 나는 시나이로를 쓰면서 마음껏 욕망을 분출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뿌리 채 뽑아서 주인공의 캐릭터 만드는 데 일
조 하려고 했고 오로지 스토리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 자연히
주변은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일상적인 일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그때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것은 욕망이었다. 정말 영
화를 사랑해서 좋은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 내 시나리
오가 영화가 되고 싶은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뭔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마땅히 할 것이 없으니까 시나리오를 쓴 것인지 아니면 정
말 내가 원했던 것은 영화가 아니라 내 안의 뭔가를 분출하기 위한
도구인지도 모른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만약에 그렇다면 내 안의 욕망은 무엇인가. 그것의 근원은 어디
에 있는가. 결핍이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유년 시절을 꼼꼼하
게 되새겼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숨어 있는 뭔가가 만들어낸 게 뻔
한 욕망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평범했다. 부모도 평범했고 성
장 과정도 평범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는데 불편함을 겪
기는 했지만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나에게 잘해 주었다. 그들의 말
소설·김서련┃ 115
로는 나는 착하고 성실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니 누구와 싸
울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주변에서 사람들이
싸우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오싹 소름이 끼치고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거였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를 피했다.
록시가 애절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간
다. 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온 신경을 무대에다 집중한다. 결
정적인 순간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은 격
앙된다. 조명의 적절한 배치로 그녀의 얼굴 윤곽은 선명해지고 눈
빛은 강렬하고 절절했다. 애인에게 배신을 당한 그녀의 절망이 고
스란히 내게로 전해져오는 것 같다. 그녀의 행동을 단번에 이해할
것만 같다.
무대에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는데, 그것
은 내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수백 명의 관중들이 보고 있
기 때문이다. 극장 안을 감돌고 있는 열망이 사람들을 숙연케 하고
있다. 이 열망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에 살고 있든 무엇을 하
고 있든 잘 살든 못 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식하든 못
하든 사람들은 이런 열망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현실이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광고를
만드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언인가 나를 옥죄고
있었다.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
이 몰아칠 때면 나는 내 삶을 낭비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
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러다가 진짜 파멸하는 것은 아닌지 이렇
게 내 삶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르기도 했다. 혼란스
11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러웠다. 격렬한 불안은 그래도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인데
움켜쥐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나이가 들어서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생각으로 귀결됐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
혔다.
추락하는 느낌. 나는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하여 록시의 얼굴 표정
과 목소리의 울림에 집중한다. 탕,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은 바로 시
작점이다. 또 다른 삶의 출발점이다. 바닥까지 추락해야 다시 올라
갈 수 있는 법.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다가 기어이 바닥까지 추락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힘이 붙고 또 붙어 다시 날아오
를 수 있으니.
록시가 점점 남자 곁으로 다가간다. 탕, 한 발의 총알이 허공을
가르고 전광석화같이 날아간다. 한때 화려한 재즈싱어를 꿈꿨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그녀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혹시, 끊어내고 싶으신 건가요?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소리는 머릿속에만 맴돈
다.
여섯 명의 여배우들이 선정적인 춤을 선보이고 있다. 자신만의
포즈와 자신만의 색깔과 자신만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모두 살
인을 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대를 휘어잡는 압도적인 분위기로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음
을 나름 추측해 본다. 그들은 이제 비상을 꿈꾸고 있다. 조금씩 조
금씩 새로운 꿈을 가지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고 새로운 삶을 향
소설·김서련┃ 117
해 나아가려고 있다.
나는 옆자리를 돌아다본다. 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무대를
주시하고 있다. 어떤 기억이 하나가 눈앞에 얼쩡거린다. 생각하기
에 따라서 아이의 행동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도 아
이는 종종 뭔가 잊어버리고 간 적이 많았고 그때마다 바쁜 와중에
서 시간을 내서 갖다 주기도 했는데.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아이
가 도서관에 가면서 깜박 잊고 책상 위에 두고 나간 교통카드를 다
시 가지러 온 일을 두고 나는 화를 벌컥 내면서 야단을 쳤다. 지하
철을 타려면 교통카드를 챙겨야하는 것은 당연한데, 대체 정신을
팔고 어디에 다니냐고 야단치는 것까지 좋은데, 그만 욕을 한 것이
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했다. 그것도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증오를 마치 욕에다 꼭꼭 담아내
듯이 뱉어냈다. 대체 왜 그러냐고, 그래봤자 5분 정도 늦지 않다고
아이는 울먹거리면서 대들었고 나는 아차, 싶어서 방으로 들어가
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가 미쳤어. 왜 이러지. 나는 이불 속에서
자책을 했다. 내 안에 꽉 차 있던 뭔가가 아이에게로 불똥이 튄 것
같은데, 대체 그것의 성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는 일이 주기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되
고 있었다. 그런대로 일상을 잘 영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
엔 다른 뭔가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몸까지 침투했고 속
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어느 한계점을 지나면 그런
식으로 분출되곤 했다. 아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고. 아무
래도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고. 아이는 아무 대꾸
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는 곧 풀렸지만 나는 내내 바닥으로 추
11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지금 나는 타임스퀘어 광장에 앉아 있다. 낯선 도시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평소 그려보던 풍경이다. 이런 순간을 꿈꾸어 왔다. 아
이가 근처 맥도날드에 커피를 사러 간 사이 나는 광장을 서성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밤이 꽤 늦었는데도 아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
이 북적거리고 활기가 차 있다.
‘시카고’를 떠올린다. 무대의 열기가 내 몸에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생생한 감동이 되살아난다. 그런데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은 뭐지?
오랫동안 뉴욕에 살았고 이 광장에 수시로 앉아 있었던 것처럼 마
음이 편안하다. 자유의 여신상 복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오고가는 사
람들에게 말을 걸면서 사진을 함께 찍어주는 자도 붉은 계단에 다
정하게 앉아 있는 연인도 전광판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
는 여행객들도 평소 익숙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뉴욕을 배경
으로 한 영화를 많이 본 탓일까.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하루
에 한 편 이상은 꼭 보고 하루를 마감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거대한 전광판에서 수시로 바뀌는
광고에 눈길을 던진다. 선명한 색감의 광고들. 내면의 욕망을 바닥
까지 드러내고 나면 남은 것을 무엇일까. 온전하게 자신 속으로 들
어가서 욕망의 실체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끊임없이 광고를 쏟아
내고 있는 전광판들을 바라보며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
자기 길 양쪽으로 색색깔의 빛들을 내뿜는 네온사인이 점점 내게
로 이동해온다. 저 멀리 있는 것부터 차례로 걸어온다. 수십 개, 수
백 개의 네온사인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온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소설·김서련┃ 119
열고 온몸의 세포를 열어서 그들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
을 내 준다. 한 개씩 내 안으로 들어온다. 조금씩 내 몸이 커진다.
안녕? 나는 코가콜라야. 안녕? 난 언론사야. 안녕? 난 경찰서야.
안녕? 난 화장품이야. 안녕? 난 영화야. 명랑하게 인사를 하고 내
안으로 들어온 수백 개의 광고들. 어느새 내 몸은 타임스퀘어 광장
에서 애비뉴 거리까지 비대해져 있다. 머리는 작고 몸집은 거대한
사우루스 공룡처럼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엄마, 냉커피 사왔어.
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번쩍 정신을 차린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
아서 커피를 홀짝인다.
정말이지 맥도날드 커피가 너무 마음에 든다. 양도 많고 가격도
싸고. 뉴욕에 오길 잘했어.
정말, 엄마가 신이 나서 좋아하니 나도 좋아.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내가 그렇게 신나 보여?
그래, 엄마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아이가 비실비실 웃는다.
그래, 정말 좋다.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문
자를 보냈다. 보름 예정으로 뉴욕에 간다. 의뢰받은 광고는 다 만
들어서 웹하드에 올려놓았다. 내가 없는 동안 일은 정희가 대신 해
주기로 했다. 등등. 한국으로 돌아갈 즈음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달라져 있겠지. 점
12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점 사라지는 것들. 점점 퇴색되어 가는 감정들. 방아쇠를 당긴 록
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것은 이전과 다른 삶으로 채워
지리라.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바로 이 장면을 향해 달려온 듯한 느
낌이다. 이제 숙소로 갈까? 나는 아이에게 묻는다.
김서련
경남 진영에서 태어나 1998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김유정문학상과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작품집으로는 『폭력의 기원』, 『슬픈 바이러스』 등이 있다.
소설·김서련┃ 121
스토커의 문법
안 지 숙
당신하고 자러 갈 일은 없을 테니 천천히 마셔요. 천천히… 말하
는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 눈길이 돌연 차갑군요. 괜찮아요. 이
제 시작인걸요. 내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당신은 앞에 놓인
잔을 홀짝 털어 넣듯 마시는군요.
스티로폼 접시에 담긴 무지개떡이 참 예쁘네요. 연두색 귀퉁이를
떼어내 우물우물 씹는 당신 표정이 소 같아요. 개업 떡을 많이 먹
으면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잘될 거라고, 카운터를 지키는 아저씨가
갑자기 끼어드는군요. 당신은 사레들린 듯 잔기침을 하고, 주방 쪽
을 보며 소주 한 병을 외치는군요. 하긴 오늘처럼 꽃샘추위가 매운
날은 소주가 나을 거예요. 소처럼 순해진 얼굴 위로 경련이 이는 걸
보니 살짝 미안해지는데요. 내내 잘 견디다 결국 메일을 보내고 만
것, 전화를 걸고 만 것이요.
지난주 금요일이었어요. 프린터기 앞에 서서 교열 대장(대교지對
校紙)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문화면 대장이 먼저 밀려나왔어요. 나
12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무의 방식. ‘나무의 방식’이라는 새 시집을 냈다는 그의 인터뷰기사
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더군요. 아, 제가 지금 ‘그’라고 했나요? 당
신 앞에서, 당신을 ‘그’라고 하다니 우습군요. 우습기는 한데요.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할 수 있으려면 그래야 할 거 같아서요. 당신이 아
니라 그에 대해서……. 아무튼 그날 저는 프린터기 앞에 서서 문화
면에 실린 그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지요. 그는 나무처럼 풀잎
처럼 존재하는 삶의 결들을 다양하게 담고 있다는, 시집의 서평에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운명처럼 오래, 그를, 예전의 당
신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는, 붉고 슬픈 생각들이 내 안에 슬며시
내려앉더군요.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나는 건 차마 못할 짓이라는 생
각이 들었지요.
알아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을 거예요. 그러나 잠시만
요. 잠시만 그냥 제 얘기를 들어주실래요? 한번쯤은 당신과 내가,
내가 알던 예전의 당신을, 그를 안주 삼아 술잔을 들 수도 있지 않
겠어요. 아, 막상 말을 하려니 어렵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기사가 실린 대장을 프린터기에 내려놓고 돌아서지 못한 것은,
아니오, 그가 결혼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인터뷰 내용
이 놀랍기는 했지요. 놀랍긴 했지만, 저를 돌려세운 건 기사 말미
에 들어있던 시였어요. ‘나무의 방식’이라는 표제시요.
끌어안지 못하여 / 나무는 그저 바라봅니다 / 목숨처럼 꽃가루
날리며 / 전하는 이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 겨운 운명을 지녔습
니다 / 마음으로 보듬은 사이로 / 바람이 붑니다 / 다가서지도 멀
어지지도 않은 채 / 한 풍경을 이루며 / 나무는 늙어갑니다
소설·안지숙┃ 123
포옹하지 못하는 나무의 사랑은 온천천변을 걸으면서 당신이, 아
니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밀어였어요. 강대나무가 무리를 이루어
서있는 곳에서요.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더 멀어지지 않은 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서 다시 돌아선 것, 당신을 찾아온
것, 그런 이유에서죠.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래요, 지금 나를 바라보는, 차분하고 무심
한 그 눈길이오. 나를 사로잡았던 눈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
죠. 조심 하노라 했는데 아차 하는 순간 내가 종이컵을 놓치고 말
았던 몇 년 전, 그때요. 커피가 쏟아진 탁자에서 다리를 뒤로 물린
그가 나를 천천히 돌아봤지요. 내가 정말 아차 했던 건 종이컵을 놓
친 순간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던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이었어요. 누가 귀를 잡고 당긴 듯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일그
러지고, 움찔거리던 눈꺼풀 아래 차분한 눈길을 마주했던 순간이
오. 괜찮아요? 그가 물었고, 괜찮으세요? 내가 동시에 물었죠. 묻
는 내 입술이 조금 전 그의 얼굴을 지나간 경련에 전염된 것처럼 불
불불 떨렸지요. 웃음이 나왔어요. 내가 웃는 걸 본 그가 따라 웃더
군요. 눈과 입이 한쪽으로 쏠린 얼굴로 웃는 그를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푸르르 웃다가 왜 갑자기 울
컥 뜨거운 응어리가 가슴에 치밀었는지.
병원에서는 혈행장애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산소부족 때문이겠
죠. 모든 병이 다 그럴 거지만요.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 하는 말인
지, 소장이 잡아끈 뒤풀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증상을 산소부족
탓이라 설명했어요. 그래서 제 소원이 산소 같은 여자입니다. 한 세
124┃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대쯤 뒤처진 그의 농담에 우리 소장님이 큰소리로 웃었죠. 우리 소
장님 아시잖아요. 장애인 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재능나눔
으로 와준 강사의 농담이니 무조건 웃으신 거죠. 그때 했던 강의가
문화유산 바로보기인가 그랬죠. 껄껄 웃는 소장님 옆에서 막걸리
병을 집어 들던 그가 문득 나를 쳐다보더군요. 나는, 왜 그랬을까
요, 평소와 달리 나를 쳐다보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어요. 나를 바
라보던 그의 오른쪽 뺨이 실룩거리더니 눈가에 웃는 주름이 잡혔
죠.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얹혔고요.
그 이튿날 소장님을 설득해 그가 기자로 있는 신문사에 전화해서
구독신청을 했어요. 신문을 받으면 먼저 그가 쓴 기사가 있는지 찾
아보았죠. 그리곤 신문 홈피로 들어가서 그가 쓴 유적순례 기획기
사를 다시 찾아 읽었어요. 불교와 천주교 등 종교 성지 순례길을 다
룬 기사를 읽고, 생토층의 연대로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따라간
문장을 읽었어요. 음식도구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저장구덩이와 우
물과 기둥 구멍의 흔적에 관한 문장에는 밑줄을 그었지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원형우물의 흔적 위로 그를 떠올리면서요. 그를 떠
올리면 오래전에 사라져 잊고 있던 내 몸속의 떨림이 뱃속을 짜르
르 지나갔죠.
신문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아마 그런 걸 운명의 계
시라고 할 거예요. 계약직 교열기자 모집 공고가 눈에 띄더라고요.
바로 입사원서를 작성해서 보내고는 시험일 새벽까지 외래어사전
을 통째로 외웠어요. 젊은 친구들을 제치고 내가 연락을 받은 건,
장애인센터에서 한 달에 한 번 소식지를 만드느라 사전을 늘 가까
이한 덕분일 거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출판사에 다녔던 이
소설·안지숙┃ 125
력도 도움이 됐을 거고요.
출근하고 며칠은 분위기도 낯설고, 행여 오타를 잡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긴장이 돼서 옆에 누가 오고가는지 신경 쓸 틈이 없었죠. 사
흘째 되던 날 편집국 출입구로 들어오는 그를 보았어요. 그가 걸음
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더군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그
의 마른 표정 위에 슬그머니 웃음이 실렸지요. 종이컵을 놓쳐 커피
를 쏟았을 때처럼, 나도 그와 마주 웃고 싶었는데 딸꾹질이 나오지
뭐예요. 그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어요. 왜 그랬는지, 한 해 사이에
머리가 희끗희끗 센 채 후줄근한 카디건 차림으로 내 앞에 선 그가
한순간 허깨비처럼 보였어요.
우린 자주 함께 걸었어요. 회사 근처 온천천변은 우리가 특히 좋
아했던 산책코스였죠. 등을 꼿꼿이 세우고 마음속으로 박자를 세
며 규칙적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면 무릎과 고관절 쪽으로 저릿한
통증이 일었는데, 그와 함께 걸을 때는 달랐어요. 나직나직 들려주
는 그의 말이 따스한 온기가 되어 내 걸음 속으로 흘러들었어요. 그
는 종종 멈추어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고 반 박자쯤 어긋나는 걸음
으로 따라가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어요.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면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
이었죠.
온천천변을 걸으며 그는 지난 한 해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을 털
어놓았어요. 노후에 살 전원 주택지를 마련해두자는 친구의 말에
무리를 해서 사들인 임야가 이중계약 사기를 당했고, 그 일로 크게
빚을 지게 됐다고요. 공동매입을 했던 친구의 대출보증까지 서는
바람에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월급여의 절반이 넘고, 그 와중에 사
126┃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사건건 부딪치던 아내와도 갈라섰노라고.
산책만큼 그가 좋아했던 건 막걸리를 마시는 술자리였죠. 아참,
여기 혹시 막걸리도 파는지 물어볼까요? 소주는 별로 안 좋아했잖
아요? 하긴 섞어 마시면 뒤끝이 안 좋죠. 하하, 술꾼은요. 이런 몸
으로 술꾼 흉내나 낼 수 있나요. 그를 따라다니며 막걸리 맛을 배
우긴 했죠. 자주 갔던 데가 서부시장 안쪽에 있던 막걸리 집일 거
예요. 거기서 대학시절부터 시 공부를 같이 했다는 그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죠. 친구들하고 있을 때면 그는 말을 하기보다 듣는 쪽
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친구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희한
하네요. 만나면 몇 시간씩 한자리에 둘러앉아 얼굴을 본 사람들인
데.
막걸리 집에서 나오면 그와 나는 전철역 쪽으로 걸어가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카페를 찾아들었어요. 카페에 앉을 때면 이상하게 우
린 늘 마주앉았지요.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지가 않았죠. 옆자리에
내려놓은 그의 묵직한 가방 때문이었을 거예요. 하긴 그보다 더 이
상했던 건, 이상했다기보다 서운했던 건 그가 나에 대해 전혀 묻지
않는 거였어요. 왜 평소 멀쩡하게 잘 다니다가도 한 번씩 다리를 절
룩이는지, 어깨에 메고 다니던 가방을 땅에 끌리도록 늘어뜨리고
울상을 짓는지, 얼굴이며 목이며 밖으로 드러난 몸의 피부가 버석
한 종이 같은지, 오래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몸 개그를 하
듯 자세를 흉하게 비트는지.
생각난 김에 약을 먹어야겠군요. 오늘처럼 저녁 대신 술을 먹는
날은 약 먹을 타이밍을 놓치기가 쉽죠. 제 몸이야 늘 이런 거고, 요
즘은 눈이 문제예요. 피부가 건조한 거랑 비교도 안 되게 어찌나 꺼
소설·안지숙┃ 127
끌꺼끌한지. 기자들도 교열부에 있어보지 않으면 잘 몰라요. 장편
소설 한 권 읽는 것보다 하루저녁 교정지 열댓 장 보는 게 눈이 더
피곤해요. 오늘 낮에도 출근하는 길에 안과를 들렀는데 당장 일을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면서 겁을 주더라고요. 근데 머 일을 관둘 형
편이 돼야죠. 병원비며 아파트 관리비며……. 옆에 앉은 선배 말이
교열부에서 몇 년 근무하다보면 안구건조증은 기본옵션으로 따라
붙는 거라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물론 괴롭죠. 간지대장을 보
고 좀 쉬었다 저녁 여섯 시 삼십분부터 교정지를 보기 시작하는데
본판대장 나올 때쯤이면 활자가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걸요. 그럴
때는 눈을 감고 먼 곳 어딘가를 생각해요. 먼 창가, 먼 나무, 먼 산,
먼 바다, 먼 섬, 그리운 먼 그를 생각하면 눈이 시려오고 눈물이 고
이면서 마침내 촉촉해지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자료를 찾으러 간 조사실에서 그가 긴 파마머리의 여직원 곁에
비스듬히 서있는 포즈를 볼 때도 눈이 시려오곤 했어요. 유적지에
관련된 화보며 사진파일을 부탁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눌하고 나직
하고 부드러웠죠. 여자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고 선하게 웃는 모습
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만한 질투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 있었어요. 어차피 견뎌내야 할 일인걸요. 사실 저는 견딘
다는 말을 무척 좋아해요. 그 말 속에 들어앉은 외로움 때문에요.
외로움에는 스스로를 결연케 하는 무엇인가가 있잖아요. 그래서 견
딘다는 것에는, 견딘다는 말을 관통하는 단단한 뼈 같은 것이 느껴
져요.
근골무력증 진단을 받은 뒤 서른 나이들을 건둥건둥 건너왔어요.
옷을 벗고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면 곱사등이처럼 휜 척추는 내가
128┃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봐도 흉하긴 했어요. 흉하다. 흉하다. 흉하다…… 흉하다는 생각이
무뎌질 정도로 자주 거울 앞에서 마른 삭정이 같은 몸을 확인했어
요. 무력해진 몸이 굳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시시로 찾아
오는 통증과 일주일씩 열흘씩 계속되는 불면을 견디면서, 나는 좀
달랐어요.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어요. 몇 년간 차도를 보이는 것 같지 않더니, 어느 날부터 병
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병원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장
애인인권센터 간사 일을 맡게 되었죠. 소장님이 퍽 인간적이었어
요. 시민단체라는 게 결국 사람 장사인데, 사근사근하지 못해 센터
에 오는 사람들과 쉬 어울리지 못해도 그러려니 넘어가주기도 했
고요.
신문사에 들어온 뒤 그를 만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술을 마
시고, 그가 쓴 시를 읽으면서 내내 그를 바라만 보았던 것도 그래
서였죠. 그저 바라보는 거리에서 멈추는 것, 근신하듯 떨림을 숨길
수 있는 지점에서 포기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국밥을 파는
막걸리 집에서 느릿느릿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
각을 했죠. 카페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도 생각했어요. 그에게로 가는 길이 멀어도 괜찮다고. 천리
만큼 멀어져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그 일이 있었던 건 작년 삼월이었어요. 가만가만 내리는 봄비에
마음이 젖어들던 수요일 밤이었지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그
가 불렀어요. 우산이 없느냐고, 오늘은 마침 차를 가져왔으니 집까
지 바래다주겠다고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회사에 차를 가지
고 오는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은 아마 어디 지방취재를 다녀왔
소설·안지숙┃ 129
던가 봐요. 제 아파트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가 잠시만 앉아있자고
했어요. 잠시 앉아 있다가 제가 말했어요. 같이 올라가자고요. 난
감해하는 그를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는 난처한 제안을 받은 듯 웃
었어요. 얼굴이 한쪽으로 당겨지면서 경련이 일었고요. 웃을 때 주
름이 많이 잡히는 얼굴이, 그의 모습이 좋았어요. 뱃속이 따뜻해지
더군요. 내 안에서 오래된 무언가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차 안에서는 괜찮았는데, 방안에 둘이 멀뚱하게 앉아있으려니 몹
시 어색했어요.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일어섰죠.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와인이라도 사둘걸 그랬다고, 서둘러 커피를 끓이고 귤과 사
과를 챙겨 들어가자 그가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누워있더군요. 탁
상시계를 보니 열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죠.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
건네주는 사과를 먹으며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어요. 온천천변을 걸
으면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서 들려주던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나는 그를 마주 보고 싶었는데 돌아누우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어
요.
오래된 비석을 찾아가는 일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자식 놈만큼
좋다고 잠긴 목소리를 내던 그가 문득 몸을 돌려 나를 보더군요. 나
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어요. 여기서부터는 말하
기가 참 쑥스러운데, 이왕 시작한 거니까 계속할게요. 근골무력증
에다 중증의 류머티즘으로 구겨진 몸을 드러내면서 나는 그의 표
정을 돌아보지 않았어요. 낮은 한숨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아
마 제 착각이었겠죠. 당황한 데다 도무지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몰
랐으니까요. 그가 엉거주춤 앉은 나를 눕히고는 묵묵히 내려다봤
어요. 그의 표정이 어딘지 화난 사람처럼 사나워 보여 나는 눈을 딴
130┃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데로 돌렸어요.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내 몸속으로 들어왔어
요. 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나왔죠. 병색이 있고 혼자 사는 여자
라 해도 설마 이 나이에 성관계를 한 적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겠죠. 그의 이름을 부르며 힘껏 밀어냈는데 그는 내 양팔을 방바
닥에 누른 채 막무가내였죠. 구부리지 않고 반듯하게 누운 자세가
휜 척추를 눌러대는 통증까지 더해졌지만, 더는 그를 밀어내지 않
았어요.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아팠지만요. 나는 그와 한 몸
이 되는 거라고, 그가 토해내는 숨소리에 매달렸어요. 속절없이 바
라보기만 했던 그가, 그의 몸이 내 몸을 찾아들었다는 감격에 엉치
뼈가 어긋나는 것 같았어도 참았어요.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
는지 나중에 병원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알게 됐지요.
거칠게 움직이던 그가 움찔 하더니 몸을 옆으로 굴려 방바닥에
누웠어요. 나는 그대로 누워 얼얼해진 아랫도리의 감각이 돌아오
길 기다렸죠. 잠시 후 나는 몸을 일으키고 그의 이름을 불렀어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곁에 앉아 대답을 기다렸죠. 숨
을 고르느라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서요. 그는 곧 잠이
들었어요. 낮게 코를 골면서요.
작년 이맘때 일인데 말을 하고보니 그때처럼 몸이 옥죄는 거 같
네요. 아랫배도 아프고요. 아뇨.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아픈걸요.
한동안은 엄청 고통스럽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게 이상하긴 해
요. 하루 이틀 사흘… 날이 지나면서 통증이 차차 덜해지는데, 다
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허전하달까, 서운하달까 그런 기분
이 들더군요. 모르겠어요. 정확히 설명하기가 참 그런데요. 아무튼
결정적으로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놓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
소설·안지숙┃ 131
어요. 우습죠? 괜찮아요, 이런 내가 나도 우스운걸요. 한심하기도
하고.
한 병 더 시키시려고요? 아까부터 주인아저씨가 쳐다보는 게 우
릴 걱정하는 눈치 같아요. 그래봐야 겨우 세 병짼걸. 당신은 영 기
분이 가라앉는 눈치군요. 저기 바깥을 한번 내다봐요. 영화세트장
같지 않나요? 여닫이 유리문과 푸르스름한 형광 빛이 번지는 가로
등, 고개를 숙이고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는 남자, 머플러를
둘둘 감고 남자의 속도에 맞춰 종종거리는 여자……. 저 밖에서 보
면, 우리는 다정한 연인처럼 보일까요? 아니면 연기가 서툰 배우들
이 말아먹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을까요. 농담인데, 웃지 않으
시네요.
그 일이 있은 다음날부터 모든 게 영화처럼, 아니 악몽처럼 흘러
갔지요. 다음날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온 그는 젖은 수건을 던지고 허
둥지둥 옷을 입더니 현관문을 나섰어요. 쫓기는 사람처럼 그가 몹
시 서두르는 바람에 나도 허둥거려지더군요. 아침을 차려주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요. 복도를 지나는 동안 그는 내 쪽으로 고
개를 한 번도 돌리지 않았지요. 엘리베이터에 탄 그를 보며 내가 정
박아처럼 웃었을 때도 그는 웃지 않았어요.
그날 나는 삼판 당직이어서 다른 날보다 늦게 출근했어요. 그는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교정지를 읽다 한 번씩 그를 돌아
보았고, 그때마다 아랫배를 칼로 긋는 듯한 통증이 지나갔어요. 저
녁 내내 이마랑 코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데, 그는 교열부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내가 보내는 눈길을 모른 척했어요. 그도 나처럼 컨
디션이 몹시 좋지 않은가 보다, 불안하고 서운한 맘을 달랬죠. 그
132┃ 문학풍류 2019•가을·겨울
런데 퇴근시간이 다돼갈 때였어요. 흡연장소로 사용되던 복사실에
서 나오던 그와 맞닥뜨렸죠. 회사에서는 가급적 서로 말을 건네지
않고 지냈지만 그때는 내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뗐어요. 입
을 떼려고 했지요. 그가 몸을 홱 돌리더니 복사실 안으로 도로 들
어가 버리더군요. 황당했죠. 우리 두 사람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
었거든요.
그는 전화조차 받지 않았어요.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길게 신
호를 보내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그는 내 눈길을 피했고 내
가 있는 자리를 피해 다녔어요. 그게 이해가 되나요? 당신은? 하긴
당신 역시 설명하기가 힘들 거라 생각해요. 나는 그의 이상행동을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했어요. 한번 이혼을 했으니 여자를 대하는
게 힘들겠지. 이혼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입었겠지. 그래서 겁
이 나는 거겠지. 나를 피하는 그를 볼 때마다 주문을 외우듯 반복
했던 말이었죠.
알아요, 지금 당신 기분이 어떨 거라는 것. 당신 입장에서는 왜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게 웬
장렬한 뒷북인지 어이없고 불쾌하기도 할 거예요. 그러나 부탁인
데 잠시만 더 앉아계세요. 잠시만요. 저한테 그 정도는 하셔야죠.
저는 꼬박 한 달을 그렇게 보냈어요. 전화조차 받지 않는 그를 지
켜보며 속을 끓이다 메일을 보냈죠. 내게 왜 이러는지, 행여 내가
귀찮게 매달릴까 겁이 나는 거라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요.
내가 불편하거나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다면 솔직히 말해달라고요.
그는 답장을 하지 않았어요. 구구절절 변명하는 게 귀찮았다면 단
한번의 표정, 단한번의 눈짓만 보내왔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그
소설·안지숙┃ 133
리고 알다시피 그는 여름 끝 무렵 회사를 나갔죠. 이거, 당신 가방
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요. 벨소리, 다운받으셨나 봐요. 요즘 뜨는
드라마 오에스티죠. 음, 잠시만요.
화장실이 깨끗하네요. 개업이라 구석구석 신경을 썼나본데 손님
이 이렇게 없으니 내가 괜히 미안해지는데요. 안주를 조금 더 시켜
야 하나……. 메일이요? 아, 이제 봤나 보군요. 아까 회사에서 나
오기 전에 그 여자에게 메일을 보냈거든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험악해 보여요. 저, 지금 그 표정 싫어해요. 그래도 메일로 보낸 게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이 다 보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회사에 구조조정 명단이 돌고 며칠 뒤 배낭과 쇼핑백에 짐을 챙
겨 나가는 그를 지켜보는데, 내가 앉은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
았지만, 마음이 울적하더군요. 브랜드시인이 아닌 다음에야 전업
시인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명예퇴직이니 어쩌니 해도 결
국 인사 고과에서 밀려 회사를 나가게 된 그를 위로하고 싶었어요.
그의 블로그를 찾아들어갔던 것도 그래서고요. 비어두다시피 했던
블로그에 예상대로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지면을 뺏겼어도 기자
본능이 어디 가겠어요. 퇴직한 뒤의 일상사가 차곡차곡 올라오는
블로그를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했어요. 그런데 막상 방명록을 열
고나면 입이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원망을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헷갈렸던 거죠.
몇 달을 아무 말 없이 들여다보다 온천천 겨울풍경을 방명록에
올렸어요. 강대나무를 찍은 사진이었죠.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온
천천변을 자주 걸었고, 선 채로 껍질이 벗겨져 말라죽은 강대나무
를 보면 어떤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거든요. 내게서 돌아섰지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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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내 마음이 이러니 그가 나를 모른 척하건 말건 상관없다고 사진
밑에 덧붙이기까지 했어요. 상관없노라 해놓고도 매일,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그의 블로그를 들락거리며 방명록을 확인했어요. 일주
일째던가, 답글이 달리지 않고 있던 내 방문글이 삭제됐지요. 그가
일본에 갔다 왔다며 후기를 올려놓은 날이었죠. 기가 막혀 조금 웃
기까지 했어요. 그는 나를 삭제하고 싶었던 걸까요. 일본여행 중 찍
은 사진에서 그의 어깨에 착 붙어선 여자가 긴 파마머리의 조사실
여자라는 사실보다 무심하게 눌렀을 삭제키가 가슴을 쳤지요.
그땐 눈에 뵈는 게 없더군요. 다시 글을 올렸어요. 거두절미하고
물었죠. 나한테 왜 그랬느냐고. 그래도 한때 나를 좋아하지 않았느
냐고. 엉겁결에 잠자리 한번 같이 한 게 이렇게까지 나를 피할 이
유가 되는지, 뼈 마디마디가 휘어진 몸뚱어리가 그토록 끔찍했는
지 정말 알고 싶다고. 당신이란 인간이 내게 취했던 행동의 진짜 이
유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비밀글이 아닌 공개글로 버젓이
올려놓았으니 모르긴 해도 블로그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겠죠. 그
러나 자기이름으로 낸 시집을 소개하면서 꽤 많은 독자가 찾아드
는 블로그를 포기하는 게 어디 쉽겠어요. 들어가 보니 내 글은 삭
제돼 있고, 글쓰기를 금지해 놨더군요. 접근하면 발포하겠다는 경
고팻말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죠. 욱하는 마음에 까발리며 따지기
는 했어도, 다른 계정을 개설하면서까지 글을 올려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실 거예요. 그는 내게 가장 가까이 왔던 사람
이고, 내 고통을 함께했던 단 한 사람인걸요.
인터뷰기사를 본 날, 다시 그의 블로그를 찾았죠.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조사실의 그 여자가 블로그를 대신 관리하고 있더군요. 귀
소설·안지숙┃ 135
여운 폰트도 그렇고, 배경화면을 요즘 뜨는 드라마 촬영지로 꾸며
놨더군요. 딱 서른 중반의 여자취향이었죠. 그 여자 아이디를 검색
해서 메일주소를 알아냈어요. 무슨 말을 했겠어요. 있는 대로 사실
을 적었죠. 그가 성욕을 풀고 간 이튿날부터 출혈이 시작됐다, 첨
부한 건 핏줄이 터진 채 부어오른 질 천장과 자궁경부를 찍은 사진
이다, 몇 달째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스트레스성 출혈이라 소견을
밝힌 의사의 진료기록과 처방전을 스킨해서 보낸다. 메일을 열어
보고 꽤 놀랐을 거예요. 병원을 찾아가서 겨우 얻어낸 사진이랑 진
료기록을 오늘 그 여자에게 보내고, 그러고 나서 당신한테 전화를
한 거거든요.
스토커요? 정신병자 같은 집착이라고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굳세게 믿는 척하고 내 사랑을 증명하겠노라 애쓰는 것이, 내 시간
내 열정 내 사랑을 바치는 게 다 집착일 뿐이라고요? 내가 그를 실
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랑의 절망을 감추려는 꾸며낸 집착일 뿐이라는 건가요? 하, 어쩌
면요. 좀 이상한 논리이긴 하지만, 당신 말대로 제가 어차피 스토
커라면 내가 내 사랑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더욱이 없는 거겠지요.
당신을 통해 그를, 내 사랑의 끝을 따라가야겠지요. 아무리 그래봐
야 죽은 나무에 꽃이 피겠느냐고 빈정거리는 당신의 말투도, 노려
보는 눈길도 다시 사납고 냉랭하네요. 제 말이 아직 이해가 안 되
는가 봅니다. 제 굳은 몸이 아니라 당신이 내 마음속에서 강대나무
로 서있는 거라는 것. 이것이, 그 사람에게로 가는 말라죽은 나무
의 방식이라는 것.
답답해하지 말아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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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금 당신 뒤에 숨어 나를 지겹고 역겨운 스토커로 몰고 있지만,
내가 그를 놓을 수 없음은 당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 깨
닫지 못한 채 나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기형의 외
로운 몸으로 그를 껴안았던 내 사랑이 나날이 순정해지듯 그 또한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당신이 내게 일러준 게 그것이
아니던가요.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나무의 방식이오. 처음 정해진 거리 그대로 세상의 풍
경을 이루며 늙어가는 나무의 방식 말이지요.
네? 눌러주다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아, 그런 식으로 말
하다니 당신답지 않아요. 당신을 통해 당신 뒤에 숨은 그를 사랑한
다느니 어쩌니 에두를 것 없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다시 한 번 눌러
주겠다는 식의 천박한 말투라니요. 취하신 거 같으니 넘어가 드릴
게요. 아뇨, 제 손은 놓고 앉아보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하고
잠은 자지 않을 거니까. 당연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두려워서
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 말이에요. 야윈 가슴과 마디마디 부어
오른 등뼈와 살점 없는 엉덩이에 욕정을 쏟고 나면 누구랄 것 없이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견딜 수 없는 사랑보다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여자로서 두렵고 치명적인 것 이해할 수 있
을 거예요.
전화, 또 그 여잔가요? 받아보세요. 그래요. 그럼, 짧게 할게요.
간사 직책을 그만두고 나온 장애인인권센터까지 끌어들여 당신을
초청시인으로 모셔 달라 부탁하고, 그걸 빙자해 당신을 만나려한
것……. 그가 회사를 나가고 난 뒤 나 혼자서도 종종 온천천변을 걷
는다는 말은 했지요. 때로는 집까지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서 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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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하기도 했는데, 강대나무가 들어선 둔치를 지날 때면 늘 그가 생
각났어요. 그것도 봄비 내리던 삼월의 방바닥에 누운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사납고 무심한 표정의 그가 떠올랐어요. 어김없이 아
랫배에 냉기가 스치는 게 느껴졌고요. 서늘한 사막처럼 뱃속이 비
워져 가는 느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거기에는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뭔가가 있었어요. 아마 내 몸에 일어난 변화 때문일 거예요.
그와 관계를 한 뒤 몇 달간 지속되던 출혈이 멈추면서 생리도 같이
끊겼지요. 치료를 해준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로 인한 출혈성 질환
이 폐경을 앞당긴 듯하다더군요. 그게 아니라면 관절치료를 위해
장기간 복용해온 스테로이드제가 조기폐경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요.
이제 마흔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인생이지만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삶이었어요. 딴엔 눈앞에서 놓쳤던 많은 것들을 아쉬
워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지요. 내 몸에 깃든 병과의 오랜 싸움 끝
에 드디어 생을 달관해서가 아니라 독한 약에 절어 남들보다 빠르
게 늙는 몸에 맞춰 마음이 낡아버렸기 때문일 거예요. 이젠 애를 써
도 꼿꼿할 수가 없어요. 오랜만에 찾아뵀는데 센터 소장님도 제 걱
정을 많이 하셨어요. 장애인 예술제 행사에 초청되는 강사가 내정
돼 있는 걸 알면서 굳이 당신을 섭외해 달라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
고요. 나에 대해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내가 내 마음을 어찌하
지 못해 강간에 가까운 상황을 상상한 것이 아니냐고, 아무래도 치
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당신, 내게 그랬듯, 나와 있었던 일을 소장님한테 감추고 싶어한
거 이해해요. 사랑이란 게 원래 감추는 거니까요. 나 또한 오늘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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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찾아온 것, 우리 두 사람 감쪽같이 숨어들 서늘한 사막 같은
공간을 품고 있노라 알려주고 싶어서인걸요. 설사 당신이 이미 내
가 내민 강사초청장을 던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해도요.
그 전에 당신이 밥이라도 먹자며 끄는 내 손길을 마다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서 진작 가버렸고, 나 혼자 여기 들어와 빈 소주병을 늘려
가며 넋두리를 하는 거라 할지라도요. 어쩌면 당신을 만난 적조차
없이 늘어놓는 이 장황한 고백 앞에서 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만나
토란액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나 혼자 젖어든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운 몸으로 촉촉이 스며들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것, 아실
테니까요, 당신.
안지숙
2005년 신라문학상. 소설집 『내게 없는 미홍의 맑음』 장편소설 『데린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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